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민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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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서진의 조정은 수춘(壽春)에 있던 진민(陳敏)에게 원병을 보냈다. 진민은 원래 남쪽의 미곡을 중원으로 운송하는 직책으로 서주에 파견한 하급 관리였다. 혜제 영안 원년(304) 3월에 석빙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은 진민을 광릉의 상으로 승진시켰다. 호족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던 진민은 그들이 강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다는 것을 느꼈다. 진민 자신이 여강(廬江) 출신이었으므로 강남인의 마음을 잘 알았다. 강남이 가장 바라는 것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강력한 정권이었다. 낙양의 진나라 조정은 팔왕의 난으로 황실 내의 평화조차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진민은 강남에 ‘강력한 정권’ 성립을 선언한다면, 이 지방의 여러 호족은 모두 이에 따를 것이라 생각했다. 진민은 황태제(皇太弟)의 임명이라면서 자신을 비롯한 강남 여러 호족의 중심인물 40여 명에게 장군이니 태수니 하는 관직을 마구 내어주었다. 진민의 전우였던 하순 같은 사람은 진민이라는 인물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임명은 되었으나 핑계를 대고 부임하지 않았다. 낙양의 부름을 받았으나 조정의 혼란에 실망해서 귀향한 소주 고씨 일족인 고영이 대마침 진민의 요청을 받아 우장군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진민의 정치적 무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쉽게 실망하는 성격이었던 고영은 진민에게 실망하고 진민을 토벌하려 하였다. 고영은 강남의 여러 호족들에게 다시 연합군을 걸성하자고 호소했다. 진민의 실정을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몰락을 예상할 수 있었다. 강남의 호족들은 공고한 연합전선을 결성해 진민을 붙잡아 건업에서 목을 베었다. 이것이 영가 원년(307) 2월의 일이다. 그 해 9월에 낭야왕 사마예가 왕도 등 소수의 가신을 이끌고 강남의 중식인 건업으로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