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개요) |
|||
16번째 줄: | 16번째 줄: | ||
성장과정에서 [[제나라]] 시조인 강상(姜商, 즉 [[姜太公]])의 용병모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 성장과정에서 [[제나라]] 시조인 강상(姜商, 즉 [[姜太公]])의 용병모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 ||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오]](吳)나라로 이주했다. |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오]](吳)나라로 이주했다. | ||
− | 이후 20년동안 은거하며 춘추시대 2백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하였다. 그뒤 | + | 이후 20년동안 은거하며 춘추시대 2백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하였다. 그뒤 오대부[[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병법으로 오왕 합려(闔閭)를 만났고, 이어 장군에 임명되어 오가 [[초]]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중대한 공을 세웠다." |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2017년 6월 24일 (토) 12:25 판
손무(孫武) | |
---|---|
| |
출생 |
B.C 545 제(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惠民縣) |
사망 |
B.C 470 |
생존시기 | 춘추시대 |
주요 작품 | 손자병법(孫子兵法) |
개요
중국 춘추시대 군사 전문가. 주요 활동시기는 오(吳)나라 합려(闔廬, B.C 514 ~ B.C 496) 시대부터 그의 아들 부차(夫差, B.C 495 ~ B.C 473)의 재위 전기(前期)에 이르고 있다. 주요한 공헌은 먼저 『손자병법』을 남긴 것이고, 다음으로는 협려를 도와 초를 격파한 것이다.
생애
자는 장경(長卿)이다. 손자(孫子)는 경칭이며, 한국에서는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사람으로 전완(田完)의 후예다. 성장과정에서 제나라 시조인 강상(姜商, 즉 姜太公)의 용병모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오(吳)나라로 이주했다. 이후 20년동안 은거하며 춘추시대 2백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하였다. 그뒤 오대부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병법으로 오왕 합려(闔閭)를 만났고, 이어 장군에 임명되어 오가 초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중대한 공을 세웠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