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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뚜강까지 빠른 시일에 다다르려면 이족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마오쩌둥은 이민족을 다루는데 신중했다.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홍군은 이족에게 공격을 받아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보청이 이족과의 협상을 위해 파견된다. 홍군은 혁명이 성공하면 이족들의 자치를 인정해 주겠다는 조건과 함께 협상에 성공하고 류보청은 이족의 족장인 샤오예딴과 함께 닭의 피를 마시며 피를 나눈 형제가 된다. 산세에 익숙한 이족은 홍군을 국민당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고 홍군은 무사히 따뚜강에 도착한다. 하지만 따뚜강의 건너 지점에는 이미 장제스의 군대가 주둔한 상태였다. | 따뚜강까지 빠른 시일에 다다르려면 이족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마오쩌둥은 이민족을 다루는데 신중했다.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홍군은 이족에게 공격을 받아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보청이 이족과의 협상을 위해 파견된다. 홍군은 혁명이 성공하면 이족들의 자치를 인정해 주겠다는 조건과 함께 협상에 성공하고 류보청은 이족의 족장인 샤오예딴과 함께 닭의 피를 마시며 피를 나눈 형제가 된다. 산세에 익숙한 이족은 홍군을 국민당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고 홍군은 무사히 따뚜강에 도착한다. 하지만 따뚜강의 건너 지점에는 이미 장제스의 군대가 주둔한 상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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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두강은 칭하이성의 오지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시작되는 강이다. 이 강은 조류가 세고, 강벽도 좁으며, 거대한 바위들이 많아서 매우 위험한 장소였다. 홍군이 대장정을 할 시에는 이 따뚜강에는 하나의 다리 밖에 없었다. 루띵교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쇠사슬로 이루어진 조교로서 총 13개의 쇠사슬 중 9개의 쇠사슬이 바닥부분을 구성하였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강을 건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이 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거대한 그물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이다”라고 말했고 1908년의 한 미국 여성 탐험가는 이 다리를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 따두강은 칭하이성의 오지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시작되는 강이다. 이 강은 조류가 세고, 강벽도 좁으며, 거대한 바위들이 많아서 매우 위험한 장소였다. 홍군이 대장정을 할 시에는 이 따뚜강에는 하나의 다리 밖에 없었다. 루띵교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쇠사슬로 이루어진 조교로서 총 13개의 쇠사슬 중 9개의 쇠사슬이 바닥부분을 구성하였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강을 건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이 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거대한 그물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이다”라고 말했고 1908년의 한 미국 여성 탐험가는 이 다리를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
2017년 12월 18일 (월) 14:05 판
목차
개요
중국 장시성에 주둔해 있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1만 킬로미터를 이동한 대행군. 서쪽으로 천도한다는 의미에서 ‘대서천(大西遷)’이라고도 불린다. 출발 당시 8만 6천여 명에 달하던 홍군 병사들이 대장정을 마칠 즈음에는 6천여 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대장정의 과정 중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하지만 장정이 있었기에 공산당은 중국의 많은 지역에 홍군과 공산당의 이름을 알릴 수가 있었고,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지휘권을 확립할 수가 있었다. 군사학적으로만 본다면 많은 병사들이 처참히 죽어간 실패한 후퇴 작전이지만, 대장정은 혁명을 위한 공산당 병사들의 의지와 열정, 인간승리의 극치를 보여준 대서사시이자, 중국이 혁명을 성공할 수 있게 한 발판이었다.
대장정 배경
대장정 이전의 상황
1931년 장시성에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된다. 소수의 혁명가들로부터 시작된 공산당이 수만에 이르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고, 남경에 있는 국민당 정부를 위협할 수 있게 되자 국민당의 주석이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위협감을 느낀다. 장제스는 혁명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의 근거지를 궤멸시키려 포위작전(초공전(剿共戰)이라고도 불린다.)을 감행한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제 1방면군은 장시성에서 위치해 있었고 장궈타오(张国焘장국도)의 제 4방면군은 안휘성을 기점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병력과 무기에서 월등히 앞서는 국민당이었지만 매복과 특유의 게릴라 전술을 쓰는 홍군 앞에서 장제스의 작전은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1931년 9월 18일 장제스는 장시성으로 다시 군대를 집결했다. 장제스의 정예부대 수만 여명은 공산당에게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갑작스럽게도 이 날 일본의 관동군은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이어 대륙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장제스는 포위를 포기하고 군대를 북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포위를 포기하고 군사를 물렸어도 일본과의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문제를 일본의 침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국내의 일들를 모두 해결한 뒤 외세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라는 정책에 따라 일본과 탕구(塘沽) 정전협정을 맺는다. 이는 일본군의 만주지역 침략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 토벌작전에 나선다.(4차 포위공격) 하지만 전면전만을 고수하는 그의 전략은 게릴라와 매복을 주요 전략으로 삼는 홍군에 의해 다시 실패하고 만다.
마오쩌둥의 강등과 5차 포위공격
마오쩌둥의 잇단 승리로 인해 모스크바의 중앙위원회는 마오쩌둥에게 매복 작전보다는 전면전으로 전쟁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병사들의 희생을 염려한 마오쩌둥은 이에 불응한다. 이에 소비에트에서 훈련받은 28인의 볼셰비키분파[1]와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 이름은 이덕(李德))은 마오쩌둥을 강등 시킨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그동안 이룩해 온 것들을 모두 빼앗겨 버리고 지휘권을 빼았겨 버렸다. 평소 마오쩌둥의 게릴라 작전에 불만이 있던 오토 브라운은 군사 지휘권을 가지게 되자 모든 홍군에게 흙과 나무로 만든 보루를 지어 홍군의 기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다음 포위공격을 준비하면서 장제스는 앞선 4차례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 휘하에 있던 독일군 참모총장 한스 본 제크트를 고문으로 초빙한 뒤, 1933년 12월 5차 포위공격을 감행한다. 국민당군은 이전처럼 홍군을 향해 돌격하기 보다는 철조망과 방벽을 이용하여 중화소비에트를 둘러싼 모든 지역을 봉쇄하는 전략을 실시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공산당 지역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과 도로들은 차단된다. 오토브라운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작전과는 달리 진지전(陣地戰)[2]을 고수했는데, 게릴라의 특성인 기동성과는 반대로 고정적인 진지에서만 전투를 하는 진지전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수품 차이를 비교해볼 때 패배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5차 포위공격 때문에 이듬해 34년 10월, 홍군은 영토의 58%를 국민당에게 잃고, 불과 6개의 현만을 남기게 된다. 붕괴직전의 수뇌부는 장시성을 나가려는 결정을 내린다. 홍군의 신문인 <홍색중화紅色中華>의 1934년 9월 29일자 기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 “为了保卫苏区,粉碎五次‘围剿’,我们有时在敌人优势兵力的压迫之下,不能不暂时的放弃某些苏区与城市”。-1934年9月29日的《红色中华》“소비에트 지구를 보위하기 위해, 5차 포위공격을 분쇄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적의 우세한 병력에 의한 공격에 의해 잠시 몇몇 소비에트 지구와 도시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3]
공산당 수뇌부는 기나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산당 지휘부조차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장시성을 탈출하는 작전이 대장정이라는 기나긴 행군이 될 줄은 몰랐다.
경과
대장정의 시작
1934년 10월, 일단의 병력이 위뚜강을 건너면서 장정은 시작된다. 공산당은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이동 시키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 선발대가 있었고, 이 대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10월 12일 당 중앙기구는 위뚜에 도착 했으며, 마오쩌둥은 10월 1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퇴각하는 홍군에 합류하여 장정에 오르게 된다. 중앙 공산당 지휘부는 일반 병사들에게 이 행군이 어떤 작전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홍군들은 자신들의 이동이 어느 전투에 참전하거나, 국민당의 포위를 뚫기 위한 이동으로만 생각했다.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국민당군의 포위를 직접적으로 뚫고 나가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였다. 하지만 오토브라운은 제2 방면군이 자리 잡고 있던 후난성을 다음 거점으로 삼기위해 남서쪽으로 국민당의 포위를 뚫고 나가는 작전을 주장했다. 국민당군은 제 2방면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수십만의 국민당 병사들은 홍군들의 예상 경로마다 배치되어 홍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군들과의 전투를 앞에 두게 되자, 당시 광둥성의 군벌이었던 천지탕(陳濟棠진제당)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광둥성 군대가 홍군을 공격할 경우, 병사들의 손실이 물 보듯 뻔했고, 장제스는 이때의 어부지리를 노려 자신이 실권을 지고 있는 광둥성을 점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천지탕은 홍군을 공격하는 듯 하면서 교묘하게 그들을 보내주는 계략을 생각해낸다. 천지탕의 광둥성군과 홍군은 비밀 협약을 맺는다. 장제스와 지방 군벌간의 알력다툼 덕분에 홍군은 장시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두 군 사이의 협약은 다음과 같다.
- “五項協議”: 1.就地停戰,取消敵對局面 2.﹔互通情報﹔ 3.解除封鎖﹔ 4.互相通商,必要時紅軍可在陳的防區設后方,建立醫院﹔ 5.必要時可以互相借道,紅軍有行動事先告訴陳部,陳部撤離40華裡。”
- 1. 전쟁을 즉시 멈추고, 적대적인 국면을 없앤다. 2.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3. 봉쇄를 해제한다. 4. 서로 통상을 하며, 필요할 시 홍군은 천군(천지탕군)의 방어구역의 후방에 병원을 설립할 수 있다. 5. 필요시 서로 길을 빌릴 수 있고, 홍군은 움직이기 전에 천군에 이를 알리고, 천군은 40리 밖으로 철수한다. [4]
- “五項協議”: 1.就地停戰,取消敵對局面 2.﹔互通情報﹔ 3.解除封鎖﹔ 4.互相通商,必要時紅軍可在陳的防區設后方,建立醫院﹔ 5.必要時可以互相借道,紅軍有行動事先告訴陳部,陳部撤離40華裡。”
샹강전투
홍군이 장시성을 벗어나 행군할수록 국민당은 지상뿐만 아니라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 어떠한 대공(對空)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홍군은 꼼짝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하기 위해 홍군은 야간에 행군을 했다. 마취제 등의 어떠한 수술용 도구도 없었기 때문에 홍군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군은 후난성과 광시성의 경계에 흐르는 샹강을 마주한다. 1934년 11월, 대장정을 시작한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홍군은 이 곳 샹강에서 덜미가 잡힌다. 홍군의 대열은 중앙대열을 중심으로 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류보청(劉伯承 유백승)은 이를 두고 "황제의 가마 행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5] 선두의 우측에는 린바오(林彪 임표)가 이끄는 1군이 자리했고, 좌측에는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의 3군이 자리했다. 그 뒤에는 9군이 중앙대열의 앞에서 이동했다. 대체적으로 신병들로 구성된 8군은 중앙대열의 좌측에 위치했고, 중앙대열의 뒤쪽으로는 짐꾼들이 따라왔다. 그리고 가장 후미에는 5군이 위치하여 뒤따라오는 국민당 군으로부터 중앙대열을 보호했다.
장제스는 홍군이 샹강을 도강하여 이동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중앙군에게 홍군을 추격하게 하고, 후난성의 군벌 허지안에게 이를 맡긴다. 그리고는 광시성과 광동성의 군벌들에게 샹강이 흐르는 지역인 싱안, 콴조우, 꽌양에 이르는 지역에서의 협조를 요청한다. 이렇게 장제스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으면, 지금의 중국 공산당의 모습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은 장제스의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광시성의 군벌인 바이충시는 광둥성의 천지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군대가 홍군과의 혈전을 통해 전력이 약해졌을 때, 장제스에 의해 광시성이 점령당하는 것을 우려했다. 바이충시는 11월 26일 홍군의 선봉 군대인 1군과 3군이 싱안(兴安)에 도착할 무렵, 자신의 군대를 싱안보다 남쪽인 꾸이린(桂林)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철수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홍군에게있던 문제는 뒤에 따라오는 느린 중앙종대와 부상자들의 행렬이었다. 선봉대가 샹강의 도강지점을 확보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중앙대열은 샹강에 도달할 수가 있었는데 이 중앙대열을 보호하기 위해 싸운 부대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홍군이 샹강을 모두 도강하였을 무렵, 남아있는 홍군의 군대는 3만여 명에 불과했다. 34사단의 병사들은 모두 전멸하기까지 했는데, 샹강전투의 큰 패배는 오토브라운과 보구(博古 박고)체제의 붕괴를 가져오는 기폭제가 된다.
쭌이회의(遵义会议)
샹강을 건넌 홍군은 군사적인 위협에서는 일단 벗어난다. 광시성과 광동성의 군벌들이 섣불리 홍군을 공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이저우성의 변경인 퉁따오 도착한 홍군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논의하려 퉁따오 회의를 개최한다. 공산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한 가지 방안은 원래의 계획대로 북쪽으로 진군해 하룡의 제 2방면군과 합류하는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이저우성으로 방향을 바꾸는것 이었다. 장제스는 홍군이 하룡의 제 2방면군과 합류하려 한다는 사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이에 대비해 군사들을 배치해 둔 상태였다. 이 회의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마오쩌둥은 원래의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고 공산당은 이를 수용한다. 홍군은 구이저우성으로 들어가 1월 7일 쭌이시를 손쉽게 점령한다. 쭌이회의는 1935년 1월 15일 쭌이시에서 열린 3일 간에 걸친 회의이다. 이 회의의 목적은 보구 등의 인물이 행한 잘못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회의의 참석자로는 다음과 같다.[6]
회의는 한 사람씩 연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회의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분위기는 마오쩌둥에게 기운다. 많은 간부들은 그동안 유지해온 오토브라운의 군사 지휘에 대해 불만을 토했다. 왕쟈시앙은 마오쩌둥에게 다시 군사 지휘권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모스크바에 유학을 갔다온 정통 볼셰비키인 허케관을 제외한 모든 당 간부들은 마오쩌둥을 지지한다. 이 회의를 통해 오토 브라운, 보구, 저우언라이의 삼두체제는 막을 내리고, 군사 지휘권은 주더, 저우언라이에게 귀속된다.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 위원회 의원이 된다. 당 지휘의 핵심인 상무위원회의 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월 19일 공산당은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체제 속에서 쭌이를 떠난다.
새로운 체제와 두 개의 승리 : 로우샨 전투와 우강 전투
쭌이회의에 의해 마오쩌둥]]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홍군에는 여러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영향에서부터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당 간부들은 처음으로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줄 수 있었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샹강 전투로 인해 많은 중장비들이 손실되고, 보급 중대가 해체됨에 따라 기존의 홍군의 특기였던 기동력이 돌아올 수 있기도 했다. 또한 마오쩌둥이 지휘권을 잡았기 때문에 국민당과의 전쟁을 함에 있어, 원래의 게릴라 전술로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홍군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 敌进我退-적이 오면 우리는 도망간다.
- 敌止我扰-적이 멈추면 우리는 적을 괴롭힌다.
- 敌避我击-적이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 敌退我进-적이 도망치면 우리는 추격한다.
마오쩌둥과 홍군은 하룡의 제 2방면군과 합류하기를 포기하고 쓰촨성에 있는 장궈타오의 제 4방면군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미 장제스가 북쪽의 평야지대, 중앙평원, 강 유역마다 군사들을 배치시켰기 때문에 서쪽으로 돌아서 올라가야만 했다. 서쪽에는 험악한 고지들이 홍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6년 2월 로우샨 고갯길을 앞두고 홍군은 행군을 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홍군이 로우샨에 다다르기 전에 그들을 궤멸시키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로우샨을 향해 달리기를 지시한다. 국민당이 도착하기 몇 분을 남기고 펑더화이와 제3군은 로우샨 고개를 먼저 점령할 수 있었다. 그때 국민당군은 고개에서 불과 30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던 국민당은 펑더화이와 3군에게 궤멸이 되었다. 국민당은 3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2천명이 홍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홍군은 국민당의 소총과 탄약을 노획했다.
이어서 국민당군은 우강으로 도망친다. 제1군과 3군은 이들을 전멸시키려고 추격하고 국민당군이 우강을 부교를 이용해 건너고 있을 무렵, 그들이 다 건너기 전에 홍군이 우강에 도착한다. 부교를 끊어버린 홍군에 의해 국민당군은 홍군에게 항복한다. 공산당은 이들에게 홍군에 합류할지, 아니면 자신의 가고 싶은 길을 갈지 선택권을 준다. 공산당의 목표에 관한 설득과 연설을 듣고 이들 중 약 80%가 홍군에 합류하였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여비를 주었다.[7] 이 승리는 병사들로 하여금 마오의 지휘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한다.
진사강(金沙江)과 이족(彝族)과의 만남
마오쩌둥의 전술은 장제스와 국민당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는 홍군을 일정하게 움직이게 하지 않고, 국민당의 도처에서 많은 방향으로 동시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국민당은 홍길동의 출현을 보는 마냥, 홍군의 본진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부의 홍군 병사들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이동에 불만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마오쩌둥의 전술은 국민당의 이목을 속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어느 지방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국민당의 군대를 유인해 낸 뒤, 빈 허점으로 이동을 하는 방식으로 마오쩌둥은 진사강에 당도하게 되고, 쟝차오만 노인 등 여러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홍군은 무사히 진사강을 도하한다.
진사강을 도강한 이후, 마오쩌둥의 다음 계획은 이민족의 지역을 통과하여 따뚜(大渡)를 건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 국민당군도 따뚜쪽으로 군사를 이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홍군에게는 또다시 시간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민족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가자 홍군은 이족을 만나게 된다. 이족은 교류가 없던 고립된 민족이었는데 중국인들을 두려워했고 증오했다. 장제스는 이들에 인해 홍군이 궤멸되길 바랐다.
따뚜강까지 빠른 시일에 다다르려면 이족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마오쩌둥은 이민족을 다루는데 신중했다.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홍군은 이족에게 공격을 받아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보청이 이족과의 협상을 위해 파견된다. 홍군은 혁명이 성공하면 이족들의 자치를 인정해 주겠다는 조건과 함께 협상에 성공하고 류보청은 이족의 족장인 샤오예딴과 함께 닭의 피를 마시며 피를 나눈 형제가 된다. 산세에 익숙한 이족은 홍군을 국민당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고 홍군은 무사히 따뚜강에 도착한다. 하지만 따뚜강의 건너 지점에는 이미 장제스의 군대가 주둔한 상태였다.
루띵교(漉定桥)점령
따두강은 칭하이성의 오지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시작되는 강이다. 이 강은 조류가 세고, 강벽도 좁으며, 거대한 바위들이 많아서 매우 위험한 장소였다. 홍군이 대장정을 할 시에는 이 따뚜강에는 하나의 다리 밖에 없었다. 루띵교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쇠사슬로 이루어진 조교로서 총 13개의 쇠사슬 중 9개의 쇠사슬이 바닥부분을 구성하였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강을 건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이 다리를 건너는 느낌이 “거대한 그물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이다”라고 말했고 1908년의 한 미국 여성 탐험가는 이 다리를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 “루챠오(루띵교)는 쇠사슬로 이루어진 조교로 유명하다. 그것은 370피트에 걸쳐 사나운 따뚜강을 가로지르며 흔들거리고 있다. 다리는 1701년에 가설 되었다. 열 세 개의 소시살이 다리 바닥면은 물론 측면까지 지탱해 주고 있지만, 뚫린 공간을 살펴보면 불규칙적으로 놓여진 바닥의 판자 측면의 고리를 연결해 주는 팰링이 거의 없고 전체 다리의 바람받이가 거칠고 소용돌이치는 강물 위로 당당하게 걸려있기 때문에 다리가 불완전하게 놓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인도, 티베트, 네팔 그리고 고(高)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여행자들은 인간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만들어진 미세한 거미집과도 같은 이 다리를 이용해 거친 따뚜강을 안전하게 건넜다. 이 다리는 미지의 중국 계곡에 숨겨진 신비의 매력과 마법을 가지고 있다.”[8]
처음부터 루띵교는 마오쩌둥과 홍군의 목표가 아니었다. 이들은 원래 따뚜강을 건너는 나룻터인 안순창(安顺场)이라는 곳에서 배를 타고 따뚜강을 안전하게 건너려고 했다. 하지만 국민당이 미리 수를 써놓아 안순창을 점령했을 때 획득한 배는 고작 한척에 불과했다. 홍군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따뚜강은 물살이 세기 때문에 한번 왕복을 하려면 1시간이 걸렸고, 얻은 배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한번에 40여 명 씩 밖에 이동을 못했다. [9] 만약 계속해서 이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널 경우,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과거 석달개와 태평천국군은 이곳 안순창에서 따뚜강을 건너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해 죽었는데, 국민당은 비행기를 이용해 홍군과 마오쩌둥을 태평천국군과 석달개에 비유한 선전물을 뿌리기도 했다.
마오쩌둥과 지휘관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고 이들은 루띵교를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루띵교를 점령하기 위해 제1군 2사단 4연대가 선발대로 뽑혔다. 연대장은 왕카이샹(王開湘)이었고, 정치위원은 양청우(楊成武)였다.
5월 27일 안순창을 출발한 이들은 29일까지 90마일의 거리(약 144Km)를 가야만 했다. 29일 새벽, 이들은 루띵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루띵교의 나무판자는 국민당이 치워버렸기 때문에 남은것은 13가닥의 쇠사슬뿐이었다. 랴오따주가 이끄는 2중대와 22명이 선봉대를 맡았고 이들은 쇠사슬 위를 기어서 반대편 적의 진지로 가는 임무를 맡았다. 2중대가 앞으로 나가면 3중대의 인원들은 판자를 뒤따라가며 깔았다. 반대편에 있던 국민당의 군사들은 다리를 아슬하게 건너오는 이들에게 총격을 했으나 결국 홍군은 루띵교를 완전히 점령하고 만다. 사상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를 두고 몇몇 사학자들은 홍군이 사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루띵교를 건너갔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홍군은 루띵교를 건넜고, 이 일이 국민당에게는 거대한 실책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설산
따뚜강의 도강이후, 홍군은 잠시 한숨을 돌렸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홍군을 쫓기보다는 목표지점에서 기다리다가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제4방면군의 장궈타오와 만나려 쓰촨성의 북부로 가려고 했다. 가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설산의 서쪽 행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상당히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른 방법은 대설산의 동쪽 행로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국민당 군에게 공격을 받을 위험이 많았다. 남은 방법은 대설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사실 대다수 홍군들의 출신은 중국의 남부지방이기에 눈은 이들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해발 4500미터에 이르는 고산(高山)을 넘은 경험도 전무했을 뿐더러, 8개월에 이르는 긴 행군기간 때문에 많은 병사들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게다가 대장정을 시작할 당시의 날씨가 더웠었기에 홍군병사들의 복장은 얇은 옷과 짚신이 전부였다. 몇몇 병사들은 맨발로 산을 올라야 했다. 여러 개의 능선을 넘으면서 병사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죽어갔다. 눈에 반사된 태양빛에 시력이 잠시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산할 때는 눈 위를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는데 이는 한시라도 빨리 능선을 넘어 산소가 있는 고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위험천만한 이 행동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야했다. 이곳을 넘으며 죽어간 병사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이후 몇몇 역사학자들과 홍군의 지휘관들은 이 대설산의 등반이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궈타오와의 만남.
대설산을 넘은 뒤, 마오쩌둥과 제 1방면군은 제 4방면군의 장궈타오와 만났다. 같은 처지의 홍군끼리 만났다는 사실에 제 1방면군과 제 4방면군은 매우 기뻤지만, 지도부 내에서는 이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다. 권력을 둘러싼 서로간의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장궈타오가 저우언라이와 얘기할 때, 장궈타오는 1방면군의 군사 수에 대해 물었다. 저우언라이는 장궈타오에게 되물었고, 장궈타오가 10만이라고 하자, 1방면군의 수를 3만이라고 하였다. ”[10]
둘의 대화에서는 과장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4방면군의 수는 마오쩌둥의 1방면군의 수보다 월등히 많았다. 장궈타오는 저우언라이를 제외하고도 펑더화이, 녜룽전, 주더 등과 따로 만나며 마오쩌둥과 그동안의 여정, 쭌이회의에 관하여 물어보기도 하였다.
일반 병사들 간에 표면적인 기쁨 이면에는 사실 마오쩌둥과 장궈타오 간의 불신과 알력다툼이 있었다. 공산당 지도부들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회의를 했다. 마오쩌둥은 모든 홍군이 계속해서 북으로 이동해 간쑤성의 남부를 점령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남쪽으로 내려가 청두를 점령해 공산당 근거지의 세력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기로 한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불만이 있었다. 그는 1만 명 안팎의 1방면군이 8만여 명에 이르는 4방면군을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초원
다시 북상을 하는 홍군 앞에는 대초원이라는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초원은 사실 초원이라기 보다는 늪지대가 대부분인 지역이었다. 대설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과, 대초원 자체의 지하수 때문에 사시사철 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고 나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끝없이 풀만 존재했다. 게다가 날씨마저 변덕스러워 비바람과 우박이 자주 내렸으며 바닥에 고인 물마저 마실 수가 없었다. 밤에는 기온마저 영하로 떨어져 많은 홍군들이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죽어갔다. 가장 큰 문제는 배고픔이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홍군은 가죽 허리띠를 끓여 먹는가 하면, 앞서 간 홍군들의 배설물에서 소화 안 된 음식물들을 골라 먹기도 하였다. 대초원을 행군하는 데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대초원을 지나고 나자 홍군에게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열
홍군은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나뉘어서 행군을 하였는데, 좌대는 장궈타오가 이끌었고, 우대는 마오쩌둥이 이끌었다. 주더와 류보청은 좌대에 있었고, 장궈타오의 사람인 수샹찬과 첸창하오는 우대에 속해있었다. 9월 3일 마오쩌둥에게는 홍수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없어 방향을 돌려 남하를 하겠다는 장궈타오의 무선 연락이 온다. 마오쩌둥과 지휘관들은 회의를 거쳐 장궈타오에게 다시 한 번 숙고하길 바란다는 서신을 보내지만 장궈타오는 생각을 바꾸질 않는다.
9월 9일, 장궈타오는 우대에 속해있는 자신의 수하인 첸창하오에게 서신을 하나 보내는데, 이 서신에는 우대(右隊)의 방향을 바꾸어 제4군과 합류하라는 말과 함께, ‘투쟁’하라는 말도 같이 들어가 있었다. 과거 장궈타오는 당내투쟁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간부들을 제거한 전력이 있었다. 이 내용으로 인해 홍군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서신은 에쟌잉에게 먼저 도달하고, 에쟌잉은 이 서신의 내용을 마오쩌둥에게 알린다.
펑더화이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장궈타오측의 인물들을 인질로 잡아 둘 것을 말하지만 마오쩌둥은 이에 반대하고 첸창하오와 만나 다른 제3군의 간부들과 회의를 한다고 말하며 떠난다. 이는 첸창하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었다. 그날 밤, 마오쩌둥과 제 3군은 몰래 북쪽으로 향한다. 이렇게 홍군은 다시 분열 하고 만다. 당시 장궈타오와 같이 있었던 주더와 류보청은 장궈타오에게 거의 인질이 되다시피 하여 잡혀간다.(하지만 장궈타오가 실제로 무력을 사용할 목적이 있었다는 부분에 관련해서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장정의 종장
마오쩌둥과 그를 따르는 몇 안 되는 병사들은 대설산, 대초원 그리고 티벳의 땅을 지나 다시 중국어가 들리는 중국의 땅으로 돌아왔다. 하다푸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서 발간한 신문에서 산시성 북부를 점령한 공산 소비에트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된다. 당시 산시성의 북부에는 류즈단(劉志丹)과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勛)이 게릴라 활동을 하며 자리 잡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제 1방면군은 이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935년 10월 20일, 대장정을 시작한지 정확히 368일만에 마오쩌둥은 장정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마오쩌둥은 장정을 끝내며 이런 시를 남겼다.
- 홍군은 고난의 장정도 두렵지 않은 듯
- 천수만산(千水萬山)을 가볍게 굽어보네.
- 오령의 산맥 높낮아지다가
- 잔물결로 멀어지고
- 오뭉의 굽은 층계들
- 겹겹이 푸르게 쌓여있네.
- 금사강의 격랑 뜨럽게 바위를 두드리고
- 대도하에 걸린 적교의 쇠사슬 차갑구나.
- 민산 천리에 신선한 눈 내리니
- 마침내 마지막 여정을 정복하고
- 은 웃음을 머금었네."[11]
- 홍군은 고난의 장정도 두렵지 않은 듯
대장정의 의의
대장정을 통해 홍군은 중국의 방방곳곳에 홍군과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퍼뜨린다. 수많은 농민들은 실제로 홍군을 접했고 그들의 호의에 의해 막연하게만 알던 공산주의와 홍군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다. 또한 침략해오는 공산당을 토벌하기에 급급한 국민당과는 달리 내셔널리즘을 일깨우며 항일을 주장하는 공산당의 모습은 중국 인민들의 공산당을 지지할 수 있게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정을 ‘대규모의 선전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어 보인다. 또한 대장정은 마오쩌둥이 권력의 1인자로 다시 복권할 수 있게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초기 지도자들을 배출한 과정이었다. 장정을 시작하기 전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던 마오쩌둥은 대장정 기간 중 쭌이회의를 통하여 다시금 권력을 되찾았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후 공산당 정부와 군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 대부분은 모두 대장정에 참가했던 생존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산당 내에서 자신들의 지휘를 확고히 했고 권력자로 남았다. 이들의 자녀들 역시 지금도 태자당(太子黨)으로서 남아있어 중국 공산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타
장정에 참여한 한국인
대장정 간의 여성 및 성(性)문제
대장정에는 30명의 여성 간부들과 수천 명의 일반 홍군 여성 병사들이 참가했다. 행군 간 남녀 간의 갈등 때문에 여성들로 이루어진 부대도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이름이 알려진 여성 중에는 류잉, 카이창, 강극청, 하자정, 리뿌자오 등이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장정 간에는 남녀 간에 성관계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성(性)으로 인한 문제가 많지 않았다.
장정 초기에는 남자병사들에 의한 강간 문제가 붉어지기도 했지만, 총살을 하는 등 기강이 엄격해지고 난 뒤 문제가 해결 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군 기강 말고도 성 문제가 적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병사들의 성에 대한 무지와, 동지의식, 그리고 서로에 대한 연대감이었다.헬렌 스노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성 홍군이 월경을 하는 것을 본 남자 병사는 “당신 부상당했군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홍군의 54퍼센트가 24세 이하였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성 경험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병사들의 경우, 당의 공식적인 동의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만약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를 기를만한 여유가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맡기거나 버려야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두 번 째 아내인 하자정 또한 홍강을 건널 즈음 딸을 출산하였으나 국민당에게 추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딸을 근처의 농민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 아이는 결국 발견되지 않는다. 대장정간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할 때면 고통을 받았고, 출산을 한 뒤엔 혁명과 아이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혁명을 더 중요시했다.
관련 사진
참고도서
-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두레, 1995년
- 해리슨 E. 솔즈베리, 『대장정 작은 거인 등소평』, 범우사, 1985년
- 웨이웨이, 『대장정 세상을 뒤흔든 368일』, 보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