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법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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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토법고로.png

토법고로란 1950년대 후반~60년대 대약진운동 시기, 철강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농가에서 직접 철을 생산하자는 취지에서 설치된 용광로를 말한다.

목적

1958년 5월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 채택되고, 이른바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공업과 농업, 중앙의 공업과 지방의 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서양기술과 중국의 전통기술인 ‘토법’을 병용하는 기본 노선을 택했다. 영국을 목표로 “공업 생산을 15년 이내에 추월하자”라는 주장에 잘 드러나듯 생산의 비약적인 향상을 지향하였으며, “많이, 빨리, 근사하게, 효과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라는 구호에 그 주장이 집약되어 있다.

공업부문은 철강 생산에 편중되었으며 첫 해의 목표는 1957년도 생산량인 535만 톤의 두 배인 1,070만 톤으로 증산하는 것이었다.[1] 이에 마오쩌둥은 “목표량보다 1t만 모자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명령을 내기도 했다. 그는 국가적 차원에서 거대한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을 대량생산하기엔 기술력과 자본이 부족하니, 마을마다 용광로를 설치해 인해전술로 대량의 철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토법고로를 택한 것이다.[2]

특징

따라서 중앙정부는 토법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지방공업을 보급하고 나아가 인민공사를 건설했다. 인민공사는 집단 생산과 집단 생활을 영위하는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의 지역 공간을 만들 것을 목표로 한다. 토법고로는 이 인민공사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용광로는 인민공사 뒤뜰에 설치하여 주민들이 운영하는 형태였는데 모래, 돌, 내화 점토나 벽돌이 고로의 주재료였다. 전형적인 토법고로는 맨 위에 나무 대가 있고 들보로 지지되는 3~4m 높이였다. 고로 옆에 있는 경사로로 접근 가능하여 농민들은 코크스와 광석, 융제를 담은 자루를 등에 지거나 바구니를 어깨에 걸치고 경사로를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바닥으로는 공기가 주입되고 용해된 쇠와 광재는 기둥 마개로 흘러나왔다. 전통적인 송풍 방식에 기반을 둔 것이다.[3]

토법고로에 자재를 공급하기 위해 주민들은 솥단지, 냄비, 각종 집기, 심지어 문고리와 창틀까지 내놓아야 했다. 심지어는 멀쩡한 농기구를 녹여 할당량을 채우기도 했다. 그로 인해 본업인 농사는 더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식량부족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연료를 때기 위해서 무분별한 벌목으로 숲에선 나무가 사라졌고, 농촌의 많은 가옥에선 목재가 뜯겨나갔다.

결과

사회적 영향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농민들도 예외 없이 인민공사에 끌려갔다. 당연히 농업일은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불철주야 진행된 철강증산운동에 사고와 사망자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연료 또한 해결해야 했기에, 숲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서 일부는 석탄을 채집했다. 땅굴에 대한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도 많았기에 폭발로 인한 인명피해도 존재했다. 또 삽과 곡괭이, 때로는 손으로 넓은 땅을 파헤쳤고, 마구잡이로 베어진 나무들이 사람들 위로 쓰러지기도 했다.

오늘날,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전하는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숫자로 짐작해 보면 사망자 수는 약 1,500만 명에서 4,000만 명에 이른다. 아사자가 총인구의 2.5%에서 6%에 이르렀다면, 아사 상태를 헤매던 사람들은 당연히 그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4]

경제적 영향

토법고로를 통해 결국 지도부는 원하는 기록을 얻었다. 하지만 농촌 인민공사에서 나온 괴철은 너무 작거나 잘부서져서 현대적 압연 공장에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나 쌓여 있었다. 야금부 자체 보고서에 따르면, 많은 지방 토법고로에서 생산된 철 가운데 3분의 1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품질을 무시한 채 오직 증산만을 강조한 결과인 것이다. 철강은 효율적으로 생산되지도 않았으며, 상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없었던 것이다.[5]

토법고로는 대약진운동이 경제의 복합한 상호관계를 뒤로 한 채 철강산업에 모든 자원을 독자적으로 추진한 대약진운동의 일면이다. 현대의 국민경제체계는 지극히 복잡한 체계로서 어떠한 한 공업부문도 기타 공업부문과 떨어져서 혼자서만 추진할 수 없다. 이는 국민경제의 전체적인 균형을 파괴하여 국민경제의 심각한 불균형 현상을 초래할뿐더러, 철강공업자체도 후퇴한 각 부문의 발전수준과 부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6]

문화적 영향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문화유산 측면에서는 뜻밖의 수확을 가져왔다. 전국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쇠붙이들이 쏟아졌는데, 그중 수많은 고대 중국의 청동기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를 통해 철강생산 대국이란 목표는 실패했지만, 발견한 청동기들로 고대 하상주 시기의 연구조사가 활발해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당시 가장 큰 제련소가 상하이에 있었는데, 고대 청동기의 다수가 그곳으로 유입되었고 3만 여점의 청동기가 상하이 박물관으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관련한 청동기 유물의 대다수는 현재 상하이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7]

각주

  1.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일조각, 2016, pp.69-70.
  2. “토법고로와 제로 코로나", <국민일보>, 2022.05.11., [1]
  3. 프랑크 디쾨터, 『마오의 대기근』, 열린책들, 2017, p.110.
  4.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사』, 일조각, 2016, pp.75.
  5. “토법고로(土法高爐)의 비극", <서울신문>, 2020.10.26., [2]
  6. 심영수, 「중국의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원인(경제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순천향 사회과학연구 제1권 1호, 1995, p.77.
  7. “마오쩌둥 ‘쇠붙이 모으기 운동’으로 발견된 중국 고대 청동기들”, <한겨레>, 2021.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