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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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8대 황제 재위기간 B.C.87-B.C.74

어린 황제의 즉위

무제 사후 8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어린 소제를 대신하여 무제의 유지대로 곽광, 김일탄, 상관걸이 정치를 행하였다. 이들 삼인방은 장군으로서 병권을 손에 쥠과 동시에 상서의 직을 겸하면서 사실상 국가 권력 전반을 모두 장악했다. 이들 삼인방 덕분에 유불릉은 꼭두각시 황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내조와 외조의 대립

내조가 권력을 장악하니, 내조의 삼인방과 기존 외조의 실세였던 상홍양의 대결구도가 펼쳐졌다. 무제 시절 상홍양의 주도로 이루어진 여러 경제정책들이 소제시기에 이르러 각종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켰는데, 곽광이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내조와 외조의 정책상의 충돌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내조와 외조의 정책

1. 내조의 정책 곽광을 필두로 한 내조에서는 무제시기 장기간에 걸친 정복사업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시행되었다. B.C.86년 정위(廷尉) 왕평 등을 중심으로 한 5인을 각지에 파견하여 현량을 천거케 하고, 백성의 고충을 살피고, 억울한 죄로 파면된 관리들의 유무를 조사하는 등의 민정을 시찰하였다. 또 그 이듬해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여 흉년이 든 지역의 백성에게 농사를 위한 종자와 식량을 대여, 전조(田租)를 면제해주었다.

2. 외조의 정책 외조에서는 내조의 구민정책과는 상반된 정책이 취해졌다. 소제시기 흉노의 재침입으로 상홍양은 무제시기 재정확충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가 정지되었던 둔전제를 다시 실시하였고, 일부 지역에는 대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내조와 외조의 정책은 상이하였으며, 곽광은 상홍양의 외조 정책을 타도하고, 내조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염철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

염철회의

외조의 주도로 각지의 현량과 문학 60여 인이 궁중에 모였다. 이들은 염철의 전매, 균수, 평준법의 시행에 따른 문제에 대해 관리들과 토론을 펼쳤다.

내조의 분열

내조는 무제의 유지를 받들어 곽광, 상관걸, 김일탄 3인이 이끌고 있었다. 헌데 2차 연왕 단의 모반을 진압한 후 김일탄이 이듬해 사망하자 내조는 곽광과 상관걸 2인체제로 변하였다. 본래 두 인물은 사돈관계로 사이가 원만하였으나, 소제의 황후 책립을 계기로 갈등이 발생하였다. 상관걸의 상관안과 곽광의 딸 사이에서 난 자식이 소제의 황후로 책립되었는데, 이를 통해 상관걸 부자는 왕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내조는 곽광과 상관걸의 세력으로 분열된 것이다.

내조의 분열과정에서 외조의 거두 상홍양이 상관걸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상홍양을 제거하기 위해 연왕 단과 함께 상홍양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소제에 의해 곽광의 무고가 밝혀지면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곽광을 암살하고, 소제를 폐한 후 연왕 단을 옹립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축출당하였다. 이로써 정적들이 모두 제거되자 곽광은 내조와 외조를 장악하여 황제를 뛰어넘는 절대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1.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신서원, 1986, p297-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