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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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이란?

배경

파리강화조약.jpg

5·4운동의 근원은 1898년 산동 성의 자오저우 만을 독일이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에서 비롯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은 중립국이었는데,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한 뒤 자오저우 만에서 독일군을 축출해내고 산둥성 지역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일본은 이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21개 조항에 이 내용을 추가했다. 또한 자신들의 점령을 다른 열강들로 인정을 받기 위해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일본은 각 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지위를 지지하고, 각 국들도 산둥 성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조약들이었다. 또한 미국은 “영토가 근접한 국가 간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 역시 사실상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1918년 9월의 베이징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비밀 협정으로, 일본은 중국 군벌정부에게 20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철도 2개를 부설하며 각 요새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 철도 경찰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일본은 산둥을 지켜낸다면, 중국은 사실상 21개 조항과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조약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베이징 정부쑨원의 광저우 정부의 인원들로 구성된 중국 대표단은 민주, 자결, 약자를 보호하는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되는 베르사유의 회의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기대를 품고 산둥의 수복을 모색하고 불평등 조약을 철저히 폐지할 것을 목표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화회의는 결코 이전의 모든 국제간의 분규를 조정하기 위하여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종결 후에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산둥 문제만을 의사일정표에 넣을 수 있었다.

중국 대표단은 산둥은 1917년 중국의 참전으로 독일과의 모든 조약을 폐지했을 때부터, 일본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국회의 비준을 얻은 적이 없기 때문에 21개 조항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참전 후에 중국의 지위는 매우 크게 변화하여 중립국에서 교전국으로 바뀌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바로 국제법의 정세불변의 원칙을 인용하여 21개 조항을 폐지할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용히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협정을 공개했고, 참전이후에도 중국은 산동문제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하여 결국 산둥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협상국들은 이미 일본과의 비밀협정 때문에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고, 윌슨만이 중국의 유일한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표단은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운 회의의 정세를 바꿀 수 없었고, 결국 1919년 4월, 강회회의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여 산둥 문제를 판정했다.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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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소식이 베이징에 전달되었을 때, 윌슨의 이상주의 신조에 대한 신뢰는 산산조각났다. 학생들은 윌슨의 배반행위에 격분하여 피로써 산둥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 해 5월 4일, 해외에서 귀국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베이징에서 모여서 민족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의 결과로 전문을 보내 대표단의 결정에 항의하기로 결정했고, 파리의 중국 대표단에게 수천통의 전보가 전달되었다. 그 전문들은 조약을 거절하고 만약에 그렇지 아니할 경우 그들을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들은 한바탕 시위를 일으켰는데, 베이징의 13개 대학과 전문대학의 학생들이 참가해 그 인원이 금방 5000명이 됐다. 그들은 매국노 차오루린을 처형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해서 그의 집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경찰들은 늑장을 부려 대다수의 시위자들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오직 10명만 체포했다.

하지만 이 체포사건은 오히려 도화선이 되었고, 베이징 학생들은 전면적인 수업거부와 베이징 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사임을 주장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런 운동의 움직임이 주요 도시의 학생들에게 확산되는 가운데, 전국의 상점 주인, 공장 노동자와 상업기구의 고용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사람들은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일본의 증기선을 타는 것, 일제 물건을 하역하는 것을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상공업은 황금시기를 맞아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기업과 공업이 발전했고, 그들은 상인계층과 지식인 계층을 육성에 힘썼다. 왜냐하면 구시대의 농민들과 달리, 기업과 공업은 중국이라는 국가적인 시스템이 무너지면 유지될 수 없어서 국가이익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시위가 상인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중국의 당시 맥락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학생 시위의 결과로 학생들은 다시 풀려나게 됐다.이후 2개월 동안 시위는 지속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5·4운동의 모습이다.

성격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5·4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적인 상황은 대외적으론 제국주의(특히 일본)의 침략이 활발했고, 대내적으로도 베이징 정부가 국가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정도로 무능력한 정부의 부패가 심각했다.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5·4운동은 당연히 반봉건·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세계의 피지배 국가들에게 하나의 신조가 되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5·4운동은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5·4운동은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이 결합되어 나타난 반봉건적·반제국주의적·저항적 민족주의의 형태였다. 동시에 주도 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학생들로부터 발생한 학생운동이다. 하지만 학생에서 시작한 시위는 노동계와 상공계에까지 확산되어 전국민적, 전국적으로 일어난 자발적 운동이었다.

신문화운동의 맥락에서의 5·4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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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운동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논의가 이어져 왔는데, 그 논의들의 주요 특징은 5·4운동을 그 이전 북경대학과 『新靑年』, 『新潮』 등을 중심으로 전개돼 온 변화운동과 연계하여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논의들은 5·4운동이 “신문화 운동”이나 “르네상스” 혹은 “계몽주의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성격의 5·4운동 전후의 변화운동들과 5·4운동을 함께 어울러서 “5·4신문화 운동”이라고 하겠다.

5·4신문화 운동은 진독수를 중심으로 한 잡지인 『新靑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신청년에서의 문명관이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신구라는 이원적 구조에 기초해 있다. 이 신구 구조는 신해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나왔다. 지식인들은 신해혁명의 실패의 원인이 정치제도와 문화의 괴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이 제대로 된 근대화를 하려면 합당한 정치와 문화를 건설하여 둘 사이의 비조응을 해결하는 것이 5·4신문화 지식인들의 목표였다. 이에 진독수는 정치와 문화의 비조응의 원인은 문화의 후진성에 있다고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문명을 극복대상으로 설정하고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창했다.

즉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들을 통틀어 극복해야 할 구舊라고 하였고, 과학적 합리주의(賽先生)와 민주주의(德先生)를 바탕으로 한 서양적인 것들을 신新이라고 하여, 구를 타도하고 신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목표는 혁명이나 정치적 투쟁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계몽을 통한 사회변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주로 계몽적·교육적·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구타도·신추구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후스이다. 후스를 중심으로 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구 타도는 크게 두 가지 형태였는데 하나는 바로 우상 파괴이다. 특히, 그들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여러 전통들을 파괴에 초점을 두어 전통의 굴레에 속박된 개인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에 힘썼다. 후스는 공가점이라는 유가에 대한 모욕적인 어휘를 만들었고, ‘공가점을 타도하라‘를 외치면서 격렬히 유교를 탄압했다.

구타도의 또 한 가지의 중요한 형태는 바로 백화문 사용이었다. 이것은 후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 글쓰기가 중시한 것은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라고 질책했고, 문어문은 생기라고는 전혀 없으며 이론 종류의 죽은 언어는 활력 있는 문학을 탄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어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보수적인 지식인들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백화문을 사용한 글쓰기를 주장하고, 스스로 분명하고 활력이 넘치는 문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5·4신문화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덕선생이라고 부르며,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것과 같은 서양식의 사고를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지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계몽운동을 펼쳤다.

5·4 신문화 운동 시기의 초중반까지는 이렇게 전반적인 서양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 강화회의와 5·4운동을 겪으면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토록 신봉하고 믿었던 서양세계가 중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양 제국주의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전향했고, 신청년을 대표로 하는 여러 잡지들도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5·4 신문화 운동은 후반부에 점차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기 시작했는데, 이 여파는 매우 강해서 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3·1운동과 5·4운동

당시의 두 운동의 비교

두 운동 모두 기본적으로 각각 한국과 중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운동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성격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과 5.4 모두 각국의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두 운동의 문화운동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5·4운동과 3·1운동은 기본적으로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은 맥락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3.1운동이 1900년대에 신문화운동이 벌어졌고, 3.1운동이 발생한 1910년대에는 이미 완전한 식민지 상태여서 문화적인 압박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신문화 운동과 같은 계몽운동 없이 3.1운동이 펼쳐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3·1운동은 신문화 운동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서 이뤄졌다고 본다.

그에 비해, 중국은 신해혁명 이전까지 여러 정치적 운동만 있었을 뿐, 문화·계몽 운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신해혁명 역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중국 내부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틈에 열강들이 다투어 침탈하는 대상물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일본이 앞장서 공세를 취했기 때문에, 중국의 적대감은 일본에 쏠려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 신문화 운동이 발생했고, 이런 계몽주의 분우기가 고조된 상태에서 사실상 일본에만 초점을 맞춘 5·4운동이 발생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단 한국은 중국만큼 사상투쟁이 뚜렷하지 않아서 신문화 운동 역시도 중국의 그것에 비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의 1900년대는 계몽주의적 문화운동과 애국주의적 의병운동이 활발했다. 하지만 결국 1910년대에 들어서 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의 1900년대는 역동의 시기라면, 1910년대는 절망과 죽음의 시대였다. 그렇다고 그런 노력의 성과들이 한 순간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망국의 좌절감 속에서 폭발할 개연성을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일제의 강제적인 동화정책은 민족 차별적이고 침략적이었기 때문에, 조신인들의 불만과 박탈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1910년대에 일어난 3·1운동은 이렇게 계몽적인 맥락보다는 불만을 표출하고 일제에 반항하는 맥락 속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일제의 강고한 규제에 의해 당시 조선에서는 문화운동은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신문화 운동에서 비롯된 5·4운동은 계몽적이면서도 동시에 진보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보수파의 다양한 반발과 갈등을 일으켰다.

3·1운동이 5·4운동에 끼친 영향

이처럼 5·4운동과 3·1운동은 배경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존재하고 어느정도 3·1운동이 5·4운동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3·1운동은 5·4운동을 촉발시켰다’라는 담론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진독수는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난맥상을 만든 근본 원인을 국민 일반의 흐리멍텅한 의식, 방관자적 태도에서 찾았다. 노신의 아Q정전에서도 잘 들어나는 이런 생각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중국인에게 반성 요구하고 형식적인 정치혁명은 가망이 없으니 중국인을 각성시키고 개조하는 정신혁명, 문화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신문화운동을 전했다. 또한 진독수는 “신문화의 영향이 정치상에 미쳐서 정치의 이상을 창조하기를 요망”한다고 했는데, 이는 문화운동을 통하여 정치제도로 접근하고자 했던 신문화 지식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던 당시의 신문화 지식인들에게 3·1운동은 충격적이면서도 좋은 자극제였다. 신문화 지식인들은 “혁명의 신기원을 열였다” 등의 평가를 했다. 특히 “정의 인도로 무력 강권을 타파”, “비폭력의 순수 학생운동”, “인민의 주체적인 의지가 발휘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점” 등의 표현으로 “운동형태”에 주목했다. 이처럼 신문화 지식인들은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처지가 비슷했던 당시 중국 청년들의 저항심을 증폭시켰다.

동시에 3·1운동을 통해서 신문화 지식인들은 중국의 당시 상황을 반성하기도 했다. 진독수는 “보라! 이번의 조선인의 행동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감히 대항하지 못해 주인의 자격을 포기해버리고 제삼자로 물러났는가. 우리들은 조선인과 비교해볼 때 참으로 부끄러워 몸둘바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는 울분에 대한 토로일 수 있지만, 사실은 동포들, 특히 청년들을 격동시키고 분발시키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도는 양계초의 입장과 비교해보면 다 잘 드러나는데, 양계초는 “결과는 물어볼 것도 없음을 5척동자도 다 안다.”고 조선은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문화 지식인들의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청년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에서의 두 운동

신문화 운동은 동아시아의 현재 상황에 그대로 이어지는 중대한 문제의 시발점이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와 계급혁명을 지향하는 사회주의로 이념적 분화가 신문화운동이 진행되는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와 달리 조선이나 중국은 신문화 운동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사상들이 한 번에 들어왔다. 사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진화론적인 단계 차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단계에 있다. 하지만 이 다른 단계의 사상이 신문화 운동을 통해 동시에 유입되면서 노선을 달리하는 이념분화가 이뤄진 것이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경우, 좌우의 대립이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는 없기 때문에 신문화운동의 이념대립은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3·1 운동의 경우, 신문화운동의 영향이 매우 적은 순수한 반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념과 상관없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여러 임시정부들이 모두 3·1운동을 계승하여 설립하여 만들어졌을 정도로 한국에서 3·1운동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운동이다. 따라서 현재에서는 3·1운동에 대한 재평가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5·4운동은 신문화운동의 맥락에서 이뤄졌다. 따라서 아직 신문화 운동에서 발생한 쟁점이 유효하기 때문에 5·4운동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은 아직도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담론이 꾸준히 형성되는데, 이는 중국에 사회주의가 처음 도입된 5·4 신문화운동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5·4의 정신을 계승하여 구舊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는데, 현재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일반적으로 마오의 과오라고 볼 정도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오히려 신유학이라고 하여 5·4 운동의 대표적 타도 대상이었던 유교를 다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형성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5·4에서 제국주의와 함께 부정되었던 자본주의도 현재에 이르러서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 개혁·개방 등을 토대로 중국에서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현재에도 5·4의 정신에 대하여 계속하여 공격이 나오고 있고, 다시 그것에 대한 반박이 나오면서 5·4담론은 곧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현대에서의 5·4운동

모택동등소평, 이 두 사람은 그 방식은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반대였지만,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동일했다. 바로 ‘중국적 사회주의’의 건설이었다. 이는 지금의 중국에도 이어지고 있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의 모든 정치·정책은 중국적 사회주의 건설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현대 중국은 그 과정에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적 사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정확히 제시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단 사회주의가 온전히 성공한 적인 없기 때문에, 중국은 노선을 본받을 만한 모델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결점이 최소화된 이론이 나오더라도 그 모델들이 과연 복잡성을 띠고 있는 중국에 제대로 적용되어 잘 작동할 지는 미지수다.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지금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런 중국적 사회주의를 찾아가는 것은 그 과정만으로도 자체로 의미가 있고, 신중국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적인 사회주의에 나아가기 위해서 중국적 사회주의의 의미를 더 해체해보고, 앞서의 시행착오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실제 중국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적 사회주의, 어쩌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진독수가 중국적 사회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국’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색깔을 가진 극복하고 변화시켜야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5·4지식인들은 대부분 이처럼 전반서화를 주장하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 전통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롭게 사회주의를 세우려고 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적인 것과 사회주의적인 것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러한 5·4의 정신은 모택동의 사회주의에서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중국적 사회주의’라는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기존 중국의 전통과 사회주의의 공존을 모색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중국적인 것과 사회주의적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은 큰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중국적 사회주의의 시도는 결국 불완전한 결합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신문화운동 시기의 양상이 다시 나타났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공산당이 관료주의·엘리트주의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마르크스주의 대한 교조적 해석과 계급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아직 ‘중국적 사회주의’는 이제 막 첫발을 뗀 단계였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과 사회주의는 결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해석과 계급투쟁은 다시 중국전통에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문화대혁명 시기로 넘어가면서 더욱 심해졌는데,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에 대한 척결의 기치 하에 전개된 문화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유교전통 역시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절정’인 문화대혁명에서 모택동이 스스로 부정했던 신문화운동의 전통부정을 다시 반복하게 되었다. 가치평가적인 부분은 배제하고 역사적 맥락만 보았을 때, 이는 5·4의 정신이 문화대혁명 때까지 살아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개혁·개방 시대부터는 중국적 사회주의는 중국의 현대화를 통한 사회주의 달성이었다. 이미 모택동은 중국 사회주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를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등소평은 사상체계로서의 모택동사상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뢰감을 표했다. 하지만 실천을 강조하며 역사적 소명을 정치투쟁에서 경제건설로 전환시키면서 중국의 본격적인 현대화에 돌입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의 목적은 서양문명의 수용을 통한 현대화 그리고 이를 통한 인민의 생활수준과 국가역량의 제고에 있다. 따라서 현대화의 핵심 내용은 서화이다. 특히, 이러한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다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서양식의 자유와 민주를 필요로 한다. 이는 등소평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기본적인 시작 단계에서는 많은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민들이 외래문화를 많이 접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사회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파동을 야기했는데 등소평에게 이 파동은 혼란이었다. 결국 이 혼란이 절정을 이룬 것이 바로 ‘천안문 사건’이다. 천안문 사건은 어떤 학자들에 의해 ‘新5·4운동’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비록 달성하고자 했던 구체적은 목표는 각각 다르지만, 신중국 건설이라는 큰 열망 아래서 서화를 주장했던 것은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5·4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제국들에게 배신당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통한 서화를 달성하려고 했고, 천안문사건의 학생들은 민주화를 통해서 서화를 달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 두 운동들은 모두 중국의 후진성을 인정하고 발전된 서양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들여와 중국을 바꾸고자했던 시도였다.

5·4 운동은 현대에서 형태만 약간 달리 했을 뿐, 반복해서 나타났다. 아마 앞으로도, 서화를 찬성하면서 기존의 것을 부정하려는 형태의 운동들은 다시 5·4담론을 깨우고, 오히려 정통성 확보를 위해 그것의 정신을 계승하려 할 수도 있다. 동시에 반대의 보수파들은 사실상 계속해서 5·4의 정신과 싸워서 그것을 억누르고 통제하려 해야 한다.

이것은 아직 5·4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고, 그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그렇다면 5·4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5·4운동은 성격적으로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담론이 형성되어 있는 복잡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5·4 신문화운동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의 생존·번영을 위하여 서화를 통해 더 나은 신중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아직 그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5·4의 정신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5·4의 정신이 사라지려면 다음의 두 가지 상황 중에서 하나는 만족이 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글자 그대로 신중국의 달성, 아마 현대 중국에 입장에서는 중국적 사회주의의 온전한 달성이 실현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두 번째로는, 중국이 모든 방면에서 서양을 앞지른다고 생각되면 서화의 필요성이 당연히 사라져서 5·4의 정신도 의미가 없게 된다. 하지만 지금 중국이 G2국가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 경쟁시대에서 모든 방면에서 서양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매우 오랜 시간 뒤에나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5·4담론은 현대중국에서 꽤 긴 시간동안 계속하여 발생할 것이다.

참고 자료

이매뉴얼 C.Y. 쉬 저,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 하권, 까치글방,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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