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천안문사건
- 6·4운동, 6·4사태, 천안문 사건, 제2차 천안문 사태(제1차 천안문사태는 천안문 광장(天安门广场)에서 1976년 4월 5일에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군중을 탄압한 사건을 이른다.), 텐안먼(티엔안먼, 톈안먼) 사건, 천안문 학살 등등의 명칭은 이 문서인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건을 가리킨다.
목차
배경
덩샤오핑(邓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점차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근대적 생산력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시장경제화를 의미하고, 개방은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시장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농업, 공업, 경제 방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농업 부문에서는 1983년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소유권은 집체에게 있지만, 개인인 직접 농사짓고 생산물을 가지는 형식으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를 농가생산도급제라고 하는데 개인이 생산한 농산물을 스스로 갖게 되어 개개인이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농민소득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는 농지 파편화, 효율성 저하, 빈부격차 확대 등의 문제들을 야기하게 되었다. 공업부문에서는 민영기업이 많아졌고, “철밥통을 타파하자”라는 주장 하에 고용의 유연화가 이루어졌다. 80년대 중반부터 신규사원을 자유 해고시킬 수 있고 90년대부터는 모든 노동자를 자유해고 시킬 수 있는 전면적인 노동계약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 입장에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외에도 중국 인구의 7분의 1 정도의 2억 농민이 도시로 넘어와 노동을 하는 농민의 이주노동자화, 상품 가격 결정의 다원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농업, 공업 개혁에도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바로 관료층이 가장 이득을 본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관료들이 공동의 땅이었던 것 중 제일 좋은 땅을 자기 이름으로 돌려버리고, 국유기업의 가격으로 상품을 사들여 시장에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과정에서 크게 부유를 축적한 사람이 많았다. 이외에도 자영업이 가능해졌고, 연해지역 경제특구 설치, 중공업과 건설부문 투자 삭감, 경공업과 농업 생산 확대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부업과 개인상점이 가능해지면서 농민들이 바로 돈을 만질 수 있게된 것이 큰 변화 중 하나이다.
1980년대 중반 인플레이션
1988년 초 자오쯔양(赵紫阳)의 연해발전전략이 실행되었다. 연해발전전략이란 총 2억의 인구를 가진 만주(满洲)에서 광동(广东)까지의 연해지역을 외국인 투자가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이때 유입된 외국자본은 경기부양정책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공업 성장률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된 동시에, 1980년대의 마지막 몇 년 간 덩샤오핑 정권을 침몰시킨 관료들의 부패풍조에 한 몫 하기도 했다. 자오쯔양의 시장지향정책은 기업개혁과 가격개혁 두 가지가 있었다. 그의 기업개혁은 국유공장의 재정과 경영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기반이 되었지만 대부분 무산되었고, 가격개혁은 가격을 시장의 힘에 의존하게 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경제와 금융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관료들의 부패가 성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88년 초가을, 대도시의 인플레이션이 연 30%에 육박하였다. 정부는 엄격한 긴축정책을 채택하였고 다시 기업과 지역에 통제를 가했다. 긴축정책은 과열된 경제를 냉각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 모두 도시민 대다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농민에게는 비료가격의 폭등, 정부의 곡물 수매가 하락, 부패관료들의 불법세금 징수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특히 중국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었던 향진기업은 본래 손쉬운 신용대출에 의존했지만, 긴축정책에서 신용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게되어 일부 향진기업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은 생산을 감축했다. 이에 수백만의 젊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일부는 유민(遊民)집단에 가세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했던 해인 1989년 봄,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집단(룸펜프롤레타리아트) 대열에 휩쓸려 들어간 사람들의 수가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반면에 외국지역에 종사했던 사람들, 민영 기업의 경영자와 고용인, 농촌의 기업가와 도시번화가의 잡상인 등 일부 사람들은 1988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부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 하락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농민들의 생활수준,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 이를 야기한 덩샤오핑 정권에 대한 불만이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의 불씨가 되었다.
대학가의 민주토론회와 후야오방 실각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민주토론회가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주적인 사회를 원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이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지지자들을 지지하고 자유와 민주를 수용했다는 이유로 1987년에 실각되었다.
진행과정
1989년 4월
-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
- 후야오방은 4월 8일 오전 9시 교육문제를 논의하는 정치국회의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치료를 받았으나 15일에 향년 37세로 사망하였다. 후야오방은 1980년대 초의 여러 정치 개혁을 이루고, 1986년 학생들의 항의 시위 후 축출되자 자유주의자로서의 이미지로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정치인이다. 사후 그가 정치국 회의에서 보수파와 논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말라-당시 베이징대학에 붙었던 대자보 내용
- 4월 16일: 학생들의 후야오방 추모
- 학생들이 후야오방을 추모하기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여서 광장 가운데에 있는 인민의 영웅 탑에 화환을 바치고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여러 연사들의 연설을 들었다.
- 4월 17일: 행진
- 정법대학 학생 600명이 학교에 집결하여 천안문광장까지 행진하였다. “자유만세”, ”반대 관료주의”, “야오방동지는 영원히 우리 마음에 살아있다!”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시위는 법학과의 강사 천샤오핑이 주도하였다.
- 4월 18일: 학생들의 인민대회당 연좌농성
- 100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 왼편에 있는 인민대회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베이징대학의 왕단과 궈하이펑등은 학생들을 대표하여 청원서를 전국인민대표대회, 공산당 중앙 판공청 및 국무원 판공청의 신방국에 전달하였다. 청원서에는 후야오방의 재평가, 고위 간부의 재산 공개와 부패반대, 언론자유와 시위 자유의 보장 등의 내용이 포함된 7개의 요구사항이 있었다.
- 4월 19일: 새로운 학생조직의 설립
- 베이징대학에서 2000여명이 모여 조직설립하였다. 왕단, 리진진, 차이링 등이 대표적이다.
- 4월 20일: 신화먼 사건
-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신화먼(新华门)은 최고지도자의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의 출입문이다. 2000-3000여명의 학생들은 19일 밤부터 신화먼에서 연좌시위를 벌였고 무장경찰은 이들과 대치하였다. 새벽에 학생들이 300명 정도로 남자, 경찰은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구타로 부상을 입은 시위를 벌인 학생들이 있었다. 다음날 <인민일보>에서 시위를 벌인 학생들을 비판하면서 경찰의 구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편파보도를 하였으며 그로 인해 분노한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시작했다.
- 전국 11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조행진과 동조 항의 시위, 상하이에서 삼천여명의 학생시위, 톈진(天津)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 4월 21일:
- 중앙군사위원회 베이징의 치안유지와 후야오방의 운구차 행렬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다만 무기는 휴대하지않았다.) 병력의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는데, 리펑은 1500명이라 주장하고 어떤 자료는 8986명이라고 한다.
-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 인민대회당 청원사건
-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 수천의 군, 경 병력을 배치하고 시위를 일절 금지하였다. 하지만 전날 밤이 새도록 학생대열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광장으로 행진하였다. 새벽녘 광장에는 깃발, 플랜카드로 가득하였다. 약 15만명의 시위자들이 연사들의 끊임없는 연설을 듣고, 인터내셔널 가를 반복하여 부르며 열을 지어 앉아있었다. 정부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학생들이 장례를 위해 광장에 머무를 수 있고 이 시위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에 방영할 것이라고 하였다. 군인은 광장 주위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시위자 또한 조용히 앉아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다시 구호("인민대중 만세", "민주주의 건설하고 독재를 타도하자",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등)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 10시부터 추도식이 진행되었고 11시에 주요지도자들과 원로들이 돌아갔다. 하지만 이 무렵 인민대회당앞에서 4명의 대학생이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3명은 두손으로 청원서를 들고 무릎을 꿇으며 한 시간 넘게 기다렸으나 정부책임자중 누구도 이를 접수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전면적인 동맹 휴업을 결정하였다.(리펑은 이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자신은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해명을 하였으나 학생들은 이미 분노하였다.)
- 4월 22일, 23일: 다른 지방에서의 시위
- 주말에는 시안(4000명의 병력이 파견됨)과 창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여기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학생들의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쓰촨성의 충칭에서는 군중이 도심을 꽉 메우고, 우한에서는 문화대혁명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인 3만명의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 이를 통해 계엄령전부터 이미 병력 동원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운동을 진압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정부가 학생운동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중요한 국제행사(5월4일 아시아개발은행 22차 총회, 고르바초프의 방중)가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 각 학교의 임시 학생조직들이 모여 베이징학생자치연합회(京高學 自治聯, 이하 高自聯)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고자련은 베이징대학의 민주살롱을 만든 류강이 학생운동의 진행이 개별학교를 초월하여 행동을 통일하고자 만들어졌다. 고자련은 4월 27일 대시위, 5.4운동기념시위등 주요시위와 활동을 기획하고 주도하였다.
-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을 위해 출국하였다. 방북을 연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자오쯔양은 국사방문은 쉽게 변경할 수 없으며, 이 운동은 애당 및 애국적, 학생주류는 양호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원로와 보수파[2]과는 다른 의견이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에게 시위중단을 설득하되 소통을 위주로 하라는 방침을 리펑(李鹏)에게 지시하며 출국하였다.
- 4월 24일: 정치국 비상회의의 결과
- 리펑은 정치국 비상회의 소집하였고 이 회의에서 “필요하다면 피를 흘리더라도 이 운동을 진압 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요구가 승인되었다. 언론은 이 운동을 “공산당을 뒤집어엎으려는 조직적 음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영 매체의 언론인 수백 명이 이 운동에 대한 진실을 말할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또한 몇몇 대학에서 무기한 수업 거부운동이 시작되었고 다음날 베이징의 모든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 4월 26일: “동란을 반대”인민일보 사설
- 인민일보 사설에서 이 시위는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적인 음모이며 중국공산당의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집회와 허가 받지 않은 시위는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4월 27일: 학생과 노동자의 도시 시위행진
- 운동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이 날 거리로 나가 노동자와 시민 사이에서 지지선동을 하고 대중적 시위행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행진은 하루동안 도시를 장악하였는데 학생과 노동자의 수가 거의 반반을 이룬 대략 15만명의 시위대열이 15시간 동안 행진하였다. 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 동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접 항의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이 운동은 결정적인 진전을 맞게 되었다. 노동자군중이 군대를 포위해서 행진하는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 시위는 5월 4일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하자는 결의로 끝났다.
- 당은 수업거부 철회를 조건으로 학생들과의 대화에 동의하였으나 학생들은 수업거부 철회에 대한 정부의 대화 조건을 거절했으며, 수업거부 운동이 베이징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4월 30일: 자오쯔양의 귀국
1989년 5월
- 5월 2일: 고자련 대표의 청원서 제출
- 고자련의 대표 60 명이 전인대, 국무원, 당중앙에 직접대화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다음날(5월 3일) 거부당했다.
- 5월4일:
- 5·4 운동 70주년을 기념하여 베이징의 각 대학에서 출발한 6만명의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까지 평화행진을 하였다. 전국의 도시에서 올라온 대학생 대표단, 나이든 지식인, 노동자, 신민, 신문기자들까지 가세하여 30만명 이상 모인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특별한 결론이나 변화는 없었고, 이후 베이징운동은 잠잠해졌다. 수업거부가 중지되고 중심을 잃은 군중은 흩어졌고 명확한 계획없이 한동안은 운동세력이 분산되려는 것으로 보였다.
- 5월 13일: 천안문에서의 단식투쟁
- 운동을 다시 고조시킨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다수가 반대하여 왕단과 우얼카이시로 대표되는 소수의 급진적인 학생지도자들만이 단식투쟁을 진행하였다.
- 5월 15일: 고르바초프 방중
-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30년간의 중소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베이징에 방문하였다. 이는 전세계의 주목을 끄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다수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 중단을 요구했지만 소수의 학생지도자들은 이를 기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단식투쟁자들이 200명에서 이날 천명이상을 늘어났고, 수천명의 동조자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그로 인하여 고르츠바초프의 열병식은 원래 계획된 천안문이 아닌 공항에서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 인근에 있을 때는 광장에 50만 명의 군중이 모여 있어서 의전절차를 생략한 채 급하게 옆문으로 들어가야했다.
- 5월 16일
- 천안문 광장에서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가담하러 모이자 광장에는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수도 제철, 제강 공장의 노동자, 인민일보의 기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 5월 17일
- 고르바초프는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고 시위자는 200만명으로 더욱 증가하였다. 고르바초흐가 상하이로 떠날때까지 사흘동안 이 운동에대한 대중의 지지가 커졌다. 동시에 덩샤오핑은 진압을 위해 군사력을 이용해야한다는 결심확고해졌다.
- 베이징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도 수많은 시위가 진행되었다. 상하이에서 3만여명의 학생들의 철야 농성, 난징에서의 1만명 시위 행진, 쓰촨성에서 11군데 이상에서의 도시와 읍에서의 시위, 티베트에서의 시위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지방에서 운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있지않다.
- 5월18일: 자오쯔양의 시위단 방문 및 계엄령 선포
- 정오에 리펑, 정치국원 3명, 베이징시장이 단식 농성 대오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베이징리뷰>지에 이에대한 공식문건이 게재되었다. 학생들은 자오쯔양이나 리펑이 천안문 광장으로 가서 학생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인민에게 사과하며, 이 운동의 의미를 알리라는 등의 요구를 하였다.이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져야 단식투쟁에서 연좌 농성으로 바뀐다고 하였으며 (광장에서 철수한다고 하지않았다), 이 학생운동이 대중운동(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 운동할 경우)으로 확대될 경우 더 복잡한 일이 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후 리펑, 자오쯔양, 정치국상임위원 두 명이 단식투쟁을 하는 병원에 있는 학생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환영받지 못하였으며 학생들과 논쟁을 벌였다.
- 정부는 후야오방의 장례식 때부터 단식 투쟁까지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거나 대처방식을 두고 분열을 했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이날 밤에 긴급소집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가 승인되었다. 자오쯔양 홀로 반대하였고 다른 위원들은 인민해방군의 투입을 꺼렸으나 덩샤오핑에 거역하지 않았다.
- 단식 시위대는 동심원 같은 형태로, 가운데에 중앙조직, 그 주위로 단식 농성자들이 있었다. 구급차와 사람들이 트럭으로 싣고 오는 각종음식들 및 음식점에서 큰 솥에 넣어보내는 요리들이 지나가는 길이 있었고 시위자들을 위한 길도 있었는데 곧바로 통과하려면 학생증을 제시해야했다. 학생뿐만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였는데 부패에 대한 대중의 분노, 노동자와 관료간의 분명한 불평등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의 군중을 끌어들이기 쉽게 했다.
- 5월19일-21일: 군대 동원과 바리게이트, 자오쯔양의 호소
- 리펑총리의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계엄령이 발표되었다.
- 30만명(중국군대의 10%)의 병력이 베이징을 봉쇄하는 데 동원됐다. 이 소식이 퍼지자 학생과 노동자들은 트럭, 버스 등으로 군대를 저지하고자 했다. 지하철로 병력이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지하철 노동자들은 전원을 꺼버리고, 토요일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바리게이트를 만들어서 시위대를 보호하고자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군인들을 저지하고자 했다. 정부의 예상과 다르게 군인과 시위자들은 충돌 없이 우호적으로 지냈으며 심지어 5월 22일에는 군지휘관들이 계엄령 실시 명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참여도 활발하였으며 선입관이 변화하게 된 사건도 있었다.(소수민족병력이 바리게이트와 대치하기 위해 파견되자 그 출신 학생들을 보내서 같은 출신 군인들에게 연설하며 설득하였다.)
- 19일 새벽에 자오쯔양이 광장의 단식 학생들을 방문하여 새벽에는 리펑과 자오쯔양이 단식농성자들을 다시 방문(자오쯔양은 자발적으로, 리펑은 그 뒤를 따라왔다고한다.)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칭찬하고 학생들의 요구를 지지하였으며 광장점거를 끝내달라고 애원했다 리펑은 5분도 안되어 광장을 떠났다. 자오쯔양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무 늦게 왔다",“여러분들의 비판은 정확하다.”고 말했다.[3] 이후 자오쯔양은 해임당하고 사망까지 가택연금을 당했다.
- 5월22일-28일: 베이징 공인 자치연합의 총파업 제기와 학생들의 반응
- 공인자치연합(중국판 민주노조)에서 총파업을 제안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총파업은 운동을 더욱 활성화 시킬 수 있었던 기회였지만 노동자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는 모순적이었다. 운동지도부는 노동자를 학생들을 지지해줄 시민집단이자 거리에서 시위하는 숫자를 늘리는 역할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결국 경제에 손실을 입힌다는 이유로 총파업제안을 기각하였다. 다른 지역(시안, 란저우 등) 에서는 투쟁이 고조되었으나 오히려 베이징에서는 교착상태였다. 천안문 광장에서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광장과 가두의 사람수는 계속하여 줄어들었다.
- 5월 30일: 민주의 여신상
- 계속해서 사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광장에 민주의 여신상이 세워졌다. 이날 밤이 되자 1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1989년 6월
- 6월 4일:유혈진압
- 새벽 1시 계엄 부대와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돌입하였다. 새벽 4-5시경 광장에 끝까지 남은 약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그들이 떠날 때도 군대는 그들에게 사격하였고 이날 밤이 새도록 무차별 폭력이 자행되었다. 새벽 6시 계엄군이 천안문 광장을 완전히 점령했다. 무장군인이 거리에있는 수만명의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천안문에서는 학생들이 군대와 협상해 충돌 피하고자 하였다. 정부의 유혈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지도자들은 평화적 운동을 주장하며 무력 저항에 반대하였다. 노동자와 몇몇 학생들은 무기를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해 큰 논쟁이 벌어졌으나 강경파 지도부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천안문광장에서보다 천안문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는데, 그래서 주로 학생들보다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더 부상을 당하고 사망하였다.
- 이후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청두(成都)에서 가두투쟁으로 300명이 사망하였고, 상하이와 난징(南京)에서 십만명 이상의 항의행진이 일어났다. 또한 많은 도시에서 학생들이 파업 행동을 조직하고자하였다.
- 6월 6,7일: 체포
- 유혈진압 이후 비밀 경찰 요원에게 체포된 사람이 사만명이었다. 수천 명이 징역, 수백 명이 사형을 당했다. 투옥된사람의 대부분과 사형당한 모두 노동자와 일반시민이었고 학생들은 긴급수배자명단에 들어간 21명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대부분 젊은이들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투옥되었다.
- 베이징에 잔류했던 학생 지도자들은 더 이상의 유혈 참극을 막기위해 도로봉쇄를 그만두고 활동가들은 지하고 들어가 투쟁을 이끌라고 전국에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운동이 강력히 진행됐던 상하이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받아들였다.
천안문 사건 이후
- 천안문 사건 이후 사회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주화 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 문제에 파묻혀버린 것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덩샤오핑은 유혈진압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 동원되었던 군대와 경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망한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에 그쳤다.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쓰레기’라고 비난하기 까지 했다. 실제 사망자 수는 2000~7000명에 이르지만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는 300명이었다. 1990년대 중국사회는 더욱더 가혹한 정치적 탄압이 이루어졌다.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치중했고, 사회주의와 민주화를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이룩하려는 데에 힘을 쏟았다.
- 현재는 당의 철저한 검열로 잊히고 있는 사건이다. 2019년은 천안문 사건 30주년이었으나 천안문광장은 삼엄한 경비로 평상시와 다를바없이 조용했다. 그로인해 중국인들은 망각해가고 있으며, 젊은 세대는 더더욱 이 사건에대해 알지 못한다.[4] 반면에, 홍콩에서는 매년 추모 시위를 진행하고 박물관을 세우는 등, 천안문사건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있다.[5]
생각할 거리
학생과 시민이 후야오방의 사망을 슬퍼한 이유
- 기대와 원로, 보수파에 대한 반감-후야오방은 공산당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민주적으로 인식되던 인물로 학생들은 그가 민주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길 바랐다.
- 존경-후야오방은 다른 정치가들과 다르게 청렴하여 자식도 부패와 연루되지 않아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 부채의식-1986년~1987년 학생운동에서 대학생과 지식인을 보호하려다가 원로와 보수파에게 미움을 받아서 부당하게 쫓겨나서 학생들은 그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잔인한 진압의 이유
- 정부가 천안문에서의 시위를 탱크와 무장군인을 동원하여 그토록 잔인하게 진압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도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 고위간부는 이 운동에 대하여의 동유럽 국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학생들이 서구 부르주아 사상에 오염된 학생들을 빨리 막아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의 폴란드와 같이 공산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형 동맹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혹은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가 이유로 들 수 있다. 당시 당의 최고지도부들은 문화대혁명 때를 겪었고 이를 두려워했다. 학생들이 천안문에 모이는 것은 또다른 문화대혁명의 발발이라고 인식하여 빠른 진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천안문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
- 1989년 천안문사건은 중국 내부에서 공식적인 조사가 금지되어,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 및 증언을 얻기 힘들다. 따라서 사건의 진행과정 및 결과, 배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자료도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 주로 천안문 사건은 사회주의 중국공산당의 독재에 반발하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한 운동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운동의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6] 아래는 천안문사건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견해다.
- 중국 내부에서는 천안문 사건을 ‘반혁명 동란’이라고 공식적으로 평가한다.(이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 되며, 매년 6월 4일 마다 더욱 엄격히 검열된다.)
- 서구에서는 주로 공산당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인식한다. 한국에서도 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공산당이 잔인하게 진압한 사건이라고 인식한다.
- 홍콩 등지에서 이뤄진 재해석에 따르면 6.4 사건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고 본다. 첫 단계는 1989 학생운동으로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학생들의 평화적인 청원과 정부 정책의 개선을 희망한 단계이고, 후에 몇몇 소수 급진파들의 불순한 선동으로 인해 색깔혁명으로 변질되고 정권의 전복을 도모하는 사건으로 변했다고 본다.
- 학생들과 일반시민, 노동자는. 직선제나 자유투표보다는 주로 부패 척결과 알 권리를 요구하는 초보적인 단계의 민주를 요구했다. 혹자는 개혁개방을 지지하지만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기도 하였고, 혹자는 공산당과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더 민주적인 소통을 요구하였다. 노동자는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장화를 반대하고, 경제적인 평등을 요구하였다. [7]이처럼 당시 요구, 구호 등을 볼 때 대부분의 시위자는 사회주의 이념이나 공산당 일당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 공산당이 추진하는 개혁 개방을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수립이나 국민의 정치적 권리의 보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즉 정부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좀더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달라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천안문 사건은 대학생들의 시위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개혁개방 10년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경제적인 문제점 등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노동자 및 시민들의 참여도 컸다. 정부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주인은 노동자였고, 이 때문에 정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실제로 천안문 사건 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것은 노동자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짓기 보다는, 중국 전역 도시 지역에서 일어난 지식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개인 상공업자, 일부 당 간부, 하층민, 농민공 까지 참여한 광범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 이외에도 권력엘리트 간의 노선투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하는 엘리트 파벌 간의 권력투쟁론, 개혁개방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화에 저항하는 노동계의 투쟁으로 바라보는 좌파 흐름의 반자본주의 투쟁론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8]
- 이 운동에 참여한 각각의 계층에 따라 또 같은 계층이더라도 급진적이냐, 온건적이냐에 따라서 요구하는 바가 달랐다. 또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 천안문 사건은 한 가지 해석이 아닌 여러가지 해석이 나올 여지가 있다.
천안문사건의 상징
- 인터내셔널가
- 이 노래는 민주벽 운동때의 항의시위, 1986년 시위행진때도 불렸으나 그 당시는 운동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덩샤오핑의개혁에 충성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4월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 천안문사건 때에도 두루 불려 덩샤오핑 정권에 변화를 촉구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불렸다.
起来,饥寒交迫的奴隶, 起来,全世界受苦的人! 满腔的热血已经沸腾, 要为真理而斗争! 旧世界打个落花流水, 奴隶们起来起来! 不要说我们一无所有, 我们要做天下的主人! 这是最后的斗争, 团结起来到明天 英特纳雄耐尔 就一定要实现。 这是最后的斗争, 团结起来到明天, 英特纳雄耐尔 就一定要实现。
일어나라,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는 노예들이여! 일어나라, 전세계의 고통받는 자들이여! 가슴 가득 찬 피가 끓어 올라 진리를 위해 투쟁할 때가 되었다! 구세계는 낙화유수처럼 부서질 것이다 노예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반드시 천하의 주인이 되리라! 이는 최후의 투쟁이니 단결해 일어나 내일에 이르자, 인터내셔널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이는 최후의 투쟁이니 단결해 일어나 내일에 이르자! 인터내셔널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 민주의 여신상
- 미술대학 학생들이 만든 민주의 여신상으로 5월 30일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마오쩌둥 상 맞은 편에 세워졌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과 유사하지만 제작한 학생들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닌 소련의 조각가 인 베라 무히나(Vera Mukhina)의 작품인 '노동자와 집단농장 여성'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특히 두상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과 흡사하여 자유의 여신상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 탱크맨
- 단신으로 인민 해방군 탱크를 막아서며 탱크가 광장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천안문 사건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이 선정한 20세기인물 20명으로 등재되었다.
참고자료
- 하남석, 「1989 천안문 사건의 비판적 재해석- 중국 지식인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중국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년 2월.
- 송한용, 「학생운동으로서의 6ㆍ4천안문사건」,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69권0호, 호남사학회, 2018년 2월.
- 이희옥,「심층진단 : 중국 민주화운동 성격변화 불가피 -천안문사태 8주기와 홍콩반환 이후의 중국」,『통일한국』 163권0호, 1997년.
- 조영남 지음, 『톈안먼 사건-덩샤오핑 시대의 중국3』, 민음사, 2016.
-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20세기 현대 중국사의 불꽃,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
- 알랭 루 지음, 정철웅 옮김, 『20세기 중국사』, 책과함께, 2010.
- 팟케스트 레알중국, 30주기를 맞이한 천안문 사건, 1989년 봄, 중국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http://www.podbbang.com/ch/16272?e=23021418, http://www.podbbang.com/ch/16272?e=23021419
- 모리스 마이스너 저,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 이산, 20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