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사건
문혁 급진파 내부의 대립은, 1968년 8기 12중전회에서 기존의 당권파에 대한 숙청 및 처리가 완료된 후, 특히 새로운 권력구조가 확립된 1969년의 중공 9차 당대회 이후 격화되기 시작한다. 중공 9차 당대회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당장에 공식적으로 수록되어, 린뱌오의 지위가 확고부동해지고 린뱌오의 권력기반인 군부가 중앙위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형식적으로는 후계체제를 포함한 권력구조가 안정화하는 듯 보였으나, "9차 당대회 정치보고" 작성을 둘러싼 갈등과 논쟁 및 중앙위원 선출과정의 갈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력을 장악한 급진파 내 파벌들 사이의 갈등이 이미 표면화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제4기 전국인대 개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 숙청 이후 공석이던 국가주석직 유지 문제를 둘러싼 마오쩌둥과 린뱌오 집단의 대립이 발생한다. 그러한 대립은 1970년 8월 23일에서 9월 6일까지 루산에서 개최된 9기 2중전회에서 폭발한다. 9기 2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의 의사와는 반대로 국가주석직 설치와 천재론을 주장한 천보다를 윗한 린뱌오의 지지자들이 비판받았다. 그후 천보다 비판운동이 전개되고 린뱌오의 심복들에 대한 자아비판이 요구된다. 이에 실각의 위기를 느낀 린뱌오 집단은 쿠데타를 계획하지만 실패했고, 소련으로 도망가던 린뱌오가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는데, 이것이 1971년 9·13 사건이다.
참고자료
안치영, 『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서남동양학술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