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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승'''은 양성(陽城,하남성 등봉현 동남쪽) 출신이며 머슴살이를 하는 농민 출신이다. 자가 | + | [[파일:진승 오광의 난.jpg|오른쪽|400픽셀]] |
+ | '''진승'''은 양성(陽城,하남성 등봉현 동남쪽) 출신이며 머슴살이를 하는 농민 출신이다. 자가 섭(涉)이여서 진섭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오광과 함께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 ||
− | == | + | ==진승의 난== |
− | === | + | ===배경=== |
− | 진나라 이세황제 시대에 조정은 여문(마을 어귀의 문, 빈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왼쪽에 사는 사람들을 징집해 | + | 진나라 이세황제 시대에 조정은 여문(마을 어귀의 문, 빈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왼쪽에 사는 사람들을 징집해 어양(漁陽,북경시 밀운 서남쪽)에서 수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진나라 장교는 900여명의 머슴, 소작농들을 뽑고 그 중에 이들을 이끌 인솔자들을 뽑았다.장교는 쓸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여러 명의 둔장(屯長)을 선발했다. 둔장 중에 하남 성 출신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진승은 기원전 209년에 그의 동료인 오광을 포함한 약 900명의 인원과 함께 어양으로 이동했다. 이동중에 대택향(大澤鄕,,지금의 안휘성 숙현 동남쪽)을 지나가는데 큰 비가 계속와서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진나라의 형법은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제 시간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참수를 당하기 때문이다. 진승은 같은 처지인 오광과 상의하여 900명의 둔장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
− | 어양(漁陽,북경시 밀운 서남쪽)에서 수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진나라 장교는 900여명의 머슴, 소작농들을 뽑고 그 중에 | ||
===반란 봉기(진승•오광의 난)=== | ===반란 봉기(진승•오광의 난)=== | ||
− | + | 기원전 209년에 진승은 그의 동료 오광과 함께 대택향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진승.오광의 난이다. 대택향에서 발생했다고 해서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라고도 불린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킬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고 인물을 사칭했다.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써서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먹도록 시켰다. 사람들은 물고기 배속의 진승왕이라고 쓴 백서(帛書)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또한 진승은 오광을 시켜 밤에 몰래 황폐한 사당에 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대흥초 진승왕(大興楚 陳勝王)'이라고 외치도록 했다. <br /> | |
− | 기원전 209년에 진승은 그의 동료 오광과 함께 대택향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진승.오광의 난이다. 대택향에서 발생했다고 해서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라고도 불린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킬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고 인물을 사칭했다.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써서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먹도록 시켰다. 사람들은 물고기 배속의 진승왕이라고 쓴 백서(帛書)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또한 진승은 오광을 시켜 밤에 몰래 황폐한 사당에 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대흥초 진승왕(大興楚 陳勝王)'이라고 외치도록 했다. 이러한 소란에 수졸들은 크게 놀랐고 진승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진나라의 왕자 부소와 초나라의 항연을 가장해서 반란을 선포했다. 이둘은 모두 그 당시 진나라에 반감이 있을법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소는 | + | 이러한 소란에 수졸들은 크게 놀랐고 진승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진나라의 왕자 부소와 초나라의 항연을 가장해서 반란을 선포했다. 이둘은 모두 그 당시 진나라에 반감이 있을법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소는 [[진시황]]의 뒤를 이은 이세황제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이세황제에 반감을 가진 부소의 추종자들이 아직 존재했다. 또한 항연은 초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존재했다. 진승과 오광은 이들의 이름을 빌려 반란에 대한 명분과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압송해온 관리 2명을 살해했다. 진승은 사람들을 모아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라고 하며 자신의 뜻을 호소했다. 나라 이름을 '대초'라고 명명했다. 진승은 장군의 지위를 맡고 오광은 도위의 지위를 맡아 대택향을 공격하고 바로 뒤에 기현을 점령했다. |
===반란 과정=== | ===반란 과정=== | ||
+ | [[파일:진승•오광의 난 과정.jpg|오른쪽|400픽셀]] | ||
+ | ====장초 건설==== | ||
+ | 기현을 점령하고 나서, 진승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은 영역을 더 넓혀갔다. 부하인 갈영을 중심으로 기성 동쪽 지역인 질,찬,고,자,초를 모두 점령했다. 진현에 도착해 점령할 때, 진승의 반란군은 수레 육칠백 대, 기병 일천여명, 병사 수만명에 이르는 큰 세력이 되어있었다.진승 사람들은 진승에게 왕이 될 것을 권유했다. 오직 장이,장여만이 그가 장군으로 남아 왕족의 후예를 왕으로 새울 것을 권유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국호를 '대초'에서 '장초'로 바꾸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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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 확장==== | ====세력 확장==== | ||
− | + | 진승은 오광을 왕의 대리로 임명해서 다른 장수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삼천군으로 진군하게 했다. 오광은 형양을 포위했는데 삼천 군수 이유(李由)의 수비가 강력해서 형양을 점령하기 어려웠다. 진왕은 여러 인재들을 모아 형양을 점령할 방법을 논의했고 상채사람인 채사를 상주국으로 삼았다. 진승은 진현 사람인 무신, 장이, 진여가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여음 사람인 등종은 구강군을 공격하게 했다. 위나라 사람인 주불은 북쪽의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했다. 어진사람인 주문을 등용해 진나라 서쪽을 공격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진나라 장수 장한의 공격으로 패배하였다.<br /> | |
+ | 동쪽 지방의 공격을 책임지고 있던 갈영은 동성에서 양강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에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양강을 죽이고 와서 진승에게 알렸지만 진승은 갈영을 곧바로 죽였다. | ||
− | === | + | ===몰락=== |
+ | 진승의 몰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내부적으로 살펴보면, 진승은 왕이 된 후에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오만해져갔다. 한 일화를 예로 들면, 진승의 친구중에 같이 고용살이를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친구는 궁전을 보며 진승이 왕이 되더니 궁전이 화려하고 높구나 하며 감탄했다. 화섭위왕(夥涉爲王)이라는 말은 이 일화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이 친구는 진왕의 친구라는 신분으로 예의없이 행동했다. 한 신하는 이에 대해 진승에게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처형당했다. 진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츙성스러운 신하들을 잃었다.<br /> | ||
− | + | 대외적으로 살펴보면, 진나라의 반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진나라의 장수 장한은 오서를 격파하고 진현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진승의 뛰어난 장수 채사가 전사했다. 진승은 여음으로 후퇴해 하성보에 머물렀다. 그 당시 마부였던 장고는 진승을 살해하고 진나라에 투항하면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진승은 탕현에 묻혔다. 그리고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후에 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
==평가== | ==평가== | ||
− | 진승은 머슴이라는 미천한 신분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에 반기를 든 계기는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승의 반란은 여러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는 천한 신분인 머슴이 나라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신분을 초월한 하극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군주가 먼저 민심을 잃고 도를 잃었을 경우에만 하극상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그의 반란이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진승의 반란의 중요성을 인지한 사마천은 그를 열전이 아닌 세가에 기록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고 후사도 없지만 민심을 잃고 가혹한 정치로 무너진 진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새웠다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태사공 자서에서 그에 대한 평은 이렇다."걸왕과 주왕이 왕도를 잃자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나라가 도를 잃다 '춘추'가 지어졌고, 진나라가 정도를 잃자 진섭이 나타났다." | + | 진승은 머슴이라는 미천한 신분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에 반기를 든 계기는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승의 반란은 여러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br /> |
+ | 첫째는 천한 신분인 머슴이 나라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신분을 초월한 하극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군주가 먼저 민심을 잃고 도를 잃었을 경우에만 하극상을 일으킬 수 있다. <br /> | ||
+ | 둘째는 그의 반란이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진승의 반란의 중요성을 인지한 사마천은 그를 열전이 아닌 세가에 기록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고 후사도 없지만 민심을 잃고 가혹한 정치로 무너진 진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새웠다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태사공 자서에서 그에 대한 평은 이렇다."걸왕과 주왕이 왕도를 잃자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나라가 도를 잃다 '춘추'가 지어졌고, 진나라가 정도를 잃자 진섭이 나타났다."<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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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중국에서도 진승이 일으킨 난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중국’사회에 대항해 발샐한 최초의 농민봉기라는 점에서 위대하게 평가한다. 진승과 오광은 인민해방 투쟁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반란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계급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민해방 투쟁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 | + | 사마천,사기세가,김원중 옮김,민음사, 2011. <br /> | |
− | < | + | |
− | + | 사마천, 사마천 사기, 노만수 옮김, 일빛,2009 <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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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wapbaike.baidu.com/pic/大泽乡起义/660806/0/d4628535e5dde711d2e43127a7efce1b9d166128?bk_fr=view_summary 大泽乡起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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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인물]] |
2017년 7월 3일 (월) 13:43 기준 최신판
개요
진승은 양성(陽城,하남성 등봉현 동남쪽) 출신이며 머슴살이를 하는 농민 출신이다. 자가 섭(涉)이여서 진섭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오광과 함께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진승의 난
배경
진나라 이세황제 시대에 조정은 여문(마을 어귀의 문, 빈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왼쪽에 사는 사람들을 징집해 어양(漁陽,북경시 밀운 서남쪽)에서 수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진나라 장교는 900여명의 머슴, 소작농들을 뽑고 그 중에 이들을 이끌 인솔자들을 뽑았다.장교는 쓸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여러 명의 둔장(屯長)을 선발했다. 둔장 중에 하남 성 출신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진승은 기원전 209년에 그의 동료인 오광을 포함한 약 900명의 인원과 함께 어양으로 이동했다. 이동중에 대택향(大澤鄕,,지금의 안휘성 숙현 동남쪽)을 지나가는데 큰 비가 계속와서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진나라의 형법은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제 시간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참수를 당하기 때문이다. 진승은 같은 처지인 오광과 상의하여 900명의 둔장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봉기(진승•오광의 난)
기원전 209년에 진승은 그의 동료 오광과 함께 대택향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진승.오광의 난이다. 대택향에서 발생했다고 해서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라고도 불린다.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킬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신을 이용하고 인물을 사칭했다.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써서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먹도록 시켰다. 사람들은 물고기 배속의 진승왕이라고 쓴 백서(帛書)를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또한 진승은 오광을 시켜 밤에 몰래 황폐한 사당에 가서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대흥초 진승왕(大興楚 陳勝王)'이라고 외치도록 했다.
이러한 소란에 수졸들은 크게 놀랐고 진승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진나라의 왕자 부소와 초나라의 항연을 가장해서 반란을 선포했다. 이둘은 모두 그 당시 진나라에 반감이 있을법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소는 진시황의 뒤를 이은 이세황제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이세황제에 반감을 가진 부소의 추종자들이 아직 존재했다. 또한 항연은 초나라 최후의 명장으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존재했다. 진승과 오광은 이들의 이름을 빌려 반란에 대한 명분과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압송해온 관리 2명을 살해했다. 진승은 사람들을 모아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라고 하며 자신의 뜻을 호소했다. 나라 이름을 '대초'라고 명명했다. 진승은 장군의 지위를 맡고 오광은 도위의 지위를 맡아 대택향을 공격하고 바로 뒤에 기현을 점령했다.
반란 과정
장초 건설
기현을 점령하고 나서, 진승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은 영역을 더 넓혀갔다. 부하인 갈영을 중심으로 기성 동쪽 지역인 질,찬,고,자,초를 모두 점령했다. 진현에 도착해 점령할 때, 진승의 반란군은 수레 육칠백 대, 기병 일천여명, 병사 수만명에 이르는 큰 세력이 되어있었다.진승 사람들은 진승에게 왕이 될 것을 권유했다. 오직 장이,장여만이 그가 장군으로 남아 왕족의 후예를 왕으로 새울 것을 권유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국호를 '대초'에서 '장초'로 바꾸었다.
세력 확장
진승은 오광을 왕의 대리로 임명해서 다른 장수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삼천군으로 진군하게 했다. 오광은 형양을 포위했는데 삼천 군수 이유(李由)의 수비가 강력해서 형양을 점령하기 어려웠다. 진왕은 여러 인재들을 모아 형양을 점령할 방법을 논의했고 상채사람인 채사를 상주국으로 삼았다. 진승은 진현 사람인 무신, 장이, 진여가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여음 사람인 등종은 구강군을 공격하게 했다. 위나라 사람인 주불은 북쪽의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했다. 어진사람인 주문을 등용해 진나라 서쪽을 공격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진나라 장수 장한의 공격으로 패배하였다.
동쪽 지방의 공격을 책임지고 있던 갈영은 동성에서 양강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세웠다. 이후에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양강을 죽이고 와서 진승에게 알렸지만 진승은 갈영을 곧바로 죽였다.
몰락
진승의 몰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내부적으로 살펴보면, 진승은 왕이 된 후에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오만해져갔다. 한 일화를 예로 들면, 진승의 친구중에 같이 고용살이를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친구는 궁전을 보며 진승이 왕이 되더니 궁전이 화려하고 높구나 하며 감탄했다. 화섭위왕(夥涉爲王)이라는 말은 이 일화에서 유래한 성어이다. 이 친구는 진왕의 친구라는 신분으로 예의없이 행동했다. 한 신하는 이에 대해 진승에게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처형당했다. 진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츙성스러운 신하들을 잃었다.
대외적으로 살펴보면, 진나라의 반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진나라의 장수 장한은 오서를 격파하고 진현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진승의 뛰어난 장수 채사가 전사했다. 진승은 여음으로 후퇴해 하성보에 머물렀다. 그 당시 마부였던 장고는 진승을 살해하고 진나라에 투항하면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진승은 탕현에 묻혔다. 그리고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후에 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평가
진승은 머슴이라는 미천한 신분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에 반기를 든 계기는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승의 반란은 여러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첫째는 천한 신분인 머슴이 나라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신분을 초월한 하극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군주가 먼저 민심을 잃고 도를 잃었을 경우에만 하극상을 일으킬 수 있다.
둘째는 그의 반란이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진승의 반란의 중요성을 인지한 사마천은 그를 열전이 아닌 세가에 기록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고 후사도 없지만 민심을 잃고 가혹한 정치로 무너진 진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새웠다는 점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태사공 자서에서 그에 대한 평은 이렇다."걸왕과 주왕이 왕도를 잃자 탕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나라가 도를 잃다 '춘추'가 지어졌고, 진나라가 정도를 잃자 진섭이 나타났다."
현대 중국에서도 진승이 일으킨 난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중국’사회에 대항해 발샐한 최초의 농민봉기라는 점에서 위대하게 평가한다. 진승과 오광은 인민해방 투쟁의 시초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반란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계급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민해방 투쟁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참고자료
사마천,사기세가,김원중 옮김,민음사, 2011.
사마천, 사마천 사기, 노만수 옮김, 일빛,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