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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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覇)란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제국간 혹은 제후간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패자들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긴 했지만 주 왕실을 쓰러뜨려 천하를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고 주나라 왕을 정신적인 지주로 인정하던 시대임을 보여준다.

춘추시대는 평왕이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된다. ‘춘추(春秋)’시대는 공자가 지은 『춘추』가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 사이의 역사를 싣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춘추시대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져 천자의 위력이 없어지고 제후들이 강성해져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는 시기이다. 차례로 다섯 제후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를 춘추오패라 한다. 춘추오패는 제(齊)나라 환공, 진(晉)나라 문공, 진(秦)나라 목공, 초(楚)나라 장왕, 오(吳)나라 부차, 월(越)나라 구천 가운데 5명의 군주를 지칭한다.

춘추오패

제환공(齊桓公)

제나라는 춘추시대때 제일 먼저 패권을 잡은 나라이다. 제나라는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으며 소금을 생산하던 국가였는데 당시에 소금은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기 때문에 제나라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졌다. 제환공은 노나라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제나라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빨리 귀국해 곧바로 왕이 되었다.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귀국하는 환공을 보필하던 것이 포숙아 였는데 환공은 왕이 되자마자 노나라를 공격해 정복한다. 그리고 노나라의 제상이었던 관중을 승상으로 임명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관포지교의 말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후 환공은 주나라 왕의 명을 받아 회의를 한다는 통지를 보내었다. 그러나 제 환공의 명망이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모인 나라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진문공(晉文公)

진나라는 중원 국가에 속한 나라로 실력을 갖춘 강국이었다. 그래서 제환공이 죽고 패자 자리를 경쟁할 때, 초나라는 실력은 갖추었지만 이민족의 변방 국가로 중원의 리더가 되기엔 부적절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패업을 이어 제후들을 통제, 지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 패자가 된 군주는 진문공(晉文公)이며 이름은 중이(重耳)였다.

진나라가 패업을 잇기 전, 진나라는 내정 문제에 휩싸여 중이(重耳)는 외국 망명길에 있었다. 그는 예순의 나이가 넘도록 여러 나라를 유랑하며 푸대접과 환대를 모두 받았다. 그러다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 진(秦)목공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후원하여 다시 왕이 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진(晉)문공은 패자가 된 뒤 그를 푸대접한 조, 송, 정나라 등의 제후들에게 보복하고, 환대 받은 나라에겐 그만큼의 보답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19년 만에 돌아온 진나라의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힘쓰며 대신들의 마음을 되돌리려 노력했다. 그에게는 좋은 인복으로 개자추 같은 많은 충신이 따랐으며, 이후 초나라와의 전쟁도 환대의 보답인 3사 퇴보를 지키며 승리하였다. 재위기간은 10년이었지만, 그의 업적들은 진(晉)이 진시황에 의해 통일 될 때까지 진나라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성복 전투

진목공(秦穆公)

진(秦)나라는 중원 문화권 밖에 존재한 오랑캐 국가였다. 진나라는 서쪽 변방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나라의 규모가 점점 켜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중원 문화권의 나라들보다 낙후돼 있었다. 경대부를 분봉해주는 제도가 수립되지 않았고, 군주를 이을 적자 계승 제도도 완전히 정착되지 않아 귀족간 갈등을 일으켰다. 이렇게 진나라는 문화 수준에 더해서 국력 수준까지 패업을 잇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런 진나라를 중원의 제후국이 되게 한 탁월한 군주가 나타났는데, 그 군주는 바로 진 목공이였다. 그는 진나라에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가 부족하다 생각했으므로, 재위 초부터 다른 나라에서 인재를 초빙하고자 했다. 그는 왕임에도 자신이 직접 관여하기보다, 그 인재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우나라 사람 백리해는 출신이 매우 빈천하였지만, 진나라를 일으킬 인재라 확신하였고, 백리해가 추천한 건숙이라는 자와 함께 좌우 승상을 맡게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나라 내정이 개혁되고 농업 생산력도 증가하여 진(晉)나라도 원조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아들들은 진나라 군대에 영입되어 진나라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데 활약하였다.

초장왕(楚莊王)

초나라는 진(晉)과 같이 중원 문화권 밖의 남방 오랑캐가 세운 나라였다. 하지만 진(晉)보다도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원 민족과 가장 먼 나라였다. 오히려 진나라는 가급적 중원의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지만, 초나라는 사사건건 중원의 일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중원의 제후들이 초나라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초나라 제후는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주나라 왕과 동일해지고자 하였다. 이렇게 다른 패자들과 달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지 않으며 존왕양이와 상관이 없는 태도를 취하였다. 일례로, 주왕이 보낸 사자에게, ‘왕실의 솥이 얼마나 크고 무겁냐?’고 질문을 던진다. 당시 솥이 왕위 계승을 상징했음을 떠올리면, 주 왕실의 존재를 얕보고 전혀 섬기려 하지 않았던 초 장왕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제 환공은 존왕양이하지 않고 칭왕(稱王) 하는 초나라를 징벌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패자였던 제 환공도 초나라를 막지 못하고 조약을 맺는 정도에 그친 것에서, 초나라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송과의 전투에서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진(晉)과의 전쟁인 성복지전에서는 패배했으나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 이후에 진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크게 승리함으로써 초나라는 진(晉)나라 이후 패권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

진(晉)과 초, 제와 진(秦)이 각각 중원에서 견제하는 4강의 시대 무렵, 중원 남쪽에서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동남의 오랑캐라는 멸시를 받다가 춘추시대가 되어서야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복수로 얽힌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뽑을 수 있다.

당시 오는 오자서와 손무를 요직에 임용하여 초를 수차례 공격해 초의 수도를 함락시켜 그 기세가 엄청났으며, 월은 왕 윤상이 흩어져 있는 월나라 계통의 부족을 모아 큰 성장을 이룬 나라였다. 세력 확장에 욕심을 내던 오왕 합려는 월왕 윤상이 죽자 월을 공격한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받은 구천은 윤상 못지 않은 인물이었다. 구천은 자살부대를 투입해 오나라 부대를 당황시킨 뒤 그 틈을 타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합려는 부상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왕 자리를 물려받은 부차는 매일 가시나무를 깔고 자며 복수를 다짐한다. 부차가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은 범려의 만류를 무시하고 오나라를 선제 공격한다. 하지만 월나라가 패하고 구천은 죽을 위기에 처한다.(오의 부차가 패자가 되었다.) 그는 오왕 부차에게 자신의 아내를 첩으로 주고 자신은 심복이 되는 조건과 엄청난 뇌물을 주는 조건을 제시하며 강화를 제안한다. 이 조건에 만족한 부차는 강화를 허락하고 구천은 부차의 밑에서 5년간 일하게 된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이는 매일 복수를 다짐하던 구천을 지나치게 믿은 실수였다. 구천은 월나라에 돌아간 뒤 매일 쓴 쓸개를 맛보며 오에서 당한 굴욕을 갚겠다는 다짐을 한다. 여기서 와신상담이라는 성어가 유래되었다. 그는 국력 회복과 인구 증가 등을 돌보며 설욕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오왕 부차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제를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제를 치지 말고 월을 경계할 것을 신신당부했으나 자신감에 가득 찬 부차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 오자서의 반대 세력이었던 백비의 모함으로 오자서는 자살을 명령 받게 된다. 그 뒤 월은 오에 대한 설욕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오왕 부차는 월에게 강화를 요청하고 월은 받아들이지만 강화를 맺은지 4년뒤 월은 다시 오를 공격하고 오의 수도를 포위한다. 그 결과 부차는 월에 항복하고 자결을 하는 것으로 이 복수에 대한 복수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