중국-인도 영토 분쟁
배경
인도와 중국 간의 국경 문제는 양국관계 개선의 최대의 걸림돌이며 양국 국경선은 세계에서 최대의 불확정하고 분쟁의 소지를 품고 있는 국경선이기도 하다. 양국의 국경분쟁 대상 지역은 3개의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다. 서부지역은 인도령 카슈미르와 중국의 신강성과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억사이 친이고, 동부지역은 인도 북동쪽 국경지대인 티베트 지방으로 과거 영국이 막마혼 라인에 의해 경계선을 설정한 지역이다. 중부 지역은 인도의 4개 주-뻔잡 주,히마짤 쁘라데시 주,우따르 쁘라데시 주 우따란짤 주와 동부 아쌈 주와 그리고 나가랜드 주로부터 중국 티베트 지대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인도와 중국은 국경선 협상 그리고 신뢰 구축 조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의 중국과의 회담 참가 동기는 소련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큰 외교적인 융통성을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 그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트스탄에서 초 지역적인 (Extra regional)무장 군대를 도입하고 있었고, 인도는 당시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세력국가였으나 그 지위를 무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양국 간 국경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1993년, 그리고 1996년 양국 간 실제 통제선에서 평화와 평정 유지, 감군 군사 활동 제한 등 긴장 완화를 위해 협정, 2003년 인도-중국 정부 간에 양국 간 관계 및 포괄적인 협력을 위한 원칙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2005년 양국 국경 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 원칙 및 정치적 요소 관련 협정 등으로 양국 간 국경문제의 조속한 해결노력은 강화되었다.
맥마흔 라인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중국의 국내정치는 어지럽고 불안했다. 영국은 그 당시의 이러한 중국의 국면을 이용하려고 했다. 게다가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아 황제의 야심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심정을 이용하여 중국,영국(영인도), 티베트 각국의 대표가 참가한 상태에서 시믈라(西姆拉)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티베트의 행정, 체제 등에 대한 안건을 다루었는데, 인도-중국 경계의 동쪽 부분이 이 때 정해진 맥마흔 라인에 따라 정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은, 중국 대표 진이법(陳贻範)이 조약에 서명하지 말라는 중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약정을 거절했다고 주장한다. 그 당시에 영국의 압력으로 인해 중국 대표가 가조인하기는 했으나, 진이법은 만약 가조인 후 중국 정부가 이 가조인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조약 무효라고 영국과 합의 했으며, 영국 또한 이 조건을 인정했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주장은 결국 진이법이 마지막 정식 체결 회의에서 서명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도는 당시 중국의 대표가 조약에 서명을 하고 중국정부가 이 조약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도의 식민지 시절 맺어진 조약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이 국경분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도 경쟁의식
정치학자 Yaacov Vertsberg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인도가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 자체를 경멸한다. 게다가 인도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중-인 국경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M.J.Paradesi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과 주언라이는 당시의 인도 수상인 네루가 국경분쟁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네루 수상이 티벳을 일종의 완충장치로 사용하기 위해 중국과의 국경분쟁은 일으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국은 국경 분쟁을 각각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다. 인도는 역사적/법적 접근방법을 취한다. 서부 아커싸이친 지역에서의 분쟁에 대해, 인도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문화권을 주장한다. 동부 티벳 지역의 분쟁에 대해서는 1913-1914 시믈라 회의 등에 대한 자료를 통해 법리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이에 비해 중국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국의 주장은 티벳이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 소유의 영토이기 때문에 티벳과 타 국가가 맺은 조약은 무효라는 식이다. 중국은 인도의 정책을 문제 삼기도 한다. 중국이 국경지역의 군사력을 증강시켜 국경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 갈등 속에서 중국과 인도 사이의 경쟁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는 중-인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 두 국가의 대립에는 서로간의 경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이 두 국가 사이에 개입해서 중재해줄 강대국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중-인 분쟁은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소련의 입장 변화
소련과 인도는 1947년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당시 인도 국내정치는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 소련이 인도는 “영미 제국주의의 동양 헌병”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1952년 이후 소련은 미국과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서방 진영으로 편입시키려는 인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인도와 관계를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한편 줄곧 ‘형제’ 나라인 중국과 소련은 1950년대 후반 들어 국제문제에 대해 불일치가 잦아졌다. 소련은 중ㆍ인 국경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표면적으로 중국을 지지했지만, 이후 소련은 중ㆍ소 간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국경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중립’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중립’ 입장은 중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 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경원(敬遠)해진 반면에 소련과 인도의 관계는 호전되었다. 1960년 소련은 “만약 인도가 원조를 필요하다면 군사를 포함해서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기에 이르렀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
티베트는 1951년 5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과 베이징 시에서 17조협의(또는 중앙 인민 정부와 티베트 지방 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 해방에 관한 법적 협의)를 체결하면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으며, 중국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이 협의를 지키지 않았고, 1951년 10월 24일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과 중앙 인민 정부에 17조협의의 준수를 요구하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중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여 티베트 망명 정부를 수립하는 한편 17조협의의 파기를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인도가 달라이 라마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내정을 간섭한 것으로 규정해 양국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고, 이는 중인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관련 국가들의 이해관계
영국
중ㆍ인 영토문제에 대한 충돌은 영국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1914년의 시믈라 회의에서 영국의 맥마흔(H. McMahon)은 ‘맥마흔 라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라인을 중ㆍ인 국경선으로 삼았다. 이후로부터 중ㆍ인 국경의 동부지역 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서부의 악사이 친 지역은 영국 존슨(W. H. Johnson) 장관의 ‘존슨 라인’에 의해서 중ㆍ인 양국의 서부지역 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인도 독립 후에 중ㆍ인 영토문제에 대해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중ㆍ인 영토문제를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영국은 지금까지도 이에 관한 어떠한 책임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개입으로 인해 중ㆍ인 관계의 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은 무너지고 상호불신(mutual distrust)의 관계로 치닫게 되었다.
미국
미국은 냉전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을 소련의 아시아 확장을 억제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파키스탄은 미국이 창립한 ‘중앙조약기구(CENTO: Central Treaty Organization Central Treaty Organization)’과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했다. 반면 인도는 독립 당시 동맹을 맺지 않은 원칙을 내세워 미국의 동맹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또한 인도는 신중국의 성립과 대만을 중국의 한 부분으로 인정했다. 또 당시 미국은 중국을 적대시하는 인도의 태도를 비판했기 때문에 미ㆍ인의 관계는 소원하게 되었다. 1962년 10월 20일부터 행해진 중국의 공격에 계속해서 패전을 거듭하던 인도는 그동안 친소 노선을 걸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미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 미국은 승인하여 태평양에 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미국 입장에서도 소련과 갈라섰다고는 하나 여전히 공산주의 세력인 중국을 견제할 기회였기 때문이다.이에 중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1962년 11월 21일에 기하여, 인도에 투입된 병력 전체를 자국이 주장하는 1959년 11월 7일 기준의 동·서부 방어선으로부터 20km 후방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휴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는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1971년의 인ㆍ파(印巴) 전쟁 당시 미국의 파키스탄에 대한 지원으로 인ㆍ파간의 경쟁과 적대의 상황은 심해지고 있었다. 인도는 동맹을 맺지 않고 소련의 우호관계, 파키스탄과는 대항관계인 것인데 반해,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정책과 소련과의 적대관계, 미국ㆍ파키스탄 동맹 등으로 미국과 인도는 상호 협력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미국과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양국은 공통의 가치관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냉전 후에 인도는 경제 자유화 정책을 실행하였고 자국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도라는 큰 시장은 미국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인도 역시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투자와 무역 파트너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과 인도의 상호협력과 우호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과 인도는 중국을 억제하려는 공동의 목표로 인하여 협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특히 중ㆍ인 영토문제에 대해 미국은 인도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소련
한편 중ㆍ인 영토문제에 , 대해 소련의 반응과 정책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이는 단지 중ㆍ인 간의 문제 해결에만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소련 상호관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인도의 독립 후 소련은 당시 인도의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는 영국에게 타협하는 결과라고 밝히고 또 인도는 서방 제국주의에게 기울었다고 비판했다. 인도와 당시 소련의 정치제도 간에는 상당한 차이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인도와 소련의 경제협력도 그에 정비례하여 미비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한 인도의 정책과 태도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인도와 소련의 관계가 좋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도 인도를 이용하여 서방 민주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도와의 협력관계를 강조했다. 그리고 인도가 중요한다고 생각하는 문제, 즉 카슈미르 문제에 대해 인도의 입장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중ㆍ소 간의 의견 불의치는 이후 중ㆍ인 분쟁 문제에도 소련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1959년 중ㆍ인 충돌 후 중국은 소련의 태도에 대해 “평화공존원칙” 기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의 지지를 원하는 중국의 이런 표명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소련의 이런 입장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수상은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중ㆍ인 문제에 대해 중국을 비판하고 인도를 지지하는 태도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중국은 소련의 이런 행동에 대해 “사회주의 국가간의 신임과 우호를 깨는 행동이며, 미국에 대한 타협인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중국의 비판에 대해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ㆍ인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형제’처럼 지내왔던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중립’이라는 정책은 사실상 인도의 편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소련은 중ㆍ인 국경 문제로인해 인도는 필연 미국에게 의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인도의 입장을 봉쇄하기 위해 인도의 입장을 들어 중국을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중국과 광활한 국경선 마주한 소련의 입장에서는 중ㆍ인 영토 분쟁문제에 대해 중국을 지지하게 되면 자신들과의 국경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립적 태도를 취한 소련은 미국과의 쿠바(古巴)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1962)의 형세가 긴장국면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지를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소련 중ㆍ인 문제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중국의 입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시에 중ㆍ인 국경 ‘맥마흔 라인’은 영국 제국주의 만든 것이고 중국정부에 공식인정을 받은 적이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도 쿠바 미사일 사건에 대해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고 미국의 음모를 막자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는 소련이 원했던 중국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 후 소련 다시 정책을 바꾸어 인도를 지지하고 심지어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인도는 독립 전 영국 만든 맥마흔 라인과 존슨 라인 등을 유리한 제반조건을 갖추고 출발하였고,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통해 중국과 게임 진행에서 확실히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판단했다. 비록 중국 보다 군사력은 뒤처지지만, 이는 우방 국가들의 지원으로 인해 중국과의 충돌에 대해서도 피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탄
부탄은 2017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2017년 6월부터 도클람(Doklam, 중국명 둥랑洞朗)고원의 도카라(Doka La)고개에서 도로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 지역은 부탄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곳이었다. 부탄 정부로서는 자국의 군사력이나 외교력으로는 도저히 중국에게 항의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인도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의 갈등이 커지고, 군사 대치도 50여 일간 일어나자 부탄 내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크지도 않은 땅(도클람)은 포기하는 게 낫다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실제로 2005년 부탄은 도클람을 중국에 내주고 다른 분쟁지역을 얻는 것을 고려했지만 인도의 반대로 포기했다. 하지만 부탄은 2015년 전체 수출액 5억달러 중 90.3%를 인도에 의존하기에 인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2017년 8월에는 2개월째 인도와 대치한 중국이 부탄을 자국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00억 달러(약 11조 3천억 원)의 경제지원을 제의하여 부탄이 어떤 편을 들것인지 주목되기도 했다.
분쟁 지역의 중요성
티베트 문제
중국과 인도의 국경은 티베트 지역에서 접해있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에서는 인도와의 영토분쟁이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티베트 지역 지배에 대한 정당성 문제까지 엮여있는 중요한 이슈이다. 인도와의 영토분쟁에 대한 중국의 입장 중 상당부분이 해당 지역이 역사적으로 티베트의 영역 혹은 문화권이었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 Namrata Goswami에 따르면 중국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약 90,000km2의 영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게 티베트 이슈는 가장 민감하다. 따라서 티베트 문제가 제대로 취급되지 않으면 이것은 인도-중국 양국 관계를 하룻밤에 파괴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지극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1950년대 후반 티베트 문제는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 학계에 따르면 1962년 양국간의 대규모 군사충돌의 시발점이 티베트에 있다고 하고 중국에서 1990년대에 출간된 1962년의 양국간 대규모 군사충돌 관련 연구도 인도의 국경 정책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약화하거나 정복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관련 중국 연구들은 티베트 장악 또는 티베트를 1949년 이전 상태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인도의 전진 정책이며 이것이 1962년의 대규모충돌의 본질적인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은 티베트에서 중국의 통치를 무시하고 티베트를 장악하려는 인도의 시도가 1962년의 대규모군사충돌의 주요 원인 되었다고 한결 같이 동의한다.1962년의 대규모 군사충돌에 대한 중국인민군의 공식적인 기록은 인도가 티베트를 완충지대로 바꾸려고 했고 티베트를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 제국주의의 전략이었으며 따라서 네루는 이런 면에서 영국의 완전 계승자였다고 주장한다. 그 만큼 티베트는 양국 관계를 좌우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략적 중요성
도클람 고원에 위치한 춤비 계곡은 중국의 자치구인 티베트에 걸쳐 있으며, 인도의 동북부와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인 ‘실리구리 회랑’과도 가깝다. 다시 말해 중국이 춤비 계곡을 관할하게 되면, 핵심이익인 티베트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공세적인 태세로 인도를 견제할 수 있다. 유사시 중국이 실리구리 회랑을 점하게 되면, 인도의 병력・군수 지원을 결정적으로 차단하고 인도를 고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도가 자국의 동북부에 발이 묶이면, 인도는 전통 세력권이 축소되는 반면 중국은 인도양으로의 세력권 확대가 한결 용이해진다. 공교롭게도 양국군 대치가 해소된 지3주차에 중국은 티벳-네팔 국경 간 고속도로 개통을 공식화했다. 중국 관영매체는 “이 고속도로를 통해 중국은 경제적 그리고 국방 측면에서 남아시아에 다다르는 도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중요성을 부여했다. 도클람 위기를 계기로 인도로서는, 중국이 자국을 에워싸는 ‘해양 진주목걸이 전략’ 외에도 산악지형인 남쪽 국경을 통해서 부탄과 방글라데시를 직접 연결하는 육상통로를 개척할 가능성을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
그러나 전략적 중요성만을 이유로 중국이 이전과 다르게 이토록 공격적으로 나선 것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2013, 2014년에도 중국은 양국 현장 지휘관 회의를 통한 철수 합의라는 현상유지 기조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영토 동랑’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위기 고조의 주도권을 가지고 인도가 철수할 때까지 밀어 붙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인도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함에 따라 양국 간 대립은 ‘벼랑 끝 위기’로 규정된다. 벼랑 끝 위기는 일국이 상대국을 강압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상대국의 중요한 책무(commitment)에 도전할 때 발생한다. 이 때 도전국은 전쟁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다. 리보우(Richard Ned Lebow)에 따르면, 도전국의 벼랑 끝 위기 조성 목적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영토적・경제적 혹은 전략적 보상 획득, △ 상대국의 양보를 확보함으로써 거래 성립, △ 국제사회에 상대국의 나약함을 입증함으로써 상대국에 굴욕주기가 그것이다.
2018년 1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게재된 중국군사과학원 연구자의 기고문을 통해 중국의 의도를 추론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는 도클람 사태가 ‘인도양’에서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이 성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인도와 부탄을 제외한 모든 남아시아 국가들에 환영받는 중에 발생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인도양으로 영향력 범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분쟁국인 부탄과 거래를 성사시켜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고,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의 체면을 손상시키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개과정
양국 간 초기우호와 협력 시기 (1950-1958)
인도는 1949년 중국에서 공산정권이 수립한 것을 인정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첫번째 비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당시 인도 총리인 네루는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 그리고 국제 정치의 복잡성에 대한 혼합 세계관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당시 냉전 시대의 세계질서에서 인도의 국익을 확실히 구분하면서 사회주의 국가인 인도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간에 아무런 전면 충돌 혹은 대립할 명백한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세계 평화와 안보에 위험하다는 미국의 인식과도 공유하지 않았다. 중국인민공화국 지도자들도 인도의 친 이웃 외교 정책에 영향을 받았고 그런 외교 정책을 실시하는 데에 있어서 인도를 중요한 국가로 인식했다. 따라서 네루 총리와 모택동의 세계관은 각각 인도와 중국을 형성하고 양국의 국 제 행태 및 역할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양국은 많은 다국적 이슈에 협력을 구축했다. 중국은 한반도 그리고 나중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평화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인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 역할을 칭찬 하였다.인도는 또한 새로운 중국의 세계적인 역할을 중요시하며 중국의 유엔 회원국 진출을 지지했고 한국 전쟁에서 중국을 침략국가로 매도하는 유엔의 결의안들을 반대했다. 인도의 중국에 대한 이런 호의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은 양국 간에 우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인도의 대 (對)티베트 정책이 문제가 되었고, 인도 정부는 1950년대 중국의 티베트 지 역 해방을 방해했다. 그러나 1954년 4월에 (인도와 중국 티베트 지방간의 통상과 교통에 관한 협정) 인도와 중국 쌍방의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이 문제는 다행히 평화적 협상을 통해 해결되었다.
또한 그 시기에 인도와 중국 정부 대표단은 중국의 티베트 지방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인도와 중국 양국 관계를 조정하는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 것은 상호 주권과 영토 보전의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 공존의 “빤쯔실(Panchsheel)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치외법권과 혜택을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로 인정했다. 같은 해 6월 인도 네루 총리 초청으로 주은래 중국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고 인도 대중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방인 기간에 양국 정상들 이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재건 촉진을 위해 협력 의사를 밝혔다. 네루 총리는 주은래 총리에게 양국 간의 평화 공존 원칙을 평화의 중립 지대 창설을 위해 동남아시아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을 했다. 또한 이 중립 평화 지대는 외국군 주둔지 없이 외부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자유 지역 있어야 함으로 이해되었고 네루 총리는 이 중립 평화 지대를 창설 위해 최고의 대안은 동남아조약기구(SEATO)라고 지적했다. 1954년 10월 네루 총리의 방중은 여태까지 가장 크게 환영 받은 첫번째 외국 정상이었다. 또한 네루 총리의 중국 방문은 중국 외교 정책의 평화 공존 원칙을 초보 지도 뿐 아니라 네루 총리가 인도를 좌경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를 재확인했다. 네루 총리는 또한 건국 과정에 있어서 중국의 공산정권 그리고 중국 인민들의 열의와 헌신에 감동 받았고 1955년 1월 자신의 정당인 국민회의당 대회에서 당내 관료주의적 그리고 보수적 세력들의 영향을 축소시키면서 사회의 사회주의적 패턴을 추구하기로 했다. 중국이 네루의 정치를 좌경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없으나 중국의 경험은 네루의 좌익 성향에 지적, 감동적 그리고 정치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동 시기에 인도의 제2차 경제 계획에도 중국의 영향을 볼 수 있다.1차 산업 그리고 공공 부문에 큰 비중을 둔 인도의 제2차 5개 년 계획이 중국의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
1956년에 중국의 집단화를 연구하기 하기 위해 인도에서 고위급 대표단 2명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그 대표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인도 여당인 국민회의당이 1959 년 당회의 때 당의 집단 농업에 대한 정책을 공식화했다. 중국의 대약진 운동 그리고 인민공사는 인도에서 집중적인 관심 대상이 되었다. 1957년 미국의주도로 유엔 안보리에서 제안된 카슈미르(Kashmir) 결의를 비난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개최했는데 반 식민지주의 노선에 따라 그 당시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던 국가를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연대하기로 했다.동 회의에서 인도-중국 간에 그 동안의 있었던 협력은 최고봉에 달했다. 말 그대로 그 때가 양국 외교 관계에 있어서 “황금기”혹은 “인도-중국 형제 이다”(Hindi-ChiniBhai Bhai)의 시기였다.
국경 분쟁 및 관계 악화 시기(1959-1969)
1958년까지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동쪽 국경선에서 부족민 지역인 타왕 (Tawang)(처음에 NorthEastFrontierAgency(NEFA)로 명명 되다가 나중에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Pradesh로 명명되었음)을 거기서도 맥마혼 라인을 국경선으로 간주하고 인도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로인해 양국간의 국경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졌다. 본격적인 전쟁의 분위기가 감돌기 전부터 1959년 8월 동부 국경지역인 롱주(Longju)에서 사건이 발생했는데, 중국군은 동 지역의 인도초소를 점령했다. 2차 충돌은 1959년 10월 서북 국경(라다크)의 콩카 협곡에서 중국군의 동태를 탐지하던 인도군 정찰대와 중국군간의 총격전으로서 인도 측에서 사망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국경지역에서의 충돌 발생 이후 인도는 1961년 12월까지 중-인 동서부 국경지역에 약 50개의 국경초소를 설치하여 국경지역에서의 긴장수위가 고조되었다. 1962년에 들어와서 중국과 인도 사이의 군사 분쟁 가능성이 구체화되었다. 같은 해 7월 중국은 서북부 신장(新疆) 자치구와 티베트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하려는 보급로가 인도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라다크 지역을 통과했는데 이에 양국 간의 소규모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국경지역에서의 충돌 발생 이후 인도는 6월을 전후로 감시초소를 추가로 설치하고 일부 병력이 맥마흔 라인보다 이북으로 배치되는 등 한층 날카롭게 맞붙었다. 9월에 들어서는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과 인도 양국의 병력이 소규모 충돌을 반복했다. 중국은 인도와의 분쟁이 단순한 국경 지대의 영유권 대립을 넘어, 티베트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이 위협받고, 더 나아가 티베트가 분리 독립한 후 인도의 영향권에 편입되어 영토 주권과 국가안보가 심각하게 손상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은 인도에게 국경 확정, 티베트 지배에 대한 의지를 표출, 관철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는 판단에 도달하였다. 같은 시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여 미국, 소련의 두 초강대국이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중국은 국제사회의 개입을 우려하지 않고 인도와의 군사적 대결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20일부터 1만여 명의 중국군 병력이 동부의 히말라야 산맥 일대, 서부의 라다크 지역에서 인도군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도가 국경 지역에서 도발을 반복하는 것에 맞서, 반격을 가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10월 25일까지 계속된 이 공격으로 중국군은 동부에서 맥마흔 선 이남의 거점인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점령했고, 서부에서도 인도군이 구축한 16곳의 감시 초소들 가운데 11곳을 점령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은 공격의 성공 직후, 인도에 협상을 통한 국경 확정을 제안했지만, 오히려 인도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중국과의 무력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에 중국은 인도와의 전쟁에 병력2만 명 이상을 추가 투입하여 병력 규모를 총 3만 5,000여명으로 증강하는 등 전투 재개에 대비했는데, 이는 당시 인도가 동원한 약 2만6,000명의 병력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당시 중국이 인도와의 전쟁에 투입한 병력들은 대부분 티벳에서 배치 및 동원되었으며, 때문에 주요 전투가 벌어진 고산 지대에서의 작전 수행에 익숙했다. 이후 11월 14일 인도군이 동부에서 중국에 공세를 시도했지만 격퇴되었고, 오히려 이틀 후인 11월 16일부터 중국군이 인도군을 겨냥한 공세를 재개했다. 중국군이 3개 사단을 중심으로 병력을 편성, 투입했던 것과는 달리, 인도군은 주로 대대 및 여단급 부대로 분산된 채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중국군은 병력 규모의 우세를 앞세워 인도군의 각 부대들을 포위, 우회하는 방식으로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11월 19일까지 다수의 인도군 부대를 섬멸, 패퇴시켰으며, 아루나찰 프라데시보다도 이남에 위치하는 인도의 동북부 내륙 지역으로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중국은 11월 21일을 기하여, 인도에 투입된 병력 전체를 자국이 주장하는 1959년 11월 7일 기준의 동 ․ 서부 방어선으로부터 20km후방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휴전을 일방 선포했다. 이러한 중국의 결정은 ① 전세가 불리해진 인도가 미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 부담을 피하고, ② 인도에 대한 군사적 응징이 성공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공격 지속은 국제적인 비판을 야기할 수 있으며, ③ 시기적으로 겨울을 앞둔 상황이라서 장기간의 전쟁 수행이 어렵다는 점 등을 반영한 결과였다.
중국은 1962년 10∼11월에 벌어진 인도와의 국경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명백한 승리를 거두었다. 2개월 동안의 전투로 인도군에게 전사1,383명, 실종 1,696명의 피해를 입히고, 3,968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향후의 국경 분쟁에서인도가 공세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견제 및 억지하고, 티베트에 대한지배권을 기정사실화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정치 ․ 외교적 성과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도에게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경선을 수용하도록 관철시키지 못하면서 맥마흔 라인과 관련된 약 9만제곱미터에 달하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지방을 탈환하진 못하였고, 단지 국경 일대에서 악사이친과 같은 인구밀도는 희박하고 황무지에 불과한 잠정적인 완충 지대만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 중국과 인도는 외교관계도 끊어졌고, 국경문제도 오래토록 해결되지 못했다. 1969년 인도 정부가 국내외의 발전 형세 때문에 중국과 회담의 방식을 통해 중·인 영토분쟁을 해결방법을 모색하려는 의원을 전했다. 중국도 이에 우호적인 반응을 취했다.
인도-중국 관계 정상화 시기 (1969-1997)
1971년 인도 정부는 이전과는 완전히 반대 적인 행동을 했다. 인도 의회는 맥마흔 라인남쪽의 지역을 포함해서 중국과쟁점 중인 9만㎢ 지역을 일방적으로 인도의 중앙 직할구로 제정한다는 것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루나찰(阿魯納恰爾)”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중국은 많이 불만을 표출하고 이 지역에 대한 인도의 일방 적 선포를 불법이라고 했다. 인도의 이러한 행동은 완화한지 얼마나 되지 않 은 중ㆍ인 관계는 다시 악화시켰다. 이후 1976년에 이르러 양국 관계는 다소 나마 호전하게 되었다. 인도도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담판의 방식으로 평화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중국의 해빙 무드는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양국 국내에서 일어 난 정치적 변동으로 가속화되었다. 인도에서는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가 선거에서 패배하고 지나타당(Janata Party)의 데사이(Morarji Desai) 정권이 들어서고 중국에서는 모택동(毛澤東) 사후 등소평(鄧小平)이 등장하면서 양국 관계는 한결 온화해졌으며, 경제교류도 활발하게 모색되었다.
1980년 인도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이 극적으로 재집권하게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다시 중국 지도자들과 대화를 계속했다. 이런 결과로 1981년부터 인도와 중국은 외무 차관급 정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등소평은 또 인도중국 우호 관계를 강조했으며1982년 10월 22일 인도 사회과 학이사회 대표단과 회견에서 등소평은 인도-중국 양국 인민 간에는 전통적인 우의가 있고 또 양국은 개발도상국 중 대국으로서 양국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남남협력(南南協力)의 촉진이라는 큰틀에 해당되기 때문에, 양국간 국경분쟁은 주요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인도-중국간 국경문제를 한번에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이를 우선 미해결 상태로 놓아두고, 무역 경제 또는 문화 등 영역에서 왕래를 늘리고 우의를 증진하며, 협력을 확대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국경분쟁을 해결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중국 측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인도측은 국경문제 해결을 우선시해야 하고 국경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다른 분야에서 협력이 이뤄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981 년에서 1987년 11월까지 양국 간에 국경분쟁 해결을 위해 8차까지의 외무 차관급 회담은 양국 간의 이견으로 성공되지 못하고 그 동안 정상급 방문의 길 이 폐쇄되어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양국 관계가 다소 악화되었다.
1986년에 인도 국방부는 연례 보고서에 중국을 인도의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고 1987년 중국군의 인도, 중국 그리고 부탄 사이에 위치한 솜두랑추(SomdurangChu) 계곡에 전진, 그 후 중국이 자기 영토로 주장해온 NEFA 지역은 인도의 아루 나찰 프라데시라는 한 주(州)로 승격되었다. 다행히 이런 상황은 양국 간의 또 하나의 대규모 충돌로 돌변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의 전반적 정세는 냉전에서 대화 그리고 긴장에서 완화로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인도-중국 관계 개선을 위한 유리한 환경을 마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88년 12월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는 4일 간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는 34년 만에 인도 총리의 방중(訪中)으로서 양국 관계에 개선의 시대를 의미하였다.중국 지도자인 등소평은 양국이 불쾌 한 과거를 잊고 미래로 향하자고 호소하였으며 국제정치 신질서 건립을 위해 인도-중국 양국이 공동 제창한 평화 공존 5원칙을 강조하고 네루 총리와 주은래 총리는 이 원칙의 창조자이며 5개항의 원칙은 대단히 명확하고, 간결 정연하고,명명백백하고 국제관계 신질서 건립에 있어서 인도-중국 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따라서 라지브 간디-등소평 대화는 인도, 중국 관계 발전의 길을 닦아 줬다.양측은 국경 문제에 어느 정도의 접점을 찾았고 국경 문제 를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합의했다.따라서 다른 분야에 교류를 확대하면서 국경 문제의 논리적이고 정당한 해결을 위해 분위기 조성과 관련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또한 국경 지역에서 긴장 완화 그리고 실제통제선(LOAC)에서 평화와 안정 유지를 위해 양국의 외무 차관급 공 동 실무팀(JointWorking Team)이 처음으로 구성되었다.이외에도 양측은 경제,무역 그리고 과학 기술 분야에 교류 증진을 위해 장관급 실무팀을 구 성하기로 합의했다.이로써 1988년 라지브 간디의 방중은 양국간의 교류 및 협력의 전망을 넓히면서 양국 관계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라지브 간디의 중국 방문으로 1989년 이래로 인도-중국 관계는 모든 분야에 급속히 발전되기 시작했다.통계에 따르면 1989년 후반부터 1990년 말까지 10건이나 그 이상의 양국 차관급 방문이 이어졌다. 1991년 리펑(李鹏) 총리가 인도를 방문하여 수십년간 중단된 중국과 인도 고위층 상호 방문을 회복하였다. 1992년 인도 총리 벤카 타라만(Venkataraman)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는 인도가 독립한 이래 첫 번째 총리의 방중이다. 1993년에는 인도 총리 라오가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이 “중국·인도 변경지역에서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것에 관한 협정(关于在中印边境地区保持和平与安宁的协定)”을 체결하였다. 1996년에는 장쩌민 주석이 인도를 방문했는데, 이는 중국과 인도 수교 이후 첫 번째 중국 국가원수의 인도 방문이다. 양국은 ‘21 세기를 향한 건설적 협력파트너 관계’를 건립하는 공감대를 이루어, 양국 관계의 발전 방향을 표명하였다. 동시에 양국은 ‘중국과 인도 변경에서의 실제 통제선 지구 군사영역 건립 신임 조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은 상술한 1993년 협정과 함께 중국과 인 도 변경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6년 6월 인도 외교부장관 싱이 중국을 방문하여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관과 두 가지 중요 합의를 이루었다. 즉 중국과 인도 관계 발전의 전제는 상대방을 서로 위협으로 보지 않는 것이고, 중국과 인도 관계 발전의 기초는 양국이 공동으로 제창한 평화 공존 5개 원칙이다. 이로써 중국과 인도 관계는 정확한 궤도로 돌아갔다.
인도 핵실험이후의 인도-중국 관계(1998-2005)
1년후 인도 측은 입장을 전환하였다. 인도가 1998년 5월에 실시한 5건의 핵실험으로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갑작스럽게 좌절되었다. 인도에서 핵실험을 진행한 전후에 인도 국방부장 페르난데즈가 중국은 인도의 ‘잠재적인 최고 위협’이라고 칭하였다. 인도의 지도자들도 ‘중국위협’을 핵무기를 개발하는 빌미로 삼았다. 인도의 이웃국가로서 초기에 인도의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온건했다. 또한 인도 정부는 중국을 인도 안보의 "잠재적 위협국가"로 정확히 지적하면서 핵실험을 정당화했다. 중국은 인도의 핵무기 실험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 인도 총리인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내용이 뉴욕 타임스 1998년 5월 13일자에 “중국은 인도에게 핵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보도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호전되고 있던 양국 관계도 큰 타격을 받았다. 중국은 인도의 이런 비난을 “전혀 근거 없다”고 부정했고 1998년에 예정되었던 신뢰 구축 조치의 논의를 위한 양국 공동 실무그룹의 회의를 취소했다.
2010년대 도클람지역 중인국경분쟁 및 그 이후
2013년대에 들어서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인민해방군 침범 여부를 둘러싸 고 양국군이 20여 일 간 대치상태를 맞이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으나, 충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인도 외무장관의 방중과 리커창 중국 신임 총리의 인도 방문 등 양국은 외교적 해결을 성사시키며 사태를 원만하게 관리하였다. 또한, 양국은 국경협력협약(Border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을 체결하여 국경분쟁의 평화적 해결의지를 보여주었다. 2014년과 2015년에도 중국군이 실질통제선을 넘어 인도지역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으나, 양국의 장기간 대치나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중국과 인도는 간헐적이고 지속적으로 대립하면서도 ‘평화적 해결 원칙’을강조하며 자국의 경제안보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2017년 이른바 ‘도클람 위기’를 계기로 동 분쟁은 ‘장기간 무력대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6월 16일 중국군이 중국(티베트)-부탄-인도(시킴) 3국 국경선이 만나는 도클람 고원에서 남쪽 인도 방향으로 도로건설을 연장하면서 “중국령 둥랑”이라고 주장한 것이 위기의 도화선이었다. 도클람 고원이 위치한 도클람 지역(부탄명 도클람·인도명 도카라·중국명 둥랑)을 두고, 중국은 1890년 이후 실효적으로 지배해 온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부탄은 국경이 확정되지 않은 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부탄의 후원국인 인도가 상호 방위의무를 규정한 우호조약을 근거로 6월 18일 도클람 지역에 병력을 파견해 중국군과 대치했다.
사건에 앞서 중국군은 2017년 6월 1일 인도군 측에 3국 접경지대 인도 시킴주(Doka La)에 위치한 인도의 벙커를 제거하라고 요구하였다. 인도 육군초소는 중국이 3국 국경선 접점으로 주장하는 Gipmochi 산과 인도와 부탄이 주장하는 국경선 접점 Batang La 중간 지점의 인도 시킴주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인도가 재차 이에 응하지 않자 6월 6일 심야에 2개의 불도저를 동원해 인도의 벙커 2곳을 기습 공격하였다. 인도육군 참모총장이 “인도는 2.5면 전쟁(중국, 파키스탄, 내부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항 의지를 밝혔으나, 인도 측의 구체적인 반응이 없자 중국은 16일 티베트에 걸친 춤비 계곡에서부터 남쪽 인도 방향으로 도로 건설을 연장하기 시작한다. 이틀 뒤 비로소 인도군이 270여명의 병력과 두 대의 불도저를 동원하여 중국군의 도로 건설을 저지하면서부터 양국 각 3,000명의 병력이 대치하였다. 중국은 6월 26일 밤 외교부 성명 발표를 시작으로 대화를 위한 조건으로 ‘ 인도군의 철수’를 못 박았다. 6월 29일 중국 국방부 대변인이 “인도군이 치욕스러운 패배로부터 ‘역사의 교훈’을 얻어 전쟁 선동을 중단하기 바란다.”고 경고하자 인도 국방장관은 “오늘날 인도는 1962년 상황과 다르다”고 응수하였다. 인도가 물러서지 않자 중국은 “중국인민해방군은 인도를 섬멸할 수 있다”, “인도 측이 고분고분하게 물러서지 않으면, 결국에는 불놀이하다 스스로를 태우고 모든 뒷감당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인도의 철수를 강요하였다. 한편, 중국은 무력시위도 강행하였다. 중국은 도클람 고원과 지형이 유사한 티베트 고원에서 대규모 진지 격파 훈련을 벌이며, 인도군이 접경지역에 대규모 진지와 참호를 구축해 키운 방어능력을 격멸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였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8월 2일 중국 외교부는 이례적으로 15쪽에 달하는 ‘인도군의 중국-인도 국경 불법 월경에 관한 입장’ 제하의 문건을 발표하였다. 동 문건에서 중국은 국경선 지도, 인도의 월경 사진 등 상세한 자료를 제시하며 입장을 피력하였다.
8월 15일 중국군과 인도군의 몸싸움이 난투극으로 번지며 긴장이 고조되자, 중국은 “인도군은 10일치 실탄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전쟁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인도의 자체 평가를 거론하며 압박하면서도 이례적으로 톤을 완화하였다. 중국은 “인도가 대화에 나서 대치국면을 끝내는 것이 사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종용하면서 인도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냈고, 그로부터 열흘 뒤 대치 종료를 선언하였다. 2017년 남아시아에 전운(戰雲)을 감돌게 한 중국과 인도의 대립은 70여 일간의 무력대치 끝에 8월 28일 종료됐다. 중국과 인도의 외교부는 9월 3일 중국 샤먼에서 열린 BRICS 정상회의에 앞서 “외교적 노력을 통해 대치 지점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2018년 하반기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비록 양국 분쟁의 잠재적인 요인(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도클람 지역 내 중국의 군사시설 건설, 티베트 자치구의 대대적인 자원개발 및 수송 인프라 건설 등)이 도사리고 있지만, 양국관계 개선을 저지할 정도는 아니다. 시진핑 주석과 모디 총리는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며 경제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양국은 7월, 양국간 국방장관 파견 계획에 합의하고, ‘해양안전보장대화’를 공동개최하는 등 신뢰구축노력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연말까지 중국에서 군사합동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하지만, 대치지점에서 병력을 철수한다는 결정을 양국이 다르게 해석해 충돌의 위험이 남아 있다. 비록 양국의 군사적 대치는 중단되었지만, 양국의 공식발표는 다르다. 인도 외무부는 성명발표를 통해 “ 양국 병력이 대치지점에서 신속 철수(expeditious disengagement)”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인도 측이 월경 인원과 장비를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중국국경병력이 동랑에 머물면서 순찰을 계속할 것이다. 영토주권을 지키겠다”고 답변했다. 중국은 한겨울에도 이례적으로 8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며 헬기 착륙장, 참호 등의 군사기지를 건설해왔다. 이를 줄곧 비난하던 인도는 2018년 1월 19일, 6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전역을 사정에 둔 ICBM 아그니-5를 시험 발사하며 중국에 강력한 경고를 발신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중국의 군사기지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며 긴장이 고조될 수 있음을 예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