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덕회
팽덕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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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년 1월 24일 후난 성 |
사망 |
1974년 11월 29일 |
관련 활동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한국전쟁 때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을 지휘함 |
개요
중화인민 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한국 전쟁 때 개입한 중공군의 사령관을 맡았다. 문화대혁명 당시 사망하였다.
생애
초기
팽덕회는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이다. 팽덕회는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는데. 그의 할머니는 팽덕회의 나머지 세 동생들과 함께 쌀을 동냥하러 다녔다. 팽덕회는 동냥을 하는 대신에 장작용 나무를 자르고 물소를 돌보기도 하는 등 각종 노동을 하였다. 이런 노동 때문에 팽덕회는 강인한 등과 어깨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백부는 1850년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했었는데 백부에게 처음으로 혁명 정신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의 백부는 팽덕회에게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평민들에게 먹을 식량을 나눠주고, 여성들의 전족을 해방시켰으며, 토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하였다고 말했다. 훗날 그가 남긴 회고록에서는 "이 때 지주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고 회술하였다.[1] 1916년 팽덕회는 후난성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지방 군대에 입대를 하였다. 그리곤 후난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한 뒤, 1928년에 홍군에 들어갔다.
홍군시절
이후 팽덕회는 마오쩌둥과 주더의 군대에 합류하여 홍군 3군을 이끌며 대장정에 함께한다. 2년여간의 대장정을 거치는 동안 팽덕회와 주더,임표는 가장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주더의 밑에서 8로군의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1937년 항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항일 유격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으며, 1946년부터 시작된 국공내전에서는 서북변구의 부사령관으로서 산시성에서 국민당을 격파하였다.
한국 전쟁
1950년 시작된 한국 전쟁 당시 마오쩌둥은 중공군의 개입을 결정한다. 이때, 팽덕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인민 의용군(中国人民志愿军)의 총사령관으로 이들을 이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유엔군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선은 3.8선에서 교착 된다. 한국 전쟁 당시 마오쩌둥의 큰 아들이었던 마오안잉은 팽덕회의 곁에서 러시아어의 통역과 행정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숨졌다. 마오안잉의 사망 소식은 3개월이 지난 이후 마오쩌둥에게 전달이 된다. (이 의견을 가지고 팽덕회는 보고를 바로 했으나 주은래가 마오쩌둥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팽덕회가 자의로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늦추었다는 말이 있다.) 한국 전쟁이 휴전을 한 이후, 인민 해방군의 원수, 국방부장, 정치국원을 지냈고 소련 군사고문의 연락을 담당하여 중국군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루산회의와 몰락
흔히들 마오쩌둥이 팽덕회를 자신의 큰 아들인 마오안잉의 일 때문에 문화대혁명 당시 앙금을 가지고 실각을 시켰다고 알고있다. 하지만 1957년부터 팽덕회는 마오쩌둥의 의견에 반대를 하기 시작한다. 팽덕회는 중국과 소련이 이데올로기 등의 문제로 사이가 갈라졌을 때, 군대의 현대화 등을 이유로 들어 소려과의 화해를 주장하였다. 또한 팽덕회는 마오쩌둥의 자력갱생 체제와 옌안 시기처럼 유격 전략으로 군대의 전략이 바뀌는 것에고 큰 반대를 하였다. [2] 특히 1959년에 팽덕회가 국방부장의 자격으로 소련에 방문을 하였을 때, 노골적으로 마오쩌둥의 노선에 불만을 표출했다. 팽덕회에게는 군대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소련의 협조가 필요했지만, 마오쩌둥의 의지로 시작된 대약진운동 등은 소련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팽덕회는 1959년 6월, 중국의 인민공사화와 국가 경제의 붕괴, 대중으로부터의 당의 이탈, 억압적인 경제적 정치적 환경 등을 이유로 들며 대약진운동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에 마오쩌둥은 1959년 7월 한 연설을 통해 팽덕회가 가한 비판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파워를 행사한다. 그는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망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면 자신은 농촌으로 돌아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다. 해방군 여러분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찾아가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군이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3] 라고 말한다. 아직 정치적인 파워가 있는 마오의 눈치를 본 당의 지도자들은 팽덕회의 편을 드는 것보다 마오의 뜻을 지지하는 것 밖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9월에 열린 루산회의는 팽덕회와 그를 지지하는 일당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팽덕회가 대약진운동에 가한 비판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결국 팽덕회는 국방부장관직에서 해임이 되었고 그 자리를 임표가 대신하게 된다.
문화대혁명과 최후
1966년 마오쩌둥은 문호대혁명을 일으킨다. 팽덕회는 홍위병들에게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그리고 1974년 세상을 떠난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는 동안 추락되었던 그의 명예는 이후 1978년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덩샤오핑에 의해 회복된다.
평가
팽덕회의 동료였던 양상곤은 "그는 설득력 있고 굽히지 않는 정신을 나타내는, 검고 빛나는 눈을 가진 조각 같은 얼굴을 지녔었다"라고 술회했음.[4]
그는 굉장히 강직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큰소리로 부정하고 감옥의 벽이 흔들릴 정도로 책상을 난폭하게 내려치며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네놈은 나를 죽이겠지만, 네놈이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