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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의 춘추 오패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중 하나로, 크게 춘추시대의 강제(姜齊)와 전국시대의 전제(田齊)로 나뉜다. 작위는 후작이었다.

역사

전국시대의 제나라, 전제(田齊)

진(晉)과 제(齊)의 정권교체

춘추시대 중원의 여러 나라 가운데 최대 강국이었던 진晉은 북방 도시연맹의 우두머리로서, 장강 중류의 무한武漢 지방에서 남방 도시연맹의 우두머리였던 초와 대립하고 있었다. 진晉의 실권을 잡고 있던 대신인 한, 위, 조 3씨는 원래 타지인 이었지만 기원전 453년 연합하여 진의 최대 권력자인 지씨知氏를 격파했다. 이때 이미 진을 3분할 기초가 마련되었고,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403년 주위열왕威烈王을 움직여 한(韓), 위(魏), 조(趙)를 각기 독립 제후로 인정케 하였다. 이로써 대국 진은 완전히 세 나라로 갈라졌고 이는 진(晉)의 3분,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중원에서 진에 맞설 강국은 제였다. 제는 서주 초 강태공 여상이 산동지방에 분봉되었다고 하는 대국이었다. 이 제나라에 망명한 전씨田氏라는 소국 진陳의 공족이 도시주민의 인망을 얻고 실력을 쌓아, 기원전 387년에 마침내 제의 군주를 유폐하고 이듬해 기원전 386년 독립하여 제의 위왕威王이 되었다. 전씨에 의한 새로운 제의 성립과 전술한 기원전 403년의 진의 분열에 의한 삼진의 성립으로 전국시대의 새로운 국제적 세력판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로는 중원에서 떨어져 있던 남방의 (楚)와 북방 하북성의 (燕)이 있었지만, 모두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주는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서쪽 섬서성에는 (秦)이 있었지만, 그 역시 지방에 위치하여 중앙 정치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과 제에서 일어난 정권교체는 전국시대를 특징짓는 정치사의 대사건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들 삼진(三晉)과 전제(田齊)라는 새로운 국가는 성립과 동시에 새로운 정책을 내세운 정치개혁에 나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삼진의 하나인 위(魏)의 최초의 군주인 문후(文候)다. 이렇게 새로 나타나 삼진과 전제의 군주들은 본래 신하 가문의 호족이 주군 자리를 찬탈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도덕적으로 깊은 죄의식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면서 종래 자신과 관계있던 귀족이나 관료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귀족보다는 더욱 광범한 대중의 인기를 얻어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정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제(齊)와 진(秦)의 흥성과 대립

춘추전국의 과도기를 대표하던 월(越)이 쇠퇴하고 전국시대에 들어 위(魏)의 중원문화가 패권을 장악하여 전성기를 맞이할 시기에 제나라 또한 전제(田齊)의 위왕(威王)이 국왕 자리에 올라 급속히 세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기원전 353년 위나라 군대와 계릉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한 결과, 패권은 서방의 위나라에서 동방의 제나라로 넘어갔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싸움은 기원전 343년 마릉의 격전이었다. 제는 비범한 군사인 손빈(孫臏)을 등용하여 그의 교묘한 작전으로 마릉의 싸움에서 대승하였다. 따라서 기원전 333년경까지는 대체로 동방의 제가 위를 압도하여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를 전후하여 제의 위왕이 여세를 몰아 북방의 현재 북경 지방에서 다른 나라와 떨어져 고립되어 있던 연燕을 공격하여 한때 정복하는 등 중원에서 마음대로 세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기원전 330년 무렵부터 서방(섬서성)의 진秦이 점차 중원으로 진출해 들어왔다. 상앙의 변법으로 진은 점점 동진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동방의 제와 서방의 진이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문화

제나라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통틀어서 꾸준히 강국의 위상을 이어나갔고 물산이 풍부했던 만큼 문화와 사상 면에서 매우 발전했던 나라이다. 특히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와 손빈, 사마법으로 알려진 사마양저, 그리고 화우지계의 주인공인 전단 등 유명한 병법가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이다. 뿐만 아니라 관중, 안영과 같은 명재상들 또한 제나라 출신이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수도 임치에 직하학궁을 세워 많은 사상가들을 모아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도록 후원하였는데 그 가운데 제자백가를 대표하는 맹자가 유명하며 그와 논쟁을 나눴던 사상가들도 제나라에 근거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