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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사 평론가인 소산내굉(小山內宏)은 이렇게 『[[손자병법]]』을 평가했다.
 
일본의 군사 평론가인 소산내굉(小山內宏)은 이렇게 『[[손자병법]]』을 평가했다.
 
{{인용문|“『손자병법』은 전략론일 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품은 전쟁철학이며, 심지어 현대 전략전술에도 대단히 훌륭한 계시를 준다.”(『현대전략론』 1972년판)}}
 
{{인용문|“『손자병법』은 전략론일 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품은 전쟁철학이며, 심지어 현대 전략전술에도 대단히 훌륭한 계시를 준다.”(『현대전략론』 1972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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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몽룡의 <<東周烈國志>>에 나타난 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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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무에 대한 역사기록은 양적인 면에서 매우 소략하다. 게다가 남아 있는 자료들은 간략한 줄거리만을 전하고 있을 뿐 손무라는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군사가로서의 재능이 얼마나 특출 했는지에 손무라는 인물 본연의 형상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풍몽룡이 ≪동주열국지≫에서 그려낸 손무의 형상에서는 손무답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교묘한 수사 전략이 성공적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존의 기록과는 달리 ≪동주열국지≫에서 손무는 역사사건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풍몽룡은 손무의 일대기를 그리기 위해 문헌기록을 최대한 이용했다. 배후 인물인 [[오자서]]를 ‘중도적(中道的)인물’로 설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동주열국지≫에서는 손무를 이야기할 때 오자서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는데, 손무가 오왕 합려의 장수가 되고, 전장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초]]나라 정복에 성공한 후 다시 [[오]]나라 장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손무는 [[오자서]]와 늘 함께 한다. [[오자서]]는 손무가 자신의 용병술을 제대로 증명해 보일 場을 마련해 준 인물이기도하며, 손무의 능력이 더욱 돋보이도록 대조 효과를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오자서]]를 ‘중도적 인물’로 설정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손무의 이면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여 손무가 [[오자서]]보다 장수로서 더 적절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 의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풍몽룡은 손무를 손무답게 만들어 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손자병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손무의 대활약 곳곳에 ≪[[손자병법]]≫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손무의 이미지를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었다. 특히 손무가 주장했던 장수의 다섯 가지 덕목, 즉 장수의 지모(智), 위신(信), 인자함(仁), 용감함(勇), 엄정함(嚴)44)은 풍몽룡이 묘사한 손무의 형상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소설 속에 묘사된 손무의 형상은 작가가 성명한 것처럼 모 두 사실에 근거한 진실은 아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조작된 사실과 역사기록에 부합하지 않는 오류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역사 기록의 공백은 작가가 의도된 허구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었고, 풍몽룡은 필요에 따라 완벽한 허구로 설득력 있는 손무의 인생결말을 창조할 수 있었다. 사실, 역사와 문학, 허와 실, 사실과 거짓은 상충되고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풍몽룡은 이 두 개념을 적절하게 이용했을 때에 손무라는 인물 안에서 허구와 사실 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완벽한 허구이고 거짓이라 해도 정황적으로 그 진실성이 전달되면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오사(五事)”라고 한다. ≪[[손자병법]]ㆍ시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교묘하게 이용했다. 손무의 인생결말이 대표적인 예인데, 손무가 보여준 지략이나 선견지명의 연장선상에서 손무의 최후는 재창조되었으며, 의도적으로 변형하고 첨가한 줄거리에서 풍몽룡을 비롯한 당시 민중들이 바라는 장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이를 통해 전쟁터의 영웅이 전쟁터를 떠나서도 지혜로운 인생을 산 영웅으로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풍몽룡의 문학적 기교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손무는 누구보다 병법에 통달한 장수였고, 공수신퇴의 도리를 아는 정치가였으며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인간이었다. 또한, 난세에 휘말리지 않고 지혜롭게 산 진정한 병법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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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4일 (토) 14:59 판

손무(孫武)

출생 B.C 545
제(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惠民縣)
사망 B.C 470
생존시기 춘추시대
주요 작품 손자병법(孫子兵法)

개요

중국 춘추시대 군사 전문가. 주요 활동시기는 오(吳)나라 합려(闔廬, B.C 514 ~ B.C 496) 시대부터 그의 아들 부차(夫差, B.C 495 ~ B.C 473)의 재위 전기(前期)에 이르고 있다. 주요한 공헌은 먼저 『손자병법』을 남긴 것이고, 다음으로는 협려를 도와 를 격파한 것이다.

생애

자는 장경(長卿)이다. 손자(孫子)는 경칭이며, 한국에서는 이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齊)나라 낙안(樂安, 山東省) 사람으로 전완(田完)의 후예다. 성장과정에서 제나라 시조인 강상(姜商, 즉 姜太公)의 용병모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손무는 병법에 큰 관심을 보였고 검술도 잘 했다. 기원전 532년, 제나라에 전(田)·포(鮑)·난(欒)·고(高) '4성의 반란'이 터졌고, 손무의 집안도 이 정치투쟁에 휘말렸다. 이때 손무는 가족을 따라 (吳)나라로 이주했다. 이후 20년동안 은거하며 춘추시대 2백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경험과 교훈을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하였다. 그뒤 오대부 오자서의 추천을 받아 "병법으로 오왕 합려(闔閭)를 만났고, 이어 장군에 임명되어 오가 를 격파하는 전쟁에서 중대한 공을 세웠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나라를 공략하던 중에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부차가 즉위했다. 손무는 계속하여 부차를 보좌하고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나이가 든 후 손무는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군사학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손무, 오왕 합려를 만나다

당시 나라는 서쪽의 (楚)나라와 원수지간의 관계에 있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나라가 나라를 침공하고 실패하면 이듬해는 반대로 나라가 나라에 쳐들어갔으며, 이러한 공방은 오랫동안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14년 오나라에서는 정변으로 왕요가 암살되고 새로운 왕으로 합려가 즉위했다. 먼저 합려는 크게 약화된 군사력을 강화시킬 적임자를 찾던 중 마침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합려는 손무를 초빙하여 실력을 테스트하고 기용했다. 이때 손무가 궁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병법의 효험을 시범 보인 일화는 유명하다.

손무는 180명의 궁녀들을 두 부대로 나누어 집합시키고 그 가운데서 왕의 총애를 받는 두 사람을 지휘자로 임명하여 지휘하도록 했다.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로 방향전환 동작을 취하는 시험이었다. 사전에 동작 요령을 충분히 알려주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도끼로 처형한다는 규칙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손무는 다시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궁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손무는 "명령이 불명확할 때는 장수가 책임을 지지만 반복하여 명확히 설명했는데도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지휘자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형수를 시켜 두 지휘자의 목을 쳤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새 지휘자로 임명하고 명령을 내렸더니 궁녀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다

손무는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위임받은 후 엄격한 훈련을 통해 나라 군대를 4년 만에 막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512년 나라는 숙적 나라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손무는 단계적 교란작전을 통해 나라 국력을 피폐시키고 6년 후 정예병 3만 명을 직접 이끌고 기습침공, 적의 수도 70km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집결된 20만 명의 적 병력을 보자, 그 대병력을 분산 격파하기 위하여 다시 200km 후퇴하여 적을 유인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손무 군을 무작정 추격하던 나라 군대는 결국 함정에 빠지고 여러 지역에서 역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오자서와 함께 나라를 정벌하여 ‘오전오승’한 손무는 이번에는 승세를 몰아 의 수도 영도를 공격하려 함락시켰다. 그 결과 왕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약소국 나라는 일약 강국으로 등장하고, 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다른 인접국인 · · 나라 등에 대해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시공을 초월한 병법서 <<손자병법>>

손자병법의 구성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최고의 군사 지침서로,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 승패의 기미와 인사의 성패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손자병법은 손무의 군사 이론서로 손무가 나라 장군에 임명되기 전에 완성되었다.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며, 내용은 넓고 깊다.분량은 6천 400백여 자에 지나지 않지만 총 열 세편으로 군사과학 각 분야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첫 번째 편(始計)은 전쟁을 하기 전 깊이 생각해야 할 원칙과 계획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두 번째 편(作戰)은 전쟁에서 車費문제와 동원, 보충 등의 계획에 대하여 논하였고,
* 세 번째 편(謀攻)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 네 번째 편(軍形)은 攻守의 태세에 관하여, 다섯 번째 편은 兵勢에 대하여, 여섯 번째 편(虛實)은 전쟁의 주도성을 파악하는 데 대하여 논하고 있다.
* 일곱 번째 편부터 열한 번째 편 軍爭, 九變, 行軍, 地形, 九地들은 모두 실전에서 유리한 상태를 확보하기 위한 전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 나머지 열두 번째 편은 火攻에 대한 논의를 하고있고, 열세 번째 편(用間)은 간첩에 관한 문제를 논하며 끝을 맺고 있다.

손자병법에 나타난 주요 사상

승전후구전(勝戰後求戰) 사상 : 먼저 승리한 다음 싸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 사상 :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치인이불치우인(致人而不致于人) 사상 : 잘 싸우는 사람은 상대를 끌고 다니지, 상대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 사상 :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다

손자병법의 전체적인 내용과 사상으로 볼 때, 그 특색은 결코 호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손자병법의 내용은 실전에서 얻어진 전술의 결과물임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내용과 전술이 전쟁에만 국한 되는 기술로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인생의 처세 문제 까지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활용도가 높다. 제나라는 관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제나라의 실용주의적 분위기는 그대로 손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손자의 전쟁철학은 기본 노선이 실용주의에 기초를 하고 있다. 손자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상처뿐인 승리보다는 상처 없는 이익을, 원칙보다는 변칙을 더욱 중요시 한다. 손자는 단순히 이기기 위한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무조건 상대방을 쓰러뜨리려고만 하는 전쟁이 아니며, 명분은 강할 때 지킬 수 있다는 교훈도 주고있다. 승리만을 통해 자신의 자신의 명분을 확립하려는 손자 이전의 전쟁 목적과는 전혀 다른 놀리를 펼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2천 년 넘게 손자병법은 ‘병경(兵經)’으로 존중되어 오면서 뛰어난 장수를 기르고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지로 전파되어 세계 군사과학의 발전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더욱 넓게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는 손자병법이 밝힌 전쟁 지도 원칙을 국가전략과 군사정책 수립 등에 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관리에도 활용하고 있다.

손자병법에 대한 평가

일본의 군사 평론가인 소산내굉(小山內宏)은 이렇게 『손자병법』을 평가했다.

“『손자병법』은 전략론일 뿐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품은 전쟁철학이며, 심지어 현대 전략전술에도 대단히 훌륭한 계시를 준다.”(『현대전략론』 1972년판)

풍몽룡의 <<東周烈國志>>에 나타난 손무

손무에 대한 역사기록은 양적인 면에서 매우 소략하다. 게다가 남아 있는 자료들은 간략한 줄거리만을 전하고 있을 뿐 손무라는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군사가로서의 재능이 얼마나 특출 했는지에 손무라는 인물 본연의 형상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풍몽룡이 ≪동주열국지≫에서 그려낸 손무의 형상에서는 손무답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교묘한 수사 전략이 성공적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존의 기록과는 달리 ≪동주열국지≫에서 손무는 역사사건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풍몽룡은 손무의 일대기를 그리기 위해 문헌기록을 최대한 이용했다. 배후 인물인 오자서를 ‘중도적(中道的)인물’로 설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동주열국지≫에서는 손무를 이야기할 때 오자서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는데, 손무가 오왕 합려의 장수가 되고, 전장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나라 정복에 성공한 후 다시 나라 장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손무는 오자서와 늘 함께 한다. 오자서는 손무가 자신의 용병술을 제대로 증명해 보일 場을 마련해 준 인물이기도하며, 손무의 능력이 더욱 돋보이도록 대조 효과를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오자서를 ‘중도적 인물’로 설정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손무의 이면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여 손무가 오자서보다 장수로서 더 적절한 사람임을 보여주려고 한 의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풍몽룡은 손무를 손무답게 만들어 주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손자병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손무의 대활약 곳곳에 ≪손자병법≫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손무의 이미지를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었다. 특히 손무가 주장했던 장수의 다섯 가지 덕목, 즉 장수의 지모(智), 위신(信), 인자함(仁), 용감함(勇), 엄정함(嚴)44)은 풍몽룡이 묘사한 손무의 형상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소설 속에 묘사된 손무의 형상은 작가가 성명한 것처럼 모 두 사실에 근거한 진실은 아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조작된 사실과 역사기록에 부합하지 않는 오류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역사 기록의 공백은 작가가 의도된 허구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었고, 풍몽룡은 필요에 따라 완벽한 허구로 설득력 있는 손무의 인생결말을 창조할 수 있었다. 사실, 역사와 문학, 허와 실, 사실과 거짓은 상충되고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풍몽룡은 이 두 개념을 적절하게 이용했을 때에 손무라는 인물 안에서 허구와 사실 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완벽한 허구이고 거짓이라 해도 정황적으로 그 진실성이 전달되면 사실로 인식된다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오사(五事)”라고 한다. ≪손자병법ㆍ시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교묘하게 이용했다. 손무의 인생결말이 대표적인 예인데, 손무가 보여준 지략이나 선견지명의 연장선상에서 손무의 최후는 재창조되었으며, 의도적으로 변형하고 첨가한 줄거리에서 풍몽룡을 비롯한 당시 민중들이 바라는 장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이를 통해 전쟁터의 영웅이 전쟁터를 떠나서도 지혜로운 인생을 산 영웅으로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풍몽룡의 문학적 기교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손무는 누구보다 병법에 통달한 장수였고, 공수신퇴의 도리를 아는 정치가였으며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인간이었다. 또한, 난세에 휘말리지 않고 지혜롭게 산 진정한 병법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