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표준토론
78년 초에 이뤄졌던 토론. 78년 5월 11일 <광명일보>에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표준이다」라는 글이 실리며 토론이 촉발되었다. 내용은 ①진리 검증의 기준은 사회적 실천뿐이다,②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칙이다,③혁명의 지도자들은 실천을 진리 검증의 기준으로 견지한 모범이다,④어떠한 이론도 부단히 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사인방의 영향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마르크스,레닌 및 마오쩌둥의 글을 인용하여,사회적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한 것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처음에 이 글은 특정 세력을 도발할 의도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에게 임명받은 화궈펑 세력은 마오의 지시와 결정을 따른다는 양개범시를 원칙으로 내세워 마오의 권위를 절대화하려 했는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모든 이론은 실천을 통해 검증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므로 화궈펑 세력은 자신들 권력의 합법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토론으로 격화되었다. 토론 진영은 범시파, 실천파로 나뉘었다. 범시파는 마오가 생전에 행한 결정과 지시들이 옳은 것이라 보았고, 실천파는 마오의 권위보다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진리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둘의 진영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냐 하는 진영의 대립 구조가 직접적인 토론의 양상보다 더욱 주목할 만하다. 실질적인 토론의 양상보다, 한쪽 진영에는 문혁을 거치며 핵심 지위를 차지하게 된 세력과 다른 한쪽 진영에는 문혁 때 갖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겨우 살아남은 세력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화궈펑은 4인방의 체포자로서 문혁 시기에 형성된 사인방 세력에 대해 비판을 가해야 했지만, 마오쩌둥의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문혁을 비판할 수 없다는, 권력의 정당성 측면에서 태생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때문에 이 토론은 결국 지도부의 권력 싸움, 나아가 화궈펑의 실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을 거치며 문혁에 대한 평가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본격화되었다. 실제로 이후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은 모두 문혁에 대한 평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진리표준토론은 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 공식적인 사상 해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참고자료
(서평)「개혁개방이 아닌 덩샤오핑 체제」, 김도경 (『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지음, 창비)
「1978년 진리표준토론과 그 정치적 의의」, 안치영,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