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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위왕[齊威王]<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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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제나라의 16대 군주이자 환공의 아들로,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한 인물로 평가된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16대 군주이자 환공의 아들로,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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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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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태공 전화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강 씨의 제나라를 전 씨의 [[제나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제나라에서 태공의 의미는 강 씨의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을 의미했는데, 전화는 강 씨의 제나라 찬탈을 위해 스스로를 태공이라 칭했다. 그리고 기원전 386년, 전화는 마침내 본격적으로 찬탈을 시작한다. 제강공 대를 도성인 임치성에서 작은 마을로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나라를 강 씨의 제나라에서 전 씨의 제나라로 바꾼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태공을 칭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385년에 병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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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의 사후, 전화의 아들 전오가 그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전오는 근면성실한 자세로 정사에 임해 강 씨의 제나라의 [[제환공]]과 똑같은 환(桓)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기원전 379년, 제환공 전오 사후 그의 아들 인제가 보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전국시대 중기에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든 제위왕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해에 제강공 대가 죽고, 강 씨의 제나라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br>
  
==즉위배경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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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초기와 전국칠웅==
제태공 전화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강 씨의 제나라를 전 씨의 제나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제나라에서 태공의 의미는 강 씨의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을 의미했는데, 전화는 강 씨의 제나라 찬탈을 위해 스스로를 태공이라 칭했다. 그리고 기원전 386년, 전화는 마침내 본격적으로 찬탈을 시작한다. 제강공 대를 도성인 임치성에서 작은 마을로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나라를 강 씨의 제나라에서 전 씨의 제나라로 바꾼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태공을 칭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385년에 병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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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3년, 연나라의 제나라 침공으로 제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연나라가 임호에서 제나라를 격파할 때, 이웃한 약소국 노나라는 연나라의 공격에 가세해 제나라의 양관(陽關)산동 태안현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위나라까지 박릉산동 치평현을 공격했다. 사방에서 제나라를 일제히 공격하자 제나라는 이길 방법이 없어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이후, 연나라는 지속적으로 남진을 추구했고, 전국시대 말까지도 제나라와 연나라는 서로 승패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이로 인해 동방의 제나라, 서방의 진나라, 남방의 초나라, 북방의 연나라, 그리고 중앙의 위·한·조나라(중원의 3진)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전국칠웅]]을 형성하여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다.<br>
전화의 사후, 전화의 아들 전오가 그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전오는 근면성실한 자세로 정사에 임해 강 씨의 제나라의 제환공과 똑같은 환(桓)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기원전 379년, 제환공 전오 사후 그의 아들 인제가 보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전국시대 중기에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든 제위왕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해에 제강공 대가 죽고, 강 씨의 제나라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br>
 
제위왕은 전 씨 제나라 군주 중 매우 특출난 명군으로 손꼽힌다. 그는 제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대국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는 즉위 이래 9년 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제나라가 패방의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정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이었던 추기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전기를 장군, 손빈을 군사에 기용해서 제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었다. 또한 임치에 직하학궁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여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했다.<br>
 
기원전 373년, 연나라의 제나라 침공으로 제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연나라가 임호에서 제나라를 격파할 때, 이웃한 약소국 노나라는 연나라의 공격에 가세해 제나라의 양관(陽關)산동 태안현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위나라까지 박릉산동 치평현을 공격했다. 사방에서 제나라를 일제히 공격하자 제나라는 이길 방법이 없어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이후, 연나라는 지속적으로 남진을 추구했고, 전국시대 말까지도 제나라와 연나라는 서로 승패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이로 인해 동방의 제나라, 서방의 진나라, 남방의 초나라, 북방의 연나라, 그리고 중앙의 위·한·조나라(중원의 3진)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전국 7웅을 형성하여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다.<br>
 
 
그러나 연나라의 남진은 결국 다른 국가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진나라는 동진을 위해 초나라와, 서진을 목표하는 제나라는 연의 남진을 막으려는 위·한·조나라와 전국시대 말까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br>
 
그러나 연나라의 남진은 결국 다른 국가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진나라는 동진을 위해 초나라와, 서진을 목표하는 제나라는 연의 남진을 막으려는 위·한·조나라와 전국시대 말까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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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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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릉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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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54년 위혜왕은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고, 그조나라는 급히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 제위왕은 전기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하여 군대를 보냈다. 당시 위나라 군대는 방연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방연과 손빈은 방연의 일방적인 배신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따라서 손빈은 방연에 복수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볍법가 였지만, 일부러 대장이 아닌 군사(참모)로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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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전기는 곧바로 한단으로 향하려 하지만 손빈은 그런 그의 의견을 만류하고 직접 위의 수도를 위협하자고 제안한다. 방연이 마침내 한단을 정복하려는 순간, 그는 제나라 장군 전기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위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방연은 급하게 위나라로 후퇴했다. 그러나 방연은 결국 계릉 근처에서 제나라 군사의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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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을 빌어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의 [[위위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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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릉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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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41년, 위나라 장수 방연이 한나라를 쳤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위왕은 대책회의를 통해 출병 약속을 하고, 제나라의 출병 약속을 받은 한나라는 제나라만 믿고 전력을 다하지 않아 다섯 번 싸웠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다. 이때 제나라가 출병했다. 계릉전투와 바찬가지로 전기가 대장, 손빈이 군사(총참모장)이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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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금 앞서서 위나라로 진격해 들어가던 손빈은 원수 방연을 패망시키기 위한 계략을 구사했다. 첫날에는 10만 명 분의 솥을 걸어서 밥을 지은 자리를 남겨 놓고 진군하고, 다음날은 5만 명 분, 그리고 사흘째는 2만 명 분 하는 식으로 솥을 걸었던 자리의 숫자를 점점 줄여 간 것이다. 이것을 본 방연은 제나라 군사들이 무서워서 도주해버린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나라 군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위의 군사가 마릉에 이를 것을 짐작하고 마릉을 향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있던 제나라의 군사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고, 방연은 순간적으로 손빈의 계략임을 깨닫고는 자결했다. 손빈은 그렇게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자신의 복수까지 성공했다.<br>
  
==관기 확립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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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업적==
제위왕 이후 제나라는 치세를 맞고, 제나라는 전국시대 이후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이와 관련해 『열국지』는 제나라가 중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일화를 실어놓았다. 제위왕이 문득 대오각성하자 대부들은 춘추오패의 제황공과 진문공의 업적을 들며, 패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왕실의 천자를 조현해야한다고 했다. 비록 주왕실이 쇠약해졌지만 주왕실에는 여전히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있고, 그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제후들의 수장이 되면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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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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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위왕 이후 제나라는 치세를 맞고, 제나라는 [[전국시대]] 이후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이와 관련해 『열국지』는 제나라가 중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일화를 실어놓았다. 제위왕이 문득 대오각성하자 대부들은 [[춘추오패]]의 [[제환공]]과 [[진문공]]의 업적을 들며, 패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왕실의 천자를 조현해야한다고 했다. 비록 주왕실이 쇠약해졌지만 주왕실에는 여전히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있고, 그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제후들의 수장이 되면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br>
 
결국 제위왕은 대부들의 말을 따라 기원전 370년 주열왕을 조현했고, 당시 제후들 중 그 누구도 사신을 보내지 않던 상황에 조현을 받은 주열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패자로 승인했다. 잠시 열후의 입장을 취해 그는 명실상부한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br>
 
결국 제위왕은 대부들의 말을 따라 기원전 370년 주열왕을 조현했고, 당시 제후들 중 그 누구도 사신을 보내지 않던 상황에 조현을 받은 주열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패자로 승인했다. 잠시 열후의 입장을 취해 그는 명실상부한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br>
이 무렵 조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의의 견읍산동성 견성현을 빼앗았다. 특이하게도 제위왕은 이런 상황에서 먼저 관기 확립부터 서둘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사기』「전경중완세가」에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좌우에 각 고을의 현명한 관원과 부도덕한 관원을 보고하라 명했다. 대부들은 입을 모아 아읍산동 양곡현의 대부를 칭송하고, 즉묵산동 평도현의 대부를 비난했고, 둘을 소환했다. 먼저 즉묵에게 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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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조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의 견읍산동성 견성현을 빼앗았다. 특이하게도 제위왕은 이런 상황에서 먼저 관기 확립부터 서둘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사기』「전경중완세가」에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좌우에 각 고을의 현명한 관원과 부도덕한 관원을 보고하라 명했다. 대부들은 입을 모아 아읍산동 양곡현의 대부를 칭송하고, 즉묵산동 평도현의 대부를 비난했고, 둘을 소환했다. 먼저 즉묵에게 말했다.<br>
  
 
  “그대가 즉묵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전해지고 있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관찰하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 백성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고 있
 
  “그대가 즉묵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전해지고 있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관찰하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 백성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고 있
 
  고, 관청에는 하다 남은 일도 없어, 동쪽 지역은 편안해졌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을 섬겨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고, 관청에는 하다 남은 일도 없어, 동쪽 지역은 편안해졌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을 섬겨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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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했다. <br>
  (위왕은) 아읍의 대부를 불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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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왕은) 아읍의 대부를 불러 말했다.<br>
 
  “그대가 아읍을 다스리게 되면서,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들려오고 있소. 그러나 사신으로 하여금 아읍을 살펴보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있지 않고, 백성들은 가난해 고통스러워
 
  “그대가 아읍을 다스리게 되면서,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들려오고 있소. 그러나 사신으로 하여금 아읍을 살펴보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있지 않고, 백성들은 가난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소. 옛날에 조나라가 견읍을 공격했을 대에도 그대는 구해줄 수 없었소. 위나라가 설릉을 빼앗았을 때에도 그대는 알지도 못했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후하
 
  하고 있소. 옛날에 조나라가 견읍을 공격했을 대에도 그대는 구해줄 수 없었소. 위나라가 설릉을 빼앗았을 때에도 그대는 알지도 못했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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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전경중완세가」의 평이다.
 
이에 대해 「전경중완세가」의 평이다.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고, 위나라를 탁택에서 쳐부수고 위나라 혜왕을 포위했다. 혜왕이 관읍을 바쳐서 화해를 청하니 조나라는 제나라에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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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고, 위나라를 탁택에서 쳐부수고 위나라 혜왕을 포위했다. 혜왕이 관읍을 바쳐서 화해를 청하니 조나라는 제나라에 장성
 
  을 돌려주었다. 이에 제나라는 위세를 천하에 떨폈으며, 사람들마다 감히 가식을 부리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성심성의껏 직무를 다했다.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을 돌려주었다. 이에 제나라는 위세를 천하에 떨폈으며, 사람들마다 감히 가식을 부리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성심성의껏 직무를 다했다.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감히 이십여 년 동안 제나라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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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식을 듣고는 감히 이십여 년 동안 제나라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위기상황에서 굳이 관기를 다졌던 것은 관기 확립을 통해 왕의 명을 제대로 집행되도록 하고, 나아가 외적에 대한 경계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위기상황에서 굳이 관기를 다졌던 것은 관기 확립을 통해 왕의 명을 제대로 집행되도록 하고, 나아가 외적에 대한 경계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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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하학궁|직하학당]]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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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는 결코 약육강식의 싸움질만 난무한 암흑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문호가 가장 널리 개방되어 있던 매우 창조적인 시기였다. 능력만 있으면 고위직에 올라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때처럼 문호가 활짝 개방된 적은 없다. 전국시대를 사인(士人)의 시대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기와 순우곤을 둘러싼 일화는 혈통이나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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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혜왕과 제위왕의 전투는 결국 인재 경쟁의 결정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혜왕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제위왕의 인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위왕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고, [[직하학궁|직하학당]]을 설립했다. 이곳의 직하선생은 왕과 조정의 자문역할에 응하기만 하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이는 직하학당이 백가쟁명의 황금기를 구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이다.<br>
  
==주요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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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계릉전투===
+
제위왕은 전 씨 제나라 군주 중 매우 특출난 명군으로 손꼽힌다. 그는 제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대국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는 즉위 이래 9년 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제나라가 패방의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정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이었던 [[추기]]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전기를 장군, 손빈을 군사에 기용해서 제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었다. 또한 임치에 직하학궁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여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했다.<br>
기원전 354년 위혜왕은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고, 그조나라는 급히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 제위왕은 전기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하여 군대를 보냈다. 당시 위나라 군대는 방연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방연과 손빈은 방연의 일방적인 배신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따라서 손빈은 방연에 복수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볍법가 였지만, 일부러 대장이 아닌 군사(참모)로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br>
 
대장 전기는 곧바로 한단으로 향하려 하지만 손빈은 그런 그의 의견을 만류하고 직접 위의 수도를 위협하자고 제안한다. 방연이 마침내 한단을 정복하려는 순간, 그는 제나라 장군 전기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위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방연은 급하게 위나라로 후퇴했다. 그러나 방연은 결국 계릉 근처에서 제나라 군사의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 <br>
 
이러한 상황을 빌어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의 [[위위구조]]이다.
 
  
===마릉전투===
+
==참고자료==
기원전 341년, 위나라 장수 방연이 한나라를 쳤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위왕은 대책회의를 통해 출병 약속을 하고, 제나라의 출병 약속을 받은 한나라는 제나라만 믿고 전력을 다하지 않아 다섯 번 싸웠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다. 이때 제나라가 출병했다. 계릉전투와 바찬가지로 전기가 대장, 손빈이 군사(총참모장)이었다. <br>
+
*<사기세가>, 사마천, 민음사<br>
이때 조금 앞서서 위나라로 진격해 들어가던 손빈은 원수 방연을 패망시키기 위한 계략을 구사했다. 첫날에는 10만 명 분의 솥을 걸어서 밥을 지은 자리를 남겨 놓고 진군하고, 다음날은 5만 명 분, 그리고 사흘째는 2만 명 분 하는 식으로 솥을 걸었던 자리의 숫자를 점점 줄여 간 것이다. 이것을 본 방연은 제나라 군사들이 무서워서 도주해버린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나라 군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위의 군사가 마릉에 이를 것을 짐작하고 마릉을 향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있던 제나라의 군사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고, 방연은 순간적으로 손빈의 계략임을 깨닫고는 자결했다. 손빈은 그렇게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자신의 복수까지 성공했다.<br>
+
*<춘추전국의영웅들3>, 신동중, 한길사
  
==직하학당 설립과 사인의 시대==
+
[[분류:인물]]<br>
전국시대는 결코 약육강식의 싸움질만 난무한 암흑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문호가 가장 널리 개방되어 있던 매우 창조적인 시기였다. 능력만 있으면 고위직에 올라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때처럼 문호가 활짝 개방된 적은 없다. 전국시대를 사인(士人)의 시대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기와 순우곤을 둘러싼 일화는 혈통이나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br>
 
위혜왕과 제위왕의 전투는 결국 인재 경쟁의 결정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혜왕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제위왕의 인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위왕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고, 직하학당을 설립했다. 이곳의 직하선생은 왕과 조정의 자문역할에 응하기만 하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이는 직하학당이 백가쟁명의 황금기를 구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이다.<br>
 

2017년 6월 28일 (수) 12:57 기준 최신판

제위왕[齊威王]

출생 BC.378년
사망 BC.320년
생존 시대 전국시대

개요

전국시대 제나라의 16대 군주이자 환공의 아들로,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한 인물로 평가된다.

즉위배경

제태공 전화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강 씨의 제나라를 전 씨의 제나라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제나라에서 태공의 의미는 강 씨의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을 의미했는데, 전화는 강 씨의 제나라 찬탈을 위해 스스로를 태공이라 칭했다. 그리고 기원전 386년, 전화는 마침내 본격적으로 찬탈을 시작한다. 제강공 대를 도성인 임치성에서 작은 마을로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제나라를 강 씨의 제나라에서 전 씨의 제나라로 바꾼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태공을 칭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원전 385년에 병사했다.
전화의 사후, 전화의 아들 전오가 그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전오는 근면성실한 자세로 정사에 임해 강 씨의 제나라의 제환공과 똑같은 환(桓)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기원전 379년, 제환공 전오 사후 그의 아들 인제가 보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전국시대 중기에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든 제위왕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해에 제강공 대가 죽고, 강 씨의 제나라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위초기와 전국칠웅

기원전 373년, 연나라의 제나라 침공으로 제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연나라가 임호에서 제나라를 격파할 때, 이웃한 약소국 노나라는 연나라의 공격에 가세해 제나라의 양관(陽關)산동 태안현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위나라까지 박릉산동 치평현을 공격했다. 사방에서 제나라를 일제히 공격하자 제나라는 이길 방법이 없어 번번히 패하고 말았다. 이후, 연나라는 지속적으로 남진을 추구했고, 전국시대 말까지도 제나라와 연나라는 서로 승패를 주고 받으며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이로 인해 동방의 제나라, 서방의 진나라, 남방의 초나라, 북방의 연나라, 그리고 중앙의 위·한·조나라(중원의 3진)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전국칠웅을 형성하여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다.
그러나 연나라의 남진은 결국 다른 국가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진나라는 동진을 위해 초나라와, 서진을 목표하는 제나라는 연의 남진을 막으려는 위·한·조나라와 전국시대 말까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주요전투

계릉전투

기원전 354년 위혜왕은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고, 그조나라는 급히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 제위왕은 전기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하여 군대를 보냈다. 당시 위나라 군대는 방연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방연과 손빈은 방연의 일방적인 배신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따라서 손빈은 방연에 복수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볍법가 였지만, 일부러 대장이 아닌 군사(참모)로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대장 전기는 곧바로 한단으로 향하려 하지만 손빈은 그런 그의 의견을 만류하고 직접 위의 수도를 위협하자고 제안한다. 방연이 마침내 한단을 정복하려는 순간, 그는 제나라 장군 전기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위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방연은 급하게 위나라로 후퇴했다. 그러나 방연은 결국 계릉 근처에서 제나라 군사의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빌어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의 위위구조이다.

마릉전투

기원전 341년, 위나라 장수 방연이 한나라를 쳤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자 제위왕은 대책회의를 통해 출병 약속을 하고, 제나라의 출병 약속을 받은 한나라는 제나라만 믿고 전력을 다하지 않아 다섯 번 싸웠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다. 이때 제나라가 출병했다. 계릉전투와 바찬가지로 전기가 대장, 손빈이 군사(총참모장)이었다.
이때 조금 앞서서 위나라로 진격해 들어가던 손빈은 원수 방연을 패망시키기 위한 계략을 구사했다. 첫날에는 10만 명 분의 솥을 걸어서 밥을 지은 자리를 남겨 놓고 진군하고, 다음날은 5만 명 분, 그리고 사흘째는 2만 명 분 하는 식으로 솥을 걸었던 자리의 숫자를 점점 줄여 간 것이다. 이것을 본 방연은 제나라 군사들이 무서워서 도주해버린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나라 군사의 뒤를 쫓았다. 그는 위의 군사가 마릉에 이를 것을 짐작하고 마릉을 향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도착하자마자 매복해있던 제나라의 군사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렸고, 방연은 순간적으로 손빈의 계략임을 깨닫고는 자결했다. 손빈은 그렇게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자신의 복수까지 성공했다.

주요업적

관기 확립

제위왕 이후 제나라는 치세를 맞고, 제나라는 전국시대 이후 처음으로 왕호를 사용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이와 관련해 『열국지』는 제나라가 중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일화를 실어놓았다. 제위왕이 문득 대오각성하자 대부들은 춘추오패제환공진문공의 업적을 들며, 패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왕실의 천자를 조현해야한다고 했다. 비록 주왕실이 쇠약해졌지만 주왕실에는 여전히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있고, 그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제후들의 수장이 되면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위왕은 대부들의 말을 따라 기원전 370년 주열왕을 조현했고, 당시 제후들 중 그 누구도 사신을 보내지 않던 상황에 조현을 받은 주열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패자로 승인했다. 잠시 열후의 입장을 취해 그는 명실상부한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조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의 견읍산동성 견성현을 빼앗았다. 특이하게도 제위왕은 이런 상황에서 먼저 관기 확립부터 서둘렀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사기』「전경중완세가」에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좌우에 각 고을의 현명한 관원과 부도덕한 관원을 보고하라 명했다. 대부들은 입을 모아 아읍산동 양곡현의 대부를 칭송하고, 즉묵산동 평도현의 대부를 비난했고, 둘을 소환했다. 먼저 즉묵에게 말했다.

“그대가 즉묵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전해지고 있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을 관찰하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 백성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고 있
고, 관청에는 하다 남은 일도 없어, 동쪽 지역은 편안해졌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을 섬겨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했다. 
(위왕은) 아읍의 대부를 불러 말했다.
“그대가 아읍을 다스리게 되면서,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들려오고 있소. 그러나 사신으로 하여금 아읍을 살펴보게 하니, 밭과 들이 개간되어있지 않고, 백성들은 가난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소. 옛날에 조나라가 견읍을 공격했을 대에도 그대는 구해줄 수 없었소. 위나라가 설릉을 빼앗았을 때에도 그대는 알지도 못했소. 이는 그대가 나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후하 게 하여 명예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이오.” 이날 아읍의 대부를 큰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일찍이 그를 칭찬했던 측근들도 모두 함께 삶아 죽이는 형벌에 처했다.

이에 대해 「전경중완세가」의 평이다.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고, 위나라를 탁택에서 쳐부수고 위나라 혜왕을 포위했다. 혜왕이 관읍을 바쳐서 화해를 청하니 조나라는 제나라에 장성 을 돌려주었다. 이에 제나라는 위세를 천하에 떨폈으며, 사람들마다 감히 가식을 부리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성심성의껏 직무를 다했다.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감히 이십여 년 동안 제나라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위기상황에서 굳이 관기를 다졌던 것은 관기 확립을 통해 왕의 명을 제대로 집행되도록 하고, 나아가 외적에 대한 경계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직하학당 설립

전국시대는 결코 약육강식의 싸움질만 난무한 암흑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문호가 가장 널리 개방되어 있던 매우 창조적인 시기였다. 능력만 있으면 고위직에 올라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때처럼 문호가 활짝 개방된 적은 없다. 전국시대를 사인(士人)의 시대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기와 순우곤을 둘러싼 일화는 혈통이나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전국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혜왕과 제위왕의 전투는 결국 인재 경쟁의 결정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혜왕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제위왕의 인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위왕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고, 직하학당을 설립했다. 이곳의 직하선생은 왕과 조정의 자문역할에 응하기만 하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이는 직하학당이 백가쟁명의 황금기를 구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이다.

기타

제위왕은 전 씨 제나라 군주 중 매우 특출난 명군으로 손꼽힌다. 그는 제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강대국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는 즉위 이래 9년 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제나라가 패방의 위기에 직면하자 그는 정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평민이었던 추기를 재상으로 등용하고, 전기를 장군, 손빈을 군사에 기용해서 제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었다. 또한 임치에 직하학궁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여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참고자료

  • <사기세가>, 사마천, 민음사
  • <춘추전국의영웅들3>, 신동중,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