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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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출생 B.C 259년
조나라 수도 한단
사망 B.C 210
생존시기 전국시대 ~ 진나라

개요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으로 진나라 소양왕의 증손자이자 장양왕의 아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다. 최초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후 중국역사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의 통일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통일 이후, 문자,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일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통일 이후에는 만리장성아방궁, 병마용갱 등을 건설하여서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지게 하였고 이런 가혹한 토목 공사와 법체계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계기로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진시황 (秦始皇)이름의 기원

천하를 통일한 정은 기왕의 왕이라는 호칭이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자신에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낸 것이다. '황(皇)'은 전설상의 위대한 성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제(帝)'는 하늘의 신이라는 뜻이었으니, 이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의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심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왕의 사후에 신하가 그 왕에 대한 '시호(詩號)'를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 여겨,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시황제'라 불렀다.[1]

생애

유년시절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전국 칠웅이라 불리는 7개의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 혼란기에 각 나라는 서로의 신의를 표하기 위한 외교행위로 왕족을 볼모로 보내는 관행이 있었는데[2]진시황의 아버지인 영이인(훗날의 장양왕)는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당시 조나라는 장평전쟁 이후 진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진나라 안에서의 영이인는 권력과 거리가 아주 먼 왕족이었다. 당시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 있던 대상인 여불위는 영이인을 보고는 그에게 후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여불위진나라로 사람을 보내 교섭에 착수한다. 영이인의 아버지인 안국군과 그의 정부이지만 자식이 없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여 영이인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한다. 여불위의 노력 끝에 영이인은 ‘자초’라는 이름을 받아 영자초가 되고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어 안국군의 후계자가 된다.
당시 영자초는 여불위의 집을 방문하고는 그의 첩인 조희에게 반하였는데,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진시황이 사실은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냐는 설도 존재하지만 소양왕 48년인 기원전 259년 조희에게서 진시황 영정이 태어난다. 이로부터 2년 뒤인 기원전 257년 소양왕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 왕은 영자초를 죽이려 하지만 영정과 조희를 남기고 영자초만 탈출하게 된다.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사망하자 안국군이 효문왕에 오르고 그의 아들인 영자초는 권력의 핵심이 된다. 효문왕이 곧 사망하자 영자초는 장양왕이 되고 그의 아들인 영정은 태자가 된다. 하지만 장양왕도 얼마가지 못하고 사망을 하게되고 영정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나라의 왕에 오르게 된다.

집정 이후

13살에 왕이 된 진시황은 승상 여불위를 위시한 대신들에게 섭정을 맡기게 된다. 하지만 22세가 될 무렵, 노애의 반란을 계기로 책임을 물어 여불위를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게 된다. 여불위와 그 일족을 처단하고 초나라 출신 객경 이사를 발탁해 재상으로 삼는다. 이사는 각국에 간첩을 보내 군신을 이간시키고 뒤에 군대를 파견해 신속히 열국을 평정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진시황은 그의 계책을 실행에 옮겨 육국 평정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전국통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전국 통일은 진시황만의 업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데, 상앙의 개혁 이후 진나라는 여러 왕들을 거치며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진시황은 다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은 얹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진시황이 나라를 멸망 시키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기원전 230년 한을 멸했고, 기원전 228년에는 조를 공격했으며, 기원전 226년에는 진의 장군 왕전(왕졘)이 병력 60만을 이끌고 초를 공략하니 초는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222년은 연왕을 사로잡고, 대로 도망가 왕 노릇하던 조의 공자 가를 사로 잡으니 연과 조나라 역시 망하고 말았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가 망하자 천하는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진시황은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총 걸린 시간이 1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진시황의 통일 정책[3]

군현제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뒤 즉시 권력의 집중을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신생통일 국가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왕족과 공신들에 대한 분봉을 시행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이사의 주장대로 군현제를 시행했다. 이에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을 두었으며, 그 장관인 군수와 현령은 중앙에서 파견했다. 이들은 중앙에서 봉급을 받는 관리로서 세습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울러 중앙 정부의 기구는 황제 아래 행정·사법·감찰의 최고 책임자로 승상(丞相)·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라는 이른바 ‘삼공(三公)’을 두었다. 삼공 아래에는 구체적인 정무를 담당하는 ‘구경(九卿)’을 둠으로써 모든 정치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이로써 황제의 명령이 말단에까지 이르는 전제주의적 중앙 집권 국가 체제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각종 제도와 관습에 대한 통일

각국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했던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후 화폐 역시 이때 처음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화폐인 ‘원형방공(圓形方孔)’이라는 양식이 등장하였다. 또한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하에서 주고받는 모든 문서 행정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 그때까지 제멋대로이던 글자체를 이사가 고안했다는 '소전체(小篆體)'로 통일했다.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예고된 몰락[4]

아방궁여산릉

진시황은 중국 최초의 황제라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건축물을 계속 세워나갔다. 수도 셴양 부근에 화려하고 웅대한 아방궁을 지어 인간 상제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를 대비해 여산(驪山)에 자신의 능침을 조성하였다. 그 능침의 내부는 수은으로 백천과 강하, 대해를 만들고 위에는 천문을 아래는 지리를 갖추었다. 기록에 의하면 아방궁여산릉을 건축하는 데 70여만 명이 동원되고 건축 자재는 전국에서 징발했는데,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제국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방궁은 진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작은 산만한 여산릉(리산릉)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로 본격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진시황의 능묘를 지키기 위해 조성한 병마용(兵馬俑)은 우연한 계기로 발견되었는데, 현재 발굴된 도용 역시 그 일부에 지나지 않고 현재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으로 시황제의 절대 권력이 얼마나 강대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진의 장성(만리장성) 축조

전국시대가 끝나고 진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단결하여 흉노 민족을 결성하고 진에 대항했다. 이에 진시황은 노장군 몽념(蒙恬)에게 태자인 부소(扶蘇)와 함께 흉노를 격퇴하게 하고 옛 육국이 쌓아올린 장성을 보수하는 한편 서로 연결해 약 5,000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했다. 진시황이 새로운 제국을 수립한 뒤 시행한 여러 토목 공사 중 장성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국력과 민력을 낭비시키고 백성의 많은 불만을 사게 됐다는 부작용을 낳았다.

말년

진시황 37년, 진시황은 다섯 번째 순행에 나섰다. 이 순행에는 아들 호해조고 그리고 승상이었던 이사가 동행하였다. 하지만 황하를 지나 사구에 도착했을 때, 진시황의 병세를 크게 악화된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던 진시황은 급히 후사를 결정하는 유조를 내린다. 다음은 사기 <진시황본기>에 있는 유조의 부분이다.

평원진에 이르러 병에 걸린 시황제가 죽음을 거론하는 것을 싫어하니 모든 신하들이 감히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시황제는 병이 더욱 깊어진 후 공자 부소에게 "함양에 돌아와 상을 치르고 장례를 행하라"고 조서를 내렸다.[5]

이 때, 이 유조를 듣고 있던 인물들은 호홰와 승상 이사, 그리고 조고였다. 조고는 이사와 호해에게 유조를 위조한 다음 원본을 없애자고 설득을 하였다. 이를 '사구의 음모'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장자 부소와 몽염은 자결을 하게 되고 막내인 호해가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다. 호해가 즉위한 뒤, 진승이 반기를 들고 진 제국은 이내 멸망하고 만다.

평가

분서갱유에 대한 오해

흔히들 진시황의 악행을 말하면 분서갱유를 손꼽는다. 분서를 통해 서적의 유통을 막았고, 갱유를 통해 유학자 등의 지식인들을 탄압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상을 알고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우선 분서의 경우 후대에 이르러 과장된 것들이 많다. 진시황은 우선, 모든 서적들을 불사르지 않았다.[6] 진시황은 다른 제후국들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일반 사회과학 서적들은 민간의 소유만 금지했을 뿐, 국가 도서관에는 남겨두었다. (오히려 진나라를 멸망 시키고 황궁을 3개월 동안 불태웠다는 항우의 죄가 더 크지 않을까?) 또한 왕조가 바뀌면 사상을 통제하는 것은 진시황 때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많이 일어났다.청나라의 문자의 옥 또한 분서와 같은 사상 통제의 일환이었다.
갱유 또한 일반적으로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매장 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생매장 시킨 460명의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흔히 말하는 유학자들이 아닌 도사라 칭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진시황제의 불로불사의 꿈을 이용해 많은 돈을 받아낸 뒤 그를 속여 농락하였다. 즉 갱유를 당한 사람들은 진시황을 속인 사람들이지 그저 학문의 길을 걷는 학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청나라 때의 학자인 양옥승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분서갱유를 진 시황제의 죄악으로 단정하는 세상의 논단에 대해 나는 항상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생매장 당한 자들은 대부분 도사이며 진 시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했던 일부 지식인들이었을 것이다.[7]

진시황은 꼭두각시의 인생을 살았다?[8]

사식이라는 중국의 학자가 쓴 『황제들의 중국사』라는 책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시황에 대한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말한다. 일반인들는 진시황이 포악하고 독재자이며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나라를 다스린 사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식은 그런 진시황의 기질을 부정한다. 바로 진시황이 늘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꼭두각시의 인생을 살았다는 주장이다. 처음 주장은 진시황여불위의 투기 상품이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물론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인지 장양왕인지에 대한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여불위의 자식이라면 여불위는 자신의 친자를 아무도 모르게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렇게 투기의 대상이었던 진시황장양왕이 죽고 왕이 된 이후에도 꼭두각시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장양왕을 왕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이유로 승상이 된 여불위의 통제를 받게 된다. 재위에 오를 당시의 나이가 13살이었기에 국정을 행함에 있어 진시황은 크나큰 제약이 있었다.
사식은 노애의 반란이후, 여불위가 실각을 하고 난 뒤에도 진시황에 대한 통제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시황이 친정을 하게 된 이후에도, 진시황이사의 꼭두각시로 살았다는 것이 사식의 주장이다. 여불위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대놓고 진시황을 통제하면서 살았다면, 이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시황을 통제했다. 사마천이 쓴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사의 제안에 의해 행해졌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게 된 것도 이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축객령진시황에 의해 내려졌을 때, 간축객서를 통해 진시황축객령을 철회하게 만든 것도 이사이다. 분서갱유를 실시할 때도 분서를 하고 갱유를 하도록 의견을 올린 것도 이사이며 진시황은 이를 채택했다.

진시황은 사후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일들이 흘러가지 않았다. 순행하던 도중 사망한 진시황은 자신의 큰 아들인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진시황이 사망할 당시 진시황의 옆에 있던 이들은 둘째아들인 호해이사, 그리고 조고였다. 진시황의 유언은 이들에 의해 조작이 되었고 부소는 자살하게 되었으며 결국 진나라는 망하게 된다.

  1. 조관희 지음,『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출판, 2011, p.112
  2.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본기』, 민음사, 2012, p.275
  3. 조관희 지음,『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출판, 2011, pp.112-113
  4. 조관희 지음,『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출판, 2011, pp.115-116
  5. 리카이위엔 지음, 하병준 옮김, 시공사, 2010, p261
  6.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사기 교양 강의』, 돌배개, 2014, pp38~39
  7.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사기 교양 강의』, 돌배개, 2014, pp40~41
  8.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황제들의 중국사』, 돌배개, 2005, pp.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