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상계의 현황과 현대성 문제
왕후이가 1997년에 발표한 글. 신좌파의 출사표와도 같은 글이며 이 글로 인해 신좌파와 자유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좌파의 탄생을 알린 글 当代中国的思想状况与现代性问题
역사는 끝났는가
원문제목 : 历史已经结束?
1989년은 하나의 이정표. 한 세기에 걸친 사회주의의 실천이 일단락 되었으며 전지구는 자본주의 세계로 변해버렸다.
1990년대 지식인 사회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사항
1. 모든 사회 생활이 시장원리의 제약을 받게 됨.
2. 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의 목소리는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도 나옴.
3. 학문의 직업화와 지식인들의 역할 변화. (기존의 계몽주의적 지식인 스타일을 버리고 직업의 일환으로 지식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 전문가와 학자, 직업인으로의 변신
더 많은 이유들이 있으나 위 세 요인들이 상호작용하여 80년대와는 다른 90년대의 지식계를 만들어었음. 즉, 기존의 지식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가 변하고 지식인 사회 자체의 동일성도 사라짐. 이제 지식인들은 80년대처럼 자신을 선각자로 여기지 않았으며 더이상 가치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80년대에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주의를 재검토하는데 집중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반현대화와 동일하게 이해하였으며 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현대화란 부강한 현대국가의 건설이자 서구 현대사회 및 그 문화와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아 중국의 사회와 전통을 비판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의 현대성 담론은 중국/서구, 전통/현대의 이원대립 방식으로 중국을 본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소장학자들이 '서구의 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하였고, 국내의 있던 지식인들은 개혁의 목표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 시작하였다. 80년대의 주장이 말한 좋은 사회는 오지 않았고 더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이 나타났다. 하지만 경제적인 전지구화 과정은 민족국가라는 이익단위의 이익관계를 분명하게 만들었고 민족국가 내부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또한 경제적 전지구화가 진행됨으로써 천안문 사건으로 야기된 국가와 사회의 긴장관계가 일정정도 완화되었다.
사상적 측면에서 90년대 지식인들은
1. 작금의 중국사회의 문화적 위기와 도덕의 위기를 더이상 단순한 중국 전통의 부패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많은 문제들이 현대화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중국의 경제개혁이 시장사회의 기본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사회의 문제를 단순하게 사회주의의 문제로 볼 수는 없게 되었다.
3.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가 도래. 때문에 중국의 사회주의 개혁은 이미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생산과정을 전지구적 시장 속으로 편입시켰다. 때문에 중국의 사회와 문화 문제는 단순히 중국 자체의 맥락에서만 분석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시아적 자본주의 도약을 보면 전통은 언제까지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자본의 운동이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그 밖의 기구들의 움직임은 이미 시장과 자본의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문제를 단순히 정치차원에서만 분석할 수 없다.
현재 중국은 비판성 자체가 활력을 잃고 있다. 필요한 것은 비판의 전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이원론(중국/서구, 자본주의/사회주의, 시장/개혁)으로는 앞선 문제들을 설명할 수 없다. 90년대의 중국 사상계는 자본의 운동과정에 대한 분석을 방기하고 시장과 사회 국가간의 상호 침투와 충돌에 대한 분석을 방기한 채 자신의 시야를 도덕의 차원이나 현대화 의식의 틀에 묶어두고 있다.
'중국의 길'의 특수성에 대한 토론에서 최종적으로 답해야 할 문제는 자본주의 역사 형식에서 격리된 현대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혹은 현대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지한 현대화 과정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세 가지 맑스주의
원문제목 : 三种作为现代化的意识形态的马克思主义 - 현대화 이데올로기로서의 세 가지 맑스주의
세 가지 맑스주의는 ①자본주의 현대화에 반성하는 현대성 이론으로서의 마오사상 ②현대화적 실용주의적인 맑스주의로서 덩의 노선 ③개혁개방 초기, 인도주의적 맑스주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중국 사상계는 비판성을 상실하고 있는가? 이는 중국 맑스주의와 현대화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현대화이론은 중국의 현대화를 단순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해하였다. 유럽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전제로 한 현대화의 기본 법칙 이해는 현대화 과정을 일반적인 자본주의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또한 맑스에게 현대화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의미했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에서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중국의 현대화 문제는 중국 맑스주의자들이 제기하였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 자체가 현대화 이데올로기 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현대화 실현을 기본 목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중국 현대성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성에 대한 이해는 90년대 중국에서 유행하던 현대화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중국에서의 현대화 개념은 다른 국가와는 다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한 가치 지향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는 역사의 진보를 믿고, 대약진 등을 통해 현대화의 목표(낙후에서 선진으로의 발전, 부강한 나라)에 매진하였다. 한편, 그는 3대 차이를 해소하여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마오에게 중국 혁명은 19세기 이후 시도된 모든 중국 현대화운동(예컨대, 손문의 삼민주의 등)에서 제기된 기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되였다. 마오의 사회주의는 일종의 현대화 이데올로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현대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는 현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혁명적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입장에서 현대화 된 자본주의 단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마오의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현대화를 비판하는 가운데 현대화를 추구한 '반자본주의 현대성적 현대성'이론이었다.
왕후이는 반현대성적 현대성이론을 청말 이후 중국 사상의 주요 특징으로 둔다. 이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기가 드러나면서 반현대성적인 특면들이 중국이 현대성을 추구하는 데에서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중국의 현대화 운동을 이끈 이들은
“ 중국의 현대화 운동이 어떻게 하면 서구 자본주의 현대실의 갖가지 폐단을 피할 수 있을까?
” — 지식인들
에 대해 사고해야 했다. 실제로 캉유웨이의 대동사상이나 손문의 민생주의는 (현대적 국가정치제도, 경제 형태 등과 관련된)현대성 방안들과 연결되어 있다. 중국의 현대 사상은 현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현대화 추구화 반현대적인 유토피아주의가 공존하게 만들어 냈다. 마오는 중앙집권적인 방식의 현대 국가제도를 세우는 한편 이 제도 자체에 대한 문화대혁명 식의 파괴를 자행하였다. 중국 경제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을 피하려 하였다. 공유제로 현대화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정치적 자주권을 박탈하였지만 다르게는 국가기구가 인민들을 억압하는 것에 반갑을 지녔다. 중국의 현대화 운동은 이중의 역사적 상황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마오의 사망 이후 마오식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이전 사회주의를 1. 비효율 2. 정치적 박해의 부분에서 비판 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국 사회를 세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이는 마오의 이상주의적 현대화 방식은 폐기하고 현대화 목표만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실용주의적 맑스주의로 개혁 이전의 사회주의와 비교할 때, 현대화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이기는 하지만 개혁 이전의 사회주의가 지니고 있던 반현대성적 경향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효율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 원인이며 정치적 민주화에 장애가 된다. 사회적 부의 재분배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민주적 감독 속에서 진행되지 않았고 이에 국유재산의 분할을 특징으로 한 사회적 재분배가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세 번째로 개혁개방 초기에 나타난 휴머니즘적으로 개조된 맑스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특징이 농후하다. 이를 따르는 지식인들은 개조된 맑스주의로 이전의 주류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사회주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 사상 조류는 마오시대의 국가 사회주의가 맑스주의 이론에 포함된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사상'을 망각함으로서 잔혹한 독재를 자행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특히 이들은 '소외'라는 개념을 가지고 오는데, 이 개념을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노동의 소외를 말하며 자본주의 현대성을 비판한 맑스적 맥락을 소거한, 전통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데에만 사용한다. 마오시기의 반현대성적 현대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던 중국의 휴머니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로 향하는 과정에서 현대적 가치관으로 전환되었고 추후에는 현대화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게 된다. 작금의 현실처럼 시장사회 및 그 원리가 주도적으로 되는 상황에서 비판적 사회주의는 이미 쇠퇴하였다.
계몽주의와 그 현재적 형태
원문제목: 作为现代化的意识形态的启蒙主义及其当代形态
80년대 가장 큰 활력을 지녔던 신계몽주의사상 운동은 갈수록 서구화 경향을 지닌다. 신계몽주의사상 사조는 통일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단순히 이 시기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국가에 대항하던 정치세력으로 파악하게 되면 중국 사상의 기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신계몽주의의 기본입장과 역사적 의의는 총체적인 국가개혁에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제공한 데 있다. 이 시기는 민간 지식인들과 국가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 없으며 전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이들의 사상적 노력과 국가의 목표는 대체로 일치하였다. 또한 80년대 큰 활약을 했던 지식인들은 90년대 크게 중용되었다. 이것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국가 내부의 구조적 균열이 일어나 서로 다른 정치집단이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일부 지식인집단과 국가 사이의 대립은 실제로 국가의지 내부의 갈등이다. 신계몽주의가 갈구한 것은 서구 자본주의 현대성이었으며 개혁 이전의 마오 시기 사회주의의 현대화 작업을 봉건주의 전통으로 여기고 이 안에 내포되어 있던 현재적 요소를 보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 현대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통/현대란느 이분법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 사회주의가 직면한 곤경이 현대성 위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회피한 채, 그저 방본건이라는 구호 아래 80년대 사상계가 흘러갔다.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 인식은 현대 국가체제와 정당체제, 공업화 과정 그리고 이로 인해 초래된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들이 기본적으로 현대적 현상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중국의 신계몽주의 사상을 위에서 언급했든 하나의 통일체로 볼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개혁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동맹을 형성하였고 중국의 현대성을 추진하고 건립해가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맑스주의 가치론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차 사라졌다.
정치적 측면에서, 신계몽사상은 법률과 제도, 현대적인 관료제 건립, 언론의 자유와 인권보장, 의회제도 등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마오 시기의 대중운동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정치적 민주화를 형식적 측면에서의 민주라는 차원과, 법률 제도의 확립에서만 이해하였다. 결국, 폭넓은 정치참여가 민주의 필수요소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소홀하였으며 정치적 참여와 입법 과정 사이의 상호 영향관계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직접 민주주의로서의 민중의 보편적 참여를 독재로 보기도 했다. 진광타오 등은 봉건시대 사회구조에 대한 연구의 틀 속에서 마오 시대의 전통사회주의 실천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초안정구조론) 또, 니체와 샤르트르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인의 주체성을 내세우며 이전 중국사회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니체와 샤르트르 등은 개인주위와 반권위주의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이들 사상가들이 보여준 서구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생략한 것이었다.
80년대의 신계몽주의 사상의 비판적 잠재력은 큰 활력을 보여주었으나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편입되며 비판력은 힘을 잃었다. 중국 계몽주의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화이데올로기였고, 짧은 역사 시기에 매우 격정적인 비판 사상을 통해 중국 자본주의의 문화적 선구자로 변신하였다.
80년대 후반 사회통제가 약화되며 신계몽주의에도 내부분화가 표면화된다. 신계몽주의 운동의 보수적 측면은 개혁파, 기술관료, 현대화 이데올로기로서 신보수주의를 주창하는 관변이론가가 되었고, 급진파는 정치적 반대파로서 서구식 민주화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상대주의 문화관의 출현은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탄생시켰는데, 상대주의 문화관으로 대표적인 것은 유교자본주의이다. 90년대 초기 일본,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등의 성장은 유교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수사를 불러왔다. 이 유교자본주의는 1. 유교 문화권 내부의 사회적, 역사적 차이를 무시하고 있으며 2.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서구 현대자본주의에 미친 작용과 마찬가지로 유교 전통을 근대화의 방해물리 아닌 현대화르 실현하는 역사의 동력으로 보았으며 2. 유교자본주의론은 현대화의 전반적 과정이 식민주의와 불가분의 연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실제로 유교자본주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이다. 서구 가치에 대한 거부를 통해 유교 자본주의가 도달하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세계자본주의 시장 등 서구에서 유래한 역사 형태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며, 여기에 다른 문화적 색채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향진기업 현대화론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비판사상
원문제목 : 面对21世纪:全球资本主义时代的批判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