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
초(楚,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223년)는 현재의 후베이성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역사
개요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서주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세력이 약해지고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틈을 타 초는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 웅순이 자작(초나라의 작위)이 되고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이 가라앉자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 세력 팽창에 돌리니 초나라는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특히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장왕莊王이 패자가 된 이후부터 초는 진晉나라와 남북으로 대립하여 약 1세기에 걸쳐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그 사이에 양쯔강 하류에서 오와 월이 일어나자 한때 초나라의 소왕은 오나라에 밀려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다. 그 후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고 또 월이 쇠퇴하자 초는 다시 세력을 회복, 양쯔강 중, 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이 무렵에 초는 7웅 가운데서 영토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점차 진秦의 압박에 못 이겨 두 차례 수도를 함락당하고 천도하였으나 끝내 기원전 223년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남북항쟁과 남방세력의 한계
중국의 역사는 민족사의 측면에서 보면, 황하 유역의 북방에 거주하며 여기에 근거를 두고있던 한漢민족이 점차 남하하여 남방민족을 동화시키며 현재의 변경지방을 포함하는 중국 전토를 완전히 지배하는 과정이다. 중국은 북방에 거주하는 유목민, 즉 기마민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다. 즉 중국에서의 남북대립인데, 북의 교통기관이 말이나 마차를 중심으로 하였던 반면, 남방은 배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른바 남선북마南船北馬다.
1967년에 전국시대 말경 초의 국도가 있었던 안휘성 수현壽縣에서 세관통과세에 대한 면세특권 증명서에 해당하는 청동 악군절鄂君節이 발굴되었다. 그것은 배로 항해하는 노선과 수레로 이동하는 노선 각각 한 통씩으로 남선북마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장강 유역 이남은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지만, 남방문화를 대표하는 초에서는 수레도 사용하고 있었다.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두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전국시대의 중국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남북대립은 장강 중류에서 초가 발흥하여 황하 중류의 진晉과 대립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나라의 영역으로 볼 때 초는 진보다 훨씬 넓은 가장 큰 나라였다. 춘추시대에 이런 대국이었던 초가 끝내 중원을 실제로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은 역시 장강을 중심으로 한 남방민족의 한계라고 할 수 있으며, 악군절은 복잡한 초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춘추시대를 통해 북방 중원의 한민족과 싸우면서 초가 끝내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중원의 진晉이 초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이 장강 하류에서 일어난 남방민족 오를 도와 초를 견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원 한漢민족 문화의 승리
중국 고대사에서 춘추시대에 초가 등장하기까지의 중국은 지리적으로 남북대립이 아닌 동서대립이었다. 따라서 초의 등장은 남방문화의 대표가 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다면 초가 끝내 중원을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초의 문화는 비교적 일찍이 주문화와 접촉하여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교류가 있었다. 초는 스스로 만이蠻夷라고 자각하였으며, 동시에 만이민족이 중국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문화를 하루 빨리 섭취해야한다는 의욕이 강했다. 그래서 북방에서 망명해 온 귀족이나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중원화中原化를 추진했다. 초는 문화적으로 남방문화를 대표하는 국가였으나 북방문화에 대항할 수 없었고 또한 북방문화의 영향 하에 있는 신흥국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장강 하류의 삼각주 문화 쪽은 오히려 비교적 뿌리 깊은 토착성을 갖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강대한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이 오와 월이다. 장강 하류 문화 쪽이 초의 문화보다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