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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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유웅씨의 우두머리였던 소전의 자식이다. 희수 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성을 희씨로 하였다. 일찍이 헌원의 구릉(지금 하남 신정현 헌원구릉)에 살았으므로 지명을 취하여 헌원을 이름으로 삼았다. 조상이 유웅씨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또 '유웅'이라고도 부른다. 흙의 덕성을 숭상하는데, 흙의 황색을 띄므로 '황제(黃帝)'라고도 부른다. 그들 부족이 살던 부락은 원래 서북고원 지대였다.
황제는 사악한 적을 징벌하고 처음으로 중국민족을 통일한 위대한 업적을 남겨 역사책에 기록되었고, 후대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아주 먼 고대에는 중국 강역에 많은 민족이 살았다. 당시 제하는 하나의 민족이었는데 주된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강을 성으로 한 염제 세력, 하나는 희를 성으로 한 황제 세력이다. 황제의 부족과 염제의 부족은 형제부족이며, 모두 유웅씨의 우두머리인 소전의 후예이다.
전설은 당시 남방 구여족의 족장인 치우가 강력하고 흉맹한 사람이었으며 항상 다른 부족을 침범하고 하였다고 전한다. 염제의 부족은 치우의 공격을 받고 패하였는데 황제가 구원하였다. 또 다른 전설은 이러하다. "황제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 하는데 염제가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결국 황제는 염제에게 승리를 하여 염제 부족을 합병하였다. 황제는 모든 부족을 이끌고 탁록으로 나아가 치우를 맞아 싸웠다. 쌍방은 아주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치우는 패퇴하여 살해되었다. 황제부족과 염제부족은 하나로 합쳐진 후에 화하족이라고 불렸다. 황제는 염제 부락연맹의 우두머리를 추대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위대하고 찬란한 화하문화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전설은 황제가 여러 대신들과 천문역법을 연구 제정하였다고 전한다. 황제의 사신인 창힐은 문자를 창제하였다. 황제의 부인 나조는 사람들에게 누에를 쳐서 실을 짜는 법을 가르쳤다. 황제는 또 수레를 발명하였다. 헌원이라고 하는 그의 이름은 수레 만드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황제는 또한 궁실, 산수, 음률 등의 제도를 만들어내었다. 실로 이러한 발명과 창제는 한 사람이 일시에 이룰 수 있는 공적이 아니다. 중국은 공적을 성인에게 돌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황제는 이미 화하민족의 시조신이 되어 있으니 고대문명이 발명해낸 모든 것에 대한 공이 황제에게 귀속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황제는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어 옛 사람들의 첫 번째 신격화 대상으로 떠오른다. 황제의 모친이라고 말하여지는 원천대성후는 '거대한 뇌룡이 북두칠성의 뼈대를 흔드는 것'에 감응하여 황제를 낳았는데, 황제는 태어날 때 '황룡의 몸체'와 네 개의 얼굴을 갖추었으며, 타고난 신명으로 모든 신을 어거하고 사방을 통제하였고, 비와 구름, 바람과 번개를 주관하였으며, 나아가서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신, 중국식으로 말하면 '상제'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황제가 110년을 살았으며 100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고 전한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스스로 신선이 되어 날아갈 날짜를 정해놓고 그 날이 되자 신하들과 작별하고 세상을 떠나갔으며, 남긴 육신은 교산에 묻혔다. 황제의 묘는 섬서, 감숙, 하남, 하북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섬서성 교산의 묘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사기-5제 본기>>에는 "황제가 붕어하여 교산에 장례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교산의 황제 묘는 섬서성 황릉현의 성 북쪽 1키로 쯤 되는 교산 위에 위치한다. 교산은 다리를 손으로 맞잡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산 아래에는 저수지가 띠를 이루듯 돌아가고, 산 위에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하늘을 떠받치듯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황제의 묘는 산꼭대기의 정중앙에 있는데, 꽃처럼 꾸며진 벽돌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교산의 동남쪽 산기슭에는 유명한 황제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 또한 헌원묘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한나라 때 처음 건립되어 대대로 중수되었다. 큰 전각은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고 문루에 높이 달린 현판에는 "사람과 문명의 첫 번째 시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각 안 정 중앙에는 당당하고 화려하게 수식된 거대한 황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그 위에는 '헌원황제의 신위'라고 쓰여있다.
항일전쟁이 고조되었을 때 각계의 유력한 인사들은 청명절을 '민족이 성묘하는 명절'로 정하자고 주창하였다. 이날에는 모두 황제의 묘에 제를 올리는 관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1937년의 청명절은 제2차 국공합작 시기인데, 양 당에서는 똑같이 중요한 인물을 황제 묘에 파견하여 함께 민족시조에게 제를 올리게 하였다. 해방 이후 황제묘는 다시 수리되어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고, 중국은 물론 해외에 나가 사는 염제와 황제 자손들의 참배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시조인 염제와 황제 두 제왕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최근에는 황하 남쪽 언덕 경광철로가 지나는 대교 부근에 있는 시조산 위에 염제와 황제 두 제왕의 거대한 소상을 깎아 놓았다. 이 거상은 높이가 150미터에 이르는데, 세계 최대의 석조상이다. 거상은 남쪽을 뒤에 두고 북쪽을 향하여 황하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오고 가는 열차 안에서 염제와 황제 두 시조의 웅대한 형상을 접할 수 있다. 거상의 앞 3백 미터 되는 곳에는 13미터 높이의 거대한 청석 제단이 만들어지고 있다. 제단에 이르는 신로를 중심선으로 하여 양쪽으로 7미터 높이의 커다란 청동 솥 9개를 배치하였는데 구주사방의 강산이 영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제단에서 황하에 이르는 길이 200여 미터, 너비 17비터 정도의 광장도로를 개설하고, 이 탄탄대로의 양쪽으로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으며, 아울러 편종과 경석 등 예법에 쓰는 기구를 배치하였는데, 화하족의 국태민안과 천지자연이 보우하여 주기를 비는 상지이다.
이곳은 나라 안과 바다 건너에 사는 황제와 염제 자손들이 그 뿌리를 찾고 조상을 배알하며 시조에게 예배를 드리는 하나의 성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