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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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왕 (周武王)

출생 기원전 1087년
사망 기원전 1043년
관련 활동 정치

인물개요

주(周)나라를 건국한 개국 군주.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주 문왕 희창(姬昌)과 정비 태사(太姒)의 차남이다. 형인 백읍고(伯邑考)가 나라 주왕(紂王)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인해 주 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도읍을 풍(豊)에서 호(鎬)로 옮겼다. 그곳이 지금의 산시성 서안이다. 주 왕조를 세운 뒤 재위한 기간은 4년이며, 죽어서 필원에 묻혔다.

업적

상의 멸망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흠뻑 빠졌으며 지나치게 여자를 탐했다. 특히 달기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또한 술을 부어서 연못을 만들고, 고깃덩어리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숲처럼 만들고, 남녀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주왕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이 원망하고 제후들 중 배반하는 자가 생겼다. 이 때 주무왕의 부친인 서백이 봉국으로 돌아가서 은밀하게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자 대부분의 제후들이 주왕을 배반하고 서백에게 몰려갔다. 서백이 죽고 발이 왕위를 물려받으니 바로 주무왕이다.

주의 건국

문왕 9년 무왕이 맹진(盟津)에 나아갔을 때 제후들이 팔백 명 가까이 몰려들어 주왕을 토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왕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도 주왕의 폭정이 그치지 않자 무왕이 상을 정벌하고자 마음을 정했다. 결국 문왕 11년 십이월 무오일에 전군은 맹진을 넘었고 제후들도 몰려왔다. 무왕은 <태서(泰誓)>를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주왕의 죄악을 나무랐다. 이월 갑자일 이른 아침에 무왕은 상나라 교외의 목야에 결집했다. 무왕은 여기서 <목서(牧誓)>를 지어 결전을 호소했다.주무왕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자, 주왕은 칠십만 대군을 이끌고 대항했다. 하지만 민심을 잃은 주왕의 군사들은 왕을 버리고 모두 흩어졌고 왕궁으로 도망친 주왕은 녹대 위로 올라가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무왕은 상나라의 도읍으로 입성했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당시 전쟁터였던 ‘목야’를 따 이 전쟁을 목야지전(牧野之戰)이라 칭한다.

정책

국내 정세 안정

상나라 주왕의 아들인 녹보에게 관용을 베풀어 은나라 유민들이 살던 땅을 봉해주었고, 상나라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동생 관숙선과 채숙탁에게 녹보를 도와 은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기자를 석방했으며,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던 다른 신하들도 석방시켰다. 그리고 주왕에게 충고하다가 연금되었던 충신 상용을 고향으로 보내 주었고, 녹대의 재물과 거교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구정과 보옥을 백성들이 볼 수 있게 전시하고, 비간의 묘를 수리하게 했으며, 종축에게 명해 죽은 병사들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봉건제와 정전제

무왕은 공신의 업적에 따라 봉토를 하사했는데 이를 봉건제라고 한다. 태공은 제, 주공은 노, 소공은 연에 봉했으며, 죽은 상나라 주왕의 자식들을 초, 축, 계, 진, 기 등에 봉했다. 유럽에서는 중세에 시작한 봉건제가 아시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등장한 것이다.
봉건제를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정전제라는 토지 제도도 등장했다 이 제도는 모든 토지를 주 황실에 소유 하에 둔 다음 황제가 토지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한다. 아홉 등분의 토지 중 중앙에 있는 땅은 황실이 다스리고 나머지의 땅은 제후들에게 하사했다. 제후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신하들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신분 질서 확립

무왕은 신분 질서를 확립했다. 신분 질서의 맨 위에는 황제, 즉 천자가 있고, 그 아래에는 제나라 태공과 같은 제후가 있고, 제후 밑에는 황제의 신하 또는 제후의 신하를 뜻하는 가신들이 있다. 그 아래에는 피지배층이 존재했는데, 피지배층도 직업에 따라 서열이 나뉘었다. 이러한 신분구조가 바로 사농공상이다.

천명 사상

무왕의 혁명은 제후국이 황실을 무너뜨린 하극상이기 때문에 백이숙제같은 청렴한 학자들은 굶어죽으면서까지 주 왕실을 거부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고, 천명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황제가 되고 싶어서 벌인 하극상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따라 백성을 구했다는 것이다. 사마천 <사기>의 주 본기를 보면 무왕이 성에 입성한 후 재상 이일책이 축문을 읽었다. 축문의 내용은 주왕이 신령을 모독하고 경멸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그 죄악을 상제에게 고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무왕이 두 번 절하고, "왕조를 바꾸라는 중대한 천명을 받아 은나라를 변혁시켰으니, 하늘의 영명하신 명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즉, 주왕이 하늘의 뜻에 반하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늘이 무왕에게 상을 멸망시키라는 천명을 내렸고 상의 멸망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민간전설

샤오즈멘(臊子面)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치산에서 용처럼 생긴 괴수를 만나 그를 죽였는데, 무왕이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 괴수의 고기를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군사들 수에 비해 고기가 부족하여 가마솥에 넣고 끓여 그 탕을 한 그르씩 나누어 주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육수에 면과 야채 등을 곁들여 먹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유래한 국수가 샤오즈멘이다.

참고문헌

  • 사마천, 사기본기, 학술편수관, 2014, ISBN 9788993039290.
  • 김상훈, 통 아시아사 1: 고대부터 몽골 제국까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Dasan Books, 2011, ISBN 9788963706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