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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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관중(管仲)에 대한 평가는 보통 포숙과의 관계에서 우정의 대명사로 두 인물 중 한명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관중과 포숙은 동향 사람으로 함께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이익을 나눌 때 관중이 더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것을 알고 관중을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가 반영하듯 관중은 젊어서부터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가난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상업을 택하기도 했다. 또한 관중은 일찍이 세번이나 출사했지만 매번 주군으로부터 쫓겨났으며, 춘추시대 전투에서도 도망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장사, 모사, 출사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실패한 경험들을 토대로 관중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아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관중이 보기에 백성들이 못 사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었고 실력있는 사람들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 또한 직접 경험했으며, 자신이 그랬듯 전투에서 도망가는 것도 죄인의 행위가 아니라 전투 외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았던 정치가였다.

관중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물자의 유통을 방해하지 않으면 어떻게 상업이 흥하지 않겠는가?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여 쓰지 않고 오직 공이 있는 사람을 쓴다면 어떻게 인재가 버려지겠는가?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뒤를 봐준다면 어떻게 용기를 발휘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다 비슷해서 모두 부귀와 안락을 원하지만, 국가가 이를 채워주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한다면 누가 반감을 갖지 않겠냐며 자신의 기본 사상을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근간으로 구축한다.

설화

관중의 출생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관중의 어머니 곡씨는 출가한 지 9년이 되어서도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간신히 아이를 가졌다. 그렇게 하여 관중은 5월 5일 정오에 태어난다. 점쟁이의 사주에 의하면 아이가 다섯개의 오(午)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용 아니면 호랑이로 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부모가 관중의 선생에게 출생의 내력을 알려주고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선생은 "태어날 때 다섯 개의 오시(午時)를 품었으니 크게 길합니다. 성이 관(管)이니 이름을 종(種)이라 하지요. 천하의 씨 뿌리는 백성들을 관장하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설화에 나오는 관중의 이름과 호에 대한 설명은 크게 설득적이지 못한 반면, 나머지 부분에서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 관중은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이었다. '씨 뿌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말은 관중의 경제사상이 기본적으로 기층 인민들의 이해에 부합했기 때문에 얻은 명칭이었고, 농사가 경제를 담당하던 시절 농민들이 관중에 대해 느끼는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생애

관중은 지금의 안휘성 영상에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청년시절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상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대의 상인은 지금과 달리 제사 때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공급하는 것에서 출발했으며, 관중과 포숙이 이 때 함께 장사를 한 경험은 훗날 제나라 공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 물건을 대는 일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출세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출사 시도를 하지만, 출신이 좋아야 출세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로 인하여 시도는 무산되었다.

또 다른 일화로는 포숙에게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포숙을 정계에 진출시키고자 시도하다가 오히려 상황이 꼬였지만, 포숙은 이 때도 어리석다고 비판하지 않았다. 또한 춘추시대에 전쟁이 일어났을 시 관중이 전투에서 도망가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포숙은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포숙과 관중의 지극한 우정을 보여주기도 하며, 관중의 사상이 구축되기까지 개인의 삶에서 어떤 실패들을 경험했는지 보여준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이 즉위하기 전, 권력 투쟁에서 환공의 형인 규의 편에 섰으나 패하여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포숙이 환공에게 관중을 등용할 것을 제안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기용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유래하게 된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우정에 대해 언급하였다. 사마천은 이러한 사건을 관중의 현명함보다는 포숙의 사람 보는 능력이 더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같이 규 공자의 편에 섰던 소흘은 자결하였으나 환공의 편에 서게 된 것을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규 공자가 패하자, 소홀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할 때에도 포숙아가 나를 치욕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치욕을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주군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믿고 자신이 따르는 주군을 스스로 춘추전국시대의 패자로 만들겠다는 자신감과 야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오판을 포숙아의 도움으로 넘긴 관중은 환공을 도와 군사력을 늘리고 상업과 수공업의 육성이라는 현실적인 정책으로 부국강병을 꾀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정책은 사기에 기술되어 있는 관중이 겪었던 좌절에서 비롯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상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실패했던 관중의 경험이 오히려 현실적인 감각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다지는 기반이 된 것이다.

정책

관중은 정치에 있어서 인치와 법치를 중시하였다. 먼저 널리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쓰는 것이다. 또한 법을 명확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행위의 준칙을 명백히 밝힌다. 훗날에 관중이 법가의 태두로 숭앙받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관중의 이 사상은 전국시대의 법가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인치를 주장하며, 백성들에게 행위의 준칙을 명백하게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의 기본이며 개혁 또한 이 위에서 시작되어야한다고 보았다.

경제

관중의 통치는 경제학적인 기반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치가들과 핵심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통치의 기초는 백성들의 생업의 기초를 잡아주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였을 때 비로소 정책을 시행할 수 있으며 책임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 분업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옛날 성스러운 왕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국도를 셋으로 나누고 지방을 다섯으로 나누어 백성들의 주거를 정해주고, 그들이 자신의 사업을 이루도록 하며, 죽으면 그 무덤을 만들어준 후에야 육병을 조심해서 사용했습니다."

백성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주 구역을 확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농,공,상의 거처를 분화하여 산업을 특화시켜야하는 것이다. 이는 주례의 신분질서와 차이가 있는 반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속 분업이론과 더 닮은 특징을 보여주는 정책이다. 사(士)는 귀족으로 이들의 주된 역할은 가장 어려운 전쟁이다. 그러나 이들이 경제적 이득에 더 집중하게 되면 본업인 국방을 등한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지식노동자나 군인들은 그들끼리 경쟁하게 하여 지식과 투지를 기르고, 기술자들은 기술을 교류하게 하여 생산력을 높여야한다. 상인들의 경우, 시정에 모여 살게 하면 그들이 사계절의 수요를 파악하여 물건을 퍼뜨리고, 자제들에게 가격과 장사의 이치를 가르쳐 자식들도 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중은 농민들의 노동을 극히 존중했는데, 이들의 고된 노동을 칭찬하며 이들 중에 능력있는 사람들을 선발하면 참으로 믿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관중이 원하는 인재상이 반영된다. 이렇듯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일에 만족한다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며, 이를 통해 나라가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관중은 노동생산성을 국력의 척도로 보았으며, 국력의 신장을 분업과 클러스터를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이 방식을 통해 지식, 농업, 공업, 상업의 생산성을 동시에 늘릴 수 있었다고 보았으며, 농업을 위주로 하되 공업과 상업도 국가의 근간이 되게 하고자 하였다.

행정

행정면에 있어서는 행정체제와 군사편제를 결합하여 행정력의 낭비를 줄이고자 했다. 삼군의 통치권과 일상의 정치를 결합한 체제는 향후 2500년동안 변하지 않는 중국 행정·군사 조직의 핵심이 되었다. 또한 관중은 군사간의 사기와 친밀도가 강병의 요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대로 차용되었고, 춘추 두 번째 패자인 진나라는 이 사상을 기반으로 야인들로도 부대를 편성한다. 전국시대의 개혁가들은 관중의 제도를 약간 수정하여 징병 대상을 아예 전국적으로 확대했고, 전국의 장정들이 군인이 되는 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맹자를 비롯한 후대 유학자들은 관중의 이러한 정책이 전쟁의 실마리를 남겼다며 비판했다.

외교

외교적으로는 ‘규구의 회맹’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환공을 패자로 올려놓았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던 현실주의적인 면모는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라고 말하며 강자란 무릇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특히 사마천은 관중이 가지고 있었던 ‘민중’의 개념에 집중하며 그의 정치철학에 대해 잘 나타내고 있다. 관중은 정책을 입안할 때 “민중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베풀어 주고 민중이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뜻대로 제거해주었다”.

관중은 힘이 아닌 정치로 천하를 제패했다. 이는 신뢰정치로 가능했던 것이며, 강력한 초나라와 서방의 나라들을 제압하게 하는 결과도 낳았다. 관중은 국제관계를 이해했고 신뢰정치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민족간의 평등이 아닌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제나라의 부유함을 기반으로 중원의 구심점이 되었고 패권국이 되어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당시 춘추시대의 질서는 힘을 기준으로 하되 군사적인 무한경쟁은 배제하는 특이한 국제관계 체제였는데, 이후 관중의 사상이 당시 국제정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평가

관중은 춘추시대에 경제체제, 행정, 군사, 법률, 외교 등 모든 방면의 질서를 세운 사람이었다. 관자 문집이 나오게 된 것도 관중의 행보가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농공상의 분업, 시장의 활성화, 국제무역, 농지개간, 세제개혁, 중앙과 지방 행정체제 확립, 삼군제도의 정비, 법령의 집행방식 확립, 존왕양이와 회맹질서의 수립은 모두 관중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고 후대의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 감각을 기반으로 한 정치와 경제개혁은 제 환공을 춘추오패에 올려놓았고, ‘주는 것이 정치’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백성들의 생산활동을 장려한 정책은 실질적인 민본주의 사상으로써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를 당시 최고의 부유한 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세가로서의 관중의 행적에 대한 후대 유가의 평가에는 상반적인 내용 또한 있다. 순자는 "관중이 정사를 할 줄 아는 자이지만 예를 닦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를 닦는 자는 왕자가 되고 정사를 할 줄 아는 자는 강력해지며 백성을 취하는 자는 편안해지고 백성의 재물을 뺏는 자는 망하게 된다"고 하며 찬양과 비판이 교차하는 평가를 하였다. 맹자는 관중이 전적으로 임금의 신임을 받고 오래도록 국정을 맡았지만 공적은 보잘 것 없다며, 자신을 관중에 비교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는 '왕 노릇보다 강한 자를 만든' 결과 등 유가적 이상을 벗어난 동기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강한 군주와 나라를 만들어낸 부국강병과 물리적 폭력에 초점을 맞춘 통치기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위즈덤하우스, 2010.
윤대식, 『경세가 관중(管仲)과 텍스트 '관자(管子)' 사이 - 왕패(王覇) 개념 분기 이전 패(覇)의 실질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정치사상연구 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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