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리췬
생애
1939년 1월 충칭에서 출생했고, 본적은 저장성 항저우이다.
1949년 상해에서 '해방'을 맞이한 후 국민당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외조부와 외삼촌들이 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상해에 남아 소학교를 다녔다.
1950년부터 1956년까지 난징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초기 고양된 혁명의 시대분위기와 함께 이른바 ‘황금의 어린 시절(金色的童年)’을 보냈으며 소위 1950년대의 ‘이상주의 교육’을 받았다.
1956년 베이징대 중문과 신문전공에 합격하였고, 1957년 베이징대학생민주운동과 그에 수반하여 일어났던 반우파운동을 겪었다.
1958년에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을 겪었으며 이 시기 베이징 교외의 농촌과 산시(山西)성 타이웬(太原)시의 중형기계공장 등에서 노동을 하며 교육 혁명을 했고 1960년에 졸업했다.
1960년부터 1974년까지는 구이저우(贵州)성의 안순(安顺)지구에 하방 되어 위생학교에서 어문교사를 지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같은 지역의 안순사범학교(安顺师范学校)에 다시 어문교사로 복귀해 일을 했고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직후에는 현지 지식청년 및 청년노동자 등과 함께 마르크스와 레닌 저작을 읽으며 문화대혁명의 역사경험을 정리하고자 시도했다.
1978년 베이징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ㆍ박사 학위를 받고 베이징대학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2002년 8월 정년퇴임했다.
첸리췬과 루쉰
첸리췬은 중학교 시절 루쉰 사상을 처음 접했다. 문학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후에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루쉰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첸리췬은 학자였지만 루쉰을 연구했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에 따라 1980년대 계몽운동에 주로 참여했다. 첸리췬의 연구는 학술적 연구가 아닌 사상계몽적 연구였다. 그러나 사회운동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1985년부터 17년간 첸리췬은 베이징대학에서 루쉰을 강의했다. 1986년 출판된 영혼의 탐색(心靈的探索)은 본격적인 루쉰 전문연구서로서 이 책 「후기」에서 그는 그가 어떻게 루쉰과 마오쩌둥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고 루쉰 연구를 하게 된 자신의 인생역정을 중국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기술하고 있다.첸리췬의 첫번째 루쉰 연구서인 영혼의 탐색은 왕푸런(王富仁)의 중국 반봉건사상혁명의 한 거울(中國反封建思想革命的一面鏡子)과 더불어 1980년대 루쉰 연구의 새 장을 연 거작으로 그 이후에 나온 왕후이(汪暉)의 반항절망(反抗絶望), 왕샤오밍(王曉明)의 가시덤불속의 탐색(刺叢里的求索) 등와 더불어 20세기 루쉰 연구의 한 획을 그었다.
2000년에는 루쉰 연구를 계속하면서, 중국 현실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이즈음 저우씨형제를 만나다(话说周氏兄弟), 당대로 걸어들어온 루쉰(走进当代的鲁迅), 루쉰과 만나다(走进当代的鲁迅) 등이 출판되었다. 2002년 퇴직 이후, 대중적인 루쉰 문학과 루쉰 사상을 보급하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민간사상 복원에 주력했다. 당시 루쉰 사상 보급을 위해 초등생 루쉰독본(鲁迅小学生读本), 중고등학생 루쉰독본(鲁迅中学生读本)을 펴냈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난징(南京)과 베이징 중고등학교에 ‘루쉰작품선독’ 과목을 개설했으며 강의용 책자로 첸리췬의 중고등학교 루쉰강의(钱理群中学讲鲁迅)를 펴냈다. 대학생을 위해서는 루쉰작품10강(鲁迅作品十讲)을, 대학원생과 일반 사회의 문학청년을 위해서는 루쉰9강(鲁迅九讲)을 펴냄으로써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원까지의 루쉰강좌 교재를 계통적으로 정리했다.
루쉰의 "학교에 갇혀 신사 같은 학자가 되느니 차라리 사막에 나가 화나면 소리 지르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게 낫다.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지 학교에 갇힐 수는 없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1997년 첸리췬은 '나는 욕하고 싶다'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욕한다'는 것은 사회 비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첸리췬은 루쉰의 '정신계의 전사'라는 개념이 본인에게 어울린다 생각하여, 직접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거나 직접 정치운동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계몽가'가 되고자 하였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전사'가 될지 '학자'가 될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첸리췬은 학자이면서 전사인 비판적 학자를 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순전히 루쉰의 영향때문이었다. 비판적 학자는 사회운동에는 참여하지만 정치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첸리췬은 끊임없이 자기감시와 자기비판을 한다. 이는 루쉰의 회의정신과 부정정신을 자기화한 것이다.
첸리췬과 마오쩌둥
첸리췬은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 문화를 20세기 중국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가 볼 때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은 기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맑스주의자로서 세계를 해석하는 사상가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세계를 개조하는 행동가이다. 사상이 추구하는 것은 철저와 비타협, 하지만 실천은 타협을 해야 한다. 사상이 추구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 하지만 실천은 현실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사상의 실현은 곧 사상 자신과 사상가의 훼멸(毁滅)이다.” 둘째, 시인. 이론 형태의 낭만주의가 실천 층위의 전제주의로 전환했다. 셋째, 국가의 최고 통치자. 넷째,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도자. 다섯째, 마오쩌둥은 사상을 개조하고자 한다.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호걸이자 성인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여섯째, 그가 통치하고 개조하고자 한 대상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인 중국이라는 점이며, 그 영향이 크고 깊어 가벼이 볼 수 없다. 마오쩌둥 사상은 반세기 동안 지구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의 생존방식, 기본 사상, 행위 방식을 지배했다. 마오쩌둥은 아주 목적의식적으로 그 자신의 사상을 이용하여 중국과 세계의 현실, 그리고 중국인의 영혼세계를 개조하고자 했고, 또한 그의 사유 모델에 따라 중앙에서 지방의 기층에 이르는 사회생활의 조직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이는 사상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물질적이고 조직적인 존재이다. 첸리췬은 자신을 “마오 시대가 만들어냈고 마오 문화가 혈육과 영혼 속에 스며들어, 아무리 발버둥치고 자성하고 비판해도 여전히 구제불능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유토피아주의자”인 동시에 “마오 시대의 목적의식적인 모자라고 자평한다. 그러므로 그는 마오쩌둥 문화를 “저주하면서도 축복하고, 결별하면서도 그리움을 두며, 복수하면서도 사랑하는" 그런 양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첸리췬은 마오쩌둥의 체제 문제도 연구했다. 첸리췬이 볼 때“공화국의 역사에서 1957년의 반우파운동이 하나의 관건이며, 그것이 건립한 ‘1957년 체제’와 그 후의 대약진, 인민공사운동, 4청, 그리고 문혁의 출현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첸리췬이 볼 때 공화국 건설 후 9년째 되는 1957년의 반우파운동 이후 수립된 ‘57년체제’가 마오쩌둥 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그것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연속체로 본다. 특히 부국강병과 개인 독재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덩샤오핑 체제를 지칭하는 ‘6⋅4체제'는 “1989년의 ‘6⋅4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전환점” 이후 형성되었는데,“ ‘6⋅4’ 이후에 진일보하게 강화되고 발전한 일당전제체제가 마오 시대의 ‘1957년 체제’의 연속임과 동시에 새로운 덩 시대의 특징을 가지며, 이러한 ‘6⋅4체제’는 ‘6⋅4’ 이후의 중국 사회구조의 거대한 변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 ‘6⋅4대학살’이 중국 정치에 가져온 직접적 영향은 정치체제 개혁의 전면적 후퇴, 민간저항 역량에 대한 전면적 타격, 그리고 당의 권력의 전면적 확장 등"이다.
첸리췬 학문의 특징
민간사상의 부단한 흡수
민간사상
첫째 민간사상은 비판성이 강하다. 민간사상가는 이단적이며 비주류이고, 주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다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민간사상은 민간을 통해 전파되며, 국가나 공식적인 출판을 통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민간작가 대부분이 참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희생을 당했다.
민간사상의 전파방식 중 하나는 중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여건 속에서 대자보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모두 마오쩌둥과 관련이 있는 백화제방시기와 문화대혁명시기 때 이다. 현재는 주로 인터넷과 컴퓨터가 전파 수단이며, 현재의 민간사상은 인터넷을 통해 전파된다. 민간을 결정하는 기준은 위의 세가지와 같고, 신분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기준에서 첸리췬 본인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민간사상가였지만 그 후부터 현재까지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첸리췬은 전반적으로 민간운동을 지지하며, 일정기간 본인도 민간운동에 참여했지만, 민간운동을 이상화하지는 않는다. 복잡한 민중을 이상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첸리췬에 대한 평가
중국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고, 신좌파들로부터는 자유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첸리췬은“나는 양쪽에서 비판당하지만 양쪽에서 끌어가려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첸리췬은 공산당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고, 한 때는 두번째로 중요한 관찰 대상이기도 하였다.
첸리췬의 강의는 베이징대학의 최고 인기 강좌였고, 한 번에 수백 명에서 천여 명 이상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1990년대 말 베이징대학 10대 우수교수 선정 행사에서 재학생의 투표로 1위에 선정되었고, 그 후 베이징대학의 ‘정신적 스승精神導師’으로 일컬어졌다.
주요 저서
-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상.하
- 내 정신의 자서전
- 망각을 거부하라
- 고뇌하는 중국
- 영혼의 탐색
- 주작인전
- 주작인론
- 풍부한 고통-돈키호테와 햄릿의 동천
- 크고 작은 무대 사이에서-조우 희곡 신론
참고자료
유세종(2012),"루쉰과 첸리췬",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중국현대문학 60,299-314 (16 pages)
조경란(2013),"사회인문학의 대화(7) : "중국"을 회의하며 계몽하다 -중국문학사 연구자 첸리췬(錢理群)",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동방학지,289-324(36 pages)
첸리췬,"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연광석(2012),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