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八王)의 난
황족(皇族:司馬氏) 8명의 왕이 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290년 무제(武帝)가 죽고 연소한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무제의 황후 양씨(楊氏)는 선황의 유조(遺詔)라 하여 그녀의 아버지 양준(楊駿)을 재상으로 앉히고 국정을 전단하였다. 혜제의 황후 가씨(賈氏)는 여남왕(汝南王) 사마 량(司馬亮)과 초왕(楚王) 사마 위(司馬瑋)를 서울로 불러 올려서 양씨 일족을 죽이게 한 후, 구실을 만들어서 사마 양, 사마 위를 죽이고, 스스로 국정을 맡아서 가씨 일족은 지극히 융성하였다.
301년 조왕(趙王) 사마 륜(司馬倫)은 가씨 일당을 포살하고 혜제를 폐한 후 스스로 황위에 올랐으나, 제왕(齊王) 사마 경(司馬冏)과 성도왕(成都王) 사마 영(司馬潁)의 공격을 받아 자살하고 혜제가 복위하였다. 이후 장사왕(長沙王) 사마 애(司馬乂), 동해왕(東海王) 사마 월(司馬越), 하간왕(河間王) 사마 옹(司馬顒)도 군사를 일으켜서 정권을 다투었으므로 국도(國都) 뤄양[洛陽]은 전란 때문에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사마 월이 영과 옹을 죽이고, 혜제가 죽자 회제(懷帝)를 즉위시켜서 정권은 월에게 돌아오고(306), 16년에 걸친 내란도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여러 왕이 병력보급을 위하여 끌어들인 흉노(匈奴)·선비(鮮卑) 등 북방민족은 그후 화북(華北) 각지에 증식하여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주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