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
|||
(다른 사용자 한 명의 중간 판 21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2번째 줄: | 2번째 줄: | ||
|이름 = 평원군(平原君) | |이름 = 평원군(平原君) | ||
|그림 = 평원군1.png | |그림 = 평원군1.png | ||
− | |본명 = 조승( | + | |본명 = 조승(趙勝) |
|출생일 = ? | |출생일 = ? | ||
− | |사망일 = | + | |사망일 = 기원전 251년 |
|민족 분류 = 화하족(华夏族) | |민족 분류 = 화하족(华夏族) |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
12번째 줄: | 12번째 줄: | ||
|묘지 = 하북(河北)성 한단(邯郸)시 비향(肥乡)구 | |묘지 = 하북(河北)성 한단(邯郸)시 비향(肥乡)구 | ||
}} | }} | ||
− | 평원군(平原君)의 본명은 조승( | + | |
+ | '''평원군'''(平原君)의 본명은 조승(趙勝)(?~기원전 251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군자'''(四公子)중 한 명으로,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아들이자,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이다. | ||
+ | |||
==개요== | ==개요== | ||
− | 평원군(平原君) 조승(赵胜)은 전국 | + | 평원군(平原君) 조승(赵胜)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네 명의 군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었다. 평원군은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친구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초기에 서민들에게는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후에, 그의 문하에 있던 한 사람의 제안으로 인하여 서민들에게도 예의를 갖췄으며, 더욱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평원군은 혜문왕(惠文王) 때 처음으로 재상이 되었고, 혜문왕이 죽은 후, [[효성왕]](孝成王) 때에도 재상을 지냈다. <br /> |
+ | [[사마천]](司马迁)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이웃 나라에 명망을 떨친 점에서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모한 사람이었음을 묘사한 부분도 많다.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처음에는 두둔하다가 1년이 지나 빈객들이 점점 떠나간 뒤에야 그녀를 죽여 빈객들이 다시 모여들게 한 일이라든지, 모수를 무능한 인물로 평가했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 ||
− | |||
==주요 사건== | ==주요 사건== | ||
− | ===위제를 | + | ===위제를 돕다(营救魏齐)=== |
− | 진 소왕(昭王) 41년(기원전 266년), 위(魏)의 재상 위제(魏齐)가 진(秦)의 재상 범저(范雎)와 적대하다 도망쳐 겁에 질려 평원군에게 왔고, 다음 해에 평원군의 집에 그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의 | + | [[진]](秦) [[소왕]](昭王) 41년(기원전 266년), [[위]](魏)의 재상 [[위제]](魏齐)가 진(秦)의 재상 [[범저]](范雎)와 적대하다 도망쳐 겁에 질려 평원군에게 왔고, 다음 해에 평원군의 집에 그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의 소왕은 평원군을 자국으로 초청해, 범저가 위제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위제를 죽이지 않으면 진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평원군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평원군은 이를 거절했지만, [[효성왕]](孝成王)은 위제를 잡기 위해 병사를 보냈고, 위제는 겁에 질려 도망치다 위로 돌아왔지만, [[신릉군]](信陵君)이 만나기를 주저한다는 말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후, 평원군은 귀국할 수 있었다. |
− | ===모수자천(毛遂自荐)=== | + | ===[[모수자천]](毛遂自荐)=== |
− | + |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초(楚)나라에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식객과 문하 중에서 기와 힘이 있고 문학적 소양과 무예를 두루 갖춘 사람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9명은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을 뽑지 못하였고, 이때, 문하에 있던 '''[[모수]]'''(毛遂)라는 이가 자신을 추천하였다. <br /> | |
− |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었다면 끝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라며 답했고, 결국 합류하게 되었다. 초나라에 도착해서,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이야기하는데, 결정을 못 내리자, 모수가 당 위로 올라 초나라 왕에게로부터 합종을 받아냈다. 그리고 피를 나누어 마셨다. 평원군은 이후 조나라로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 | + |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나도 들은 적이 없소. 이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니 같이 갈 수 없소.”라며 거절했지만,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었다면 끝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라며 답했고, 결국 합류하게 되었다.<br /> |
− | ===한단을 | + | 초나라에 도착해서,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이야기하는데, 결정을 못 내리자, 모수가 당 위로 올라 초나라 왕에게로부터 합종을 받아냈다. 그리고 피를 나누어 마셨다. 평원군은 이후 조나라로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ref>구정은 [[우임금]]이 만든 것으로 삼대 때 나라의 보물로 전해졌고, 대려는 주나라 왕실 종묘에 있던 큰 종을 말한다. 구정과 대려는 모두 고대에 나라의 권력을 상징하던 가장 귀중한 물건으로, 여기서는 모수가 비중이 큰 인물임을 비유한 것이다.</ref>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100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
− |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장평대전 후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해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조나라 왕은 그를 | + | ===한단을 구하다(邯郸解围)=== |
+ |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장평대전]] 후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해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조나라 왕은 그를 위와 [[초]]에 파견해 지원을 요청하였다. [[효성왕]] 9년, 그의 문하에 있던 [[모수]]가 자원해서 평원군과 함께 [[초]]나라에 가서 지원을 요청했고,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원조를 받아 조나라를 지켜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한단 내의 병사 식량이 다 떨어져, 평원군은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나눠주어서, 병사를 동원하여 도시를 방어했다. 곧바로, 초나라의 군대와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지원병이 도착하였고, 진나라의 포위를 격파했다. | ||
==인물 평가== | ==인물 평가== | ||
− | *백기(白起) | + | *[[백기]](白起) : “'''평원군'''(平原君)은 그의 처첩을 모두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였고, 신하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
+ | |||
+ | *[[가의]](贾谊) : “당시에,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尝君), [[조]](趙)나라에는 '''평원군''',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4군자 모두 명석하고 충직하였고, 너그러웠으며, 중신들을 존중했다.” | ||
− | * | + | *[[사마천]](司馬遷) :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이다.” |
− | * | + | *[[라검파]](罗剑波) : “'''평원군'''은 의리를 매우 중시하며, 어질고, 덕과 예의를 중시한다. 실로 보기 드문 지혜로운 사람이다.” |
− | |||
==관련 일화== | ==관련 일화== | ||
− | ===조승이 첩을 죽이다( | + | ===조승이 첩을 죽이다(趙勝殺妾)=== |
− | + |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성품이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대략 수천 명에 달했다. <br /> | |
− | 평원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비웃음을 치며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았다. 그 뒤, 1년 남짓한 사이에 빈객과 문하, 사인들이 조금씩 떠나가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문하의 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 + | 어느 날, 평원군의 집 근처 민가에 한 절름발이가 물을 길으러 다니는 광경을 보고, 평원군의 애첩이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 날, 그 절름발이가 평원군의 집 문 앞에 와서 평원군에게 말했다. <br /> |
− | ===권고와 비판을 잘 받아들이다( | + | “저는 당신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1000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애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 다리를 절뚝거리고 등이 굽는 병이 있는데, 당신 애첩이 저를 내려다보고 비웃었습니다. 원컨대 저를 비웃은 자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br /> |
− | + | 평원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비웃음을 치며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았다. <br /> | |
+ | 그 뒤, 1년 남짓한 사이에 빈객과 문하, 사인들이 조금씩 떠나가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문하의 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전에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죽이지 않아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평원군은 바로 애첩의 목을 베고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고, 그 뒤 문하에 다시 조금씩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 ===권고와 비판을 잘 받아들이다(從諫如流)=== | ||
+ | 조(趙)나라의 밭 관리인 [[조수]](趙奢)가 과분하게 조세 징수를 했고, 평원군의 집은 이를 원치 않았다. 그러자 조수는 국법을 이용해서 평원군의 집 관리인 9명을 죽여 징벌하였다. 평원군은 분노했고, 조수를 죽이려 했다. <br /> | ||
+ | 그때, 조수가 말하길 “당신은 조나라의 왕족이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의 관리인들을 눈감아주고 제가 공무를 집행하지 않게 하려면, 국법을 약화시키십시오, 하지만, 국법 약화는 국가를 약화시키고, 국가 약화는 제후를 약화시킵니다. 조나라에서는 이 방법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부귀를 누리시겠습니까? 당신의 존엄에 맞게, 공무에 충실하고 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위아래가 바로 안정될 것입니다. 이는 국가를 강하게 하고, 국강은 조나라의 정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 왕족을 위한 것입니다. 설마 당신은 서민들이 당신을 무시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br /> | ||
+ | 이 말을 들은 평원군은 그가 재덕을 겸비한 사람이라 여기고, 그를 조나라 왕에게 추천했다. 왕은 조수에게 국세를 주관하게 했고, 그는 그 일을 능숙하게 하여, 결국 백성들을 부유하게, 국고를 넉넉하게 했다. | ||
+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 ||
− | *부친:조 무령왕( | + | *부친:조 [[무령왕]](趙 武靈王) |
− | *형제:조 혜문왕( | + | *형제:조 [[혜문왕]](趙 惠文王)、안양군 조장(安阳君 赵章)、평양군 조표(平阳君 趙豹) |
− | *조카:조 효성왕( | + | *조카:조 [[효성왕]](趙 孝成王)、조회(赵悝)、조오(赵郚)、[[여릉군]](庐陵君)、[[장안군]](长安君) |
==기타== | ==기타== | ||
===후세 기념=== | ===후세 기념=== | ||
− | 2008년 10월, 한단 비향현(邯郸 肥乡县)은 성급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인 | + | 2008년 10월, 한단 비향현(邯郸 肥乡县)은 성급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인 평원군(平原君) 묘에 대한 종합 개발을 시작했다. 일반인들의 참관을 허용하여 관광 사업을 벌일 예정인데, 전반적인 설계에 따라 고분, 평원군기념관, 사원 등을 조성하고, 아울러 묘지 녹화, 미화 사업과 동시에 주변 마을에 대한 농업생태단지 조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
===관련 드라마 및 영화=== | ===관련 드라마 및 영화=== | ||
− | *드라마 《东方小故事之毛遂自荐》 | + | *드라마 《东方小故事之毛遂自荐》 (1994) |
− | *드라마 《东周列国·战国篇》 | + | *드라마 《东周列国·战国篇》 (1997) |
− | *드라마 《西风烈》 | + | *드라마 《西风烈》 (2008) |
− | *드라마 《虎符传奇》 | + | *드라마 《虎符传奇》 (2010) |
− | *영화 《毛遂自荐》 | + | *영화 《毛遂自荐》 (2012) |
+ | |||
+ | *드라마 《大秦帝国之崛起》 (2017) | ||
− | |||
==참고 문헌 및 자료== | ==참고 문헌 및 자료== | ||
− |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2007) | + |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2007) |
*박영규, 『춘추전국사』, 웅진지식하우스(2015) | *박영규, 『춘추전국사』, 웅진지식하우스(2015) | ||
− | *사마광, 『자치통감』, 권중달 역, 삼화(2007) | + | *[[사마광]], 『자치통감』, 권중달 역, 삼화(2007) |
− | * | + | *[https://zh.wikipedia.org/wiki/%E5%B9%B3%E5%8E%9F%E5%90%9B 중국 위키피디아, 平原君] |
+ | *[http://baike.baidu.com/item/%E8%B5%B5%E8%83%9C/40767 바이두 백과, "赵胜"] | ||
+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2017년 6월 28일 (수) 14:40 기준 최신판
평원군(平原君) | |
---|---|
| |
본명 | 조승(趙勝) |
출생 |
? |
사망 |
기원전 251년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관련 활동 | 정치 |
평원군(平原君)의 본명은 조승(趙勝)(?~기원전 251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군자(四公子)중 한 명으로,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아들이자,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이다.
목차
개요
평원군(平原君) 조승(赵胜)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네 명의 군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었다. 평원군은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친구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초기에 서민들에게는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후에, 그의 문하에 있던 한 사람의 제안으로 인하여 서민들에게도 예의를 갖췄으며, 더욱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평원군은 혜문왕(惠文王) 때 처음으로 재상이 되었고, 혜문왕이 죽은 후, 효성왕(孝成王) 때에도 재상을 지냈다.
사마천(司马迁)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이웃 나라에 명망을 떨친 점에서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모한 사람이었음을 묘사한 부분도 많다.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처음에는 두둔하다가 1년이 지나 빈객들이 점점 떠나간 뒤에야 그녀를 죽여 빈객들이 다시 모여들게 한 일이라든지, 모수를 무능한 인물로 평가했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주요 사건
위제를 돕다(营救魏齐)
진(秦) 소왕(昭王) 41년(기원전 266년), 위(魏)의 재상 위제(魏齐)가 진(秦)의 재상 범저(范雎)와 적대하다 도망쳐 겁에 질려 평원군에게 왔고, 다음 해에 평원군의 집에 그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의 소왕은 평원군을 자국으로 초청해, 범저가 위제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위제를 죽이지 않으면 진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평원군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평원군은 이를 거절했지만, 효성왕(孝成王)은 위제를 잡기 위해 병사를 보냈고, 위제는 겁에 질려 도망치다 위로 돌아왔지만, 신릉군(信陵君)이 만나기를 주저한다는 말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후, 평원군은 귀국할 수 있었다.
모수자천(毛遂自荐)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초(楚)나라에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식객과 문하 중에서 기와 힘이 있고 문학적 소양과 무예를 두루 갖춘 사람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9명은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을 뽑지 못하였고, 이때, 문하에 있던 모수(毛遂)라는 이가 자신을 추천하였다.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나도 들은 적이 없소. 이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니 같이 갈 수 없소.”라며 거절했지만,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었다면 끝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라며 답했고, 결국 합류하게 되었다.
초나라에 도착해서,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이야기하는데, 결정을 못 내리자, 모수가 당 위로 올라 초나라 왕에게로부터 합종을 받아냈다. 그리고 피를 나누어 마셨다. 평원군은 이후 조나라로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1]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100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한단을 구하다(邯郸解围)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장평대전 후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해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조나라 왕은 그를 위와 초에 파견해 지원을 요청하였다. 효성왕 9년, 그의 문하에 있던 모수가 자원해서 평원군과 함께 초나라에 가서 지원을 요청했고,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원조를 받아 조나라를 지켜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한단 내의 병사 식량이 다 떨어져, 평원군은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나눠주어서, 병사를 동원하여 도시를 방어했다. 곧바로, 초나라의 군대와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지원병이 도착하였고, 진나라의 포위를 격파했다.
인물 평가
- 백기(白起) : “평원군(平原君)은 그의 처첩을 모두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였고, 신하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 가의(贾谊) : “당시에,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尝君), 조(趙)나라에는 평원군,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4군자 모두 명석하고 충직하였고, 너그러웠으며, 중신들을 존중했다.”
- 사마천(司馬遷) :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이다.”
- 라검파(罗剑波) : “평원군은 의리를 매우 중시하며, 어질고, 덕과 예의를 중시한다. 실로 보기 드문 지혜로운 사람이다.”
관련 일화
조승이 첩을 죽이다(趙勝殺妾)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성품이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대략 수천 명에 달했다.
어느 날, 평원군의 집 근처 민가에 한 절름발이가 물을 길으러 다니는 광경을 보고, 평원군의 애첩이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 날, 그 절름발이가 평원군의 집 문 앞에 와서 평원군에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1000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애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 다리를 절뚝거리고 등이 굽는 병이 있는데, 당신 애첩이 저를 내려다보고 비웃었습니다. 원컨대 저를 비웃은 자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평원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비웃음을 치며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았다.
그 뒤, 1년 남짓한 사이에 빈객과 문하, 사인들이 조금씩 떠나가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문하의 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전에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죽이지 않아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평원군은 바로 애첩의 목을 베고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고, 그 뒤 문하에 다시 조금씩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권고와 비판을 잘 받아들이다(從諫如流)
조(趙)나라의 밭 관리인 조수(趙奢)가 과분하게 조세 징수를 했고, 평원군의 집은 이를 원치 않았다. 그러자 조수는 국법을 이용해서 평원군의 집 관리인 9명을 죽여 징벌하였다. 평원군은 분노했고, 조수를 죽이려 했다.
그때, 조수가 말하길 “당신은 조나라의 왕족이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의 관리인들을 눈감아주고 제가 공무를 집행하지 않게 하려면, 국법을 약화시키십시오, 하지만, 국법 약화는 국가를 약화시키고, 국가 약화는 제후를 약화시킵니다. 조나라에서는 이 방법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부귀를 누리시겠습니까? 당신의 존엄에 맞게, 공무에 충실하고 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위아래가 바로 안정될 것입니다. 이는 국가를 강하게 하고, 국강은 조나라의 정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 왕족을 위한 것입니다. 설마 당신은 서민들이 당신을 무시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평원군은 그가 재덕을 겸비한 사람이라 여기고, 그를 조나라 왕에게 추천했다. 왕은 조수에게 국세를 주관하게 했고, 그는 그 일을 능숙하게 하여, 결국 백성들을 부유하게, 국고를 넉넉하게 했다.
가족 관계
- 부친:조 무령왕(趙 武靈王)
- 형제:조 혜문왕(趙 惠文王)、안양군 조장(安阳君 赵章)、평양군 조표(平阳君 趙豹)
- 조카:조 효성왕(趙 孝成王)、조회(赵悝)、조오(赵郚)、여릉군(庐陵君)、장안군(长安君)
기타
후세 기념
2008년 10월, 한단 비향현(邯郸 肥乡县)은 성급 중점 문화재 보호 단위인 평원군(平原君) 묘에 대한 종합 개발을 시작했다. 일반인들의 참관을 허용하여 관광 사업을 벌일 예정인데, 전반적인 설계에 따라 고분, 평원군기념관, 사원 등을 조성하고, 아울러 묘지 녹화, 미화 사업과 동시에 주변 마을에 대한 농업생태단지 조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관련 드라마 및 영화
- 드라마 《东方小故事之毛遂自荐》 (1994)
- 드라마 《东周列国·战国篇》 (1997)
- 드라마 《西风烈》 (2008)
- 드라마 《虎符传奇》 (2010)
- 영화 《毛遂自荐》 (2012)
- 드라마 《大秦帝国之崛起》 (2017)
참고 문헌 및 자료
- 사마천,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2007)
- 박영규, 『춘추전국사』, 웅진지식하우스(2015)
- 사마광, 『자치통감』, 권중달 역, 삼화(2007)
- 중국 위키피디아, 平原君
- 바이두 백과, "赵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