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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영이 갑골문을 발견하게 된 일화는 정확하지 않아 각 자료마다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왕의영이 갑골문을 발견하게 된 일화는 정확하지 않아 각 자료마다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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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어느 여름날, 왕의영은 심한 학질에 걸리게 된다. 학질에 용하다고 해서 구해온 '용 뼈(龍骨)'에서 그는 희미한 글자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이 고대문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899년 어느 여름날, 왕의영은 심한 학질에 걸리게 된다. 학질에 용하다고 해서 구해온 '용 뼈(龍骨)'에서 그는 희미한 글자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이 고대문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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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일화에서는 다르게 서술되고 있다. 1880년 쯤, 한 농부가 하남성 안양 소둔촌 북쪽 부근에서 땅을 갈아 엎으면서 갑골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갑골은 희미하여 당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부호가 새겨져 있었고, 어떤 것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1889년, 산동성 유현(維懸)에서 범유경(范維卿)이라는 골동품상이 이 갑골들을 구매하게 된다. 그는 글자가 있는 이 갑골들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12편의 갑골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골동품 소장가이자 금석문(金石文)에 정통한 왕의영에게 보여주었다. 왕의영은 크게 기뻐하면서 후한 금액을 쳐주며 이 갑골들을 구매하고는, 범유경에게 계속 사들이게 했다.
 
또 다른 일화에서는 다르게 서술되고 있다. 1880년 쯤, 한 농부가 하남성 안양 소둔촌 북쪽 부근에서 땅을 갈아 엎으면서 갑골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갑골은 희미하여 당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부호가 새겨져 있었고, 어떤 것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1889년, 산동성 유현(維懸)에서 범유경(范維卿)이라는 골동품상이 이 갑골들을 구매하게 된다. 그는 글자가 있는 이 갑골들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12편의 갑골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골동품 소장가이자 금석문(金石文)에 정통한 왕의영에게 보여주었다. 왕의영은 크게 기뻐하면서 후한 금액을 쳐주며 이 갑골들을 구매하고는, 범유경에게 계속 사들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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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의 발견과 관련한 일화는 다르지만, 1889년이라는 발견 시기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 왕의영이 1889년 당시에 갑골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후 수집 및 연구에 착수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갑골의 발견과 관련한 일화는 다르지만, 1889년이라는 발견 시기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 왕의영이 1889년 당시에 갑골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후 수집 및 연구에 착수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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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갑골문의 연구에서 왕의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위대한 학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갑골문의 연구에 대한 그의 업적도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갑골문의 연구에서 왕의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위대한 학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갑골문의 연구에 대한 그의 업적도 끝나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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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던 갑골을 발견하고 널리 알린 것은 광범위한 한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던 갑골을 발견하고 널리 알린 것은 광범위한 한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12월 22일 (화) 12:40 판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1845∼1900)

개요

갑골문을 최초로 발견한 중국 청(淸)나라의 학자. 갑골을 알아본 후 갑골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던 인물이다. 당시의 뛰어난 문자학자이자 갑골문의 초기 수집가로 ‘갑골학의 아버지(甲骨之父)’라고 불린다.

생애

왕의영은 갑골문을 발견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듬해인 1900년, 서구의 연합 침략군이 북경에 진입하게 되고 당시 방어책임자였던 왕의영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의 이른 죽음은 갈곱문 연구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갑골문 최초의 발견자이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왕의영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산동성 연대(煙臺)시에는 '왕의영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업적

왕의영이 갑골문을 발견하게 된 일화는 정확하지 않아 각 자료마다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1899년 어느 여름날, 왕의영은 심한 학질에 걸리게 된다. 학질에 용하다고 해서 구해온 '용 뼈(龍骨)'에서 그는 희미한 글자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이 고대문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화에서는 다르게 서술되고 있다. 1880년 쯤, 한 농부가 하남성 안양 소둔촌 북쪽 부근에서 땅을 갈아 엎으면서 갑골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갑골은 희미하여 당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부호가 새겨져 있었고, 어떤 것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1889년, 산동성 유현(維懸)에서 범유경(范維卿)이라는 골동품상이 이 갑골들을 구매하게 된다. 그는 글자가 있는 이 갑골들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12편의 갑골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골동품 소장가이자 금석문(金石文)에 정통한 왕의영에게 보여주었다. 왕의영은 크게 기뻐하면서 후한 금액을 쳐주며 이 갑골들을 구매하고는, 범유경에게 계속 사들이게 했다.

갑골의 발견과 관련한 일화는 다르지만, 1889년이라는 발견 시기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 왕의영이 1889년 당시에 갑골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은 후 수집 및 연구에 착수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후 갑골문의 연구에서 왕의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위대한 학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갑골문의 연구에 대한 그의 업적도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던 갑골을 발견하고 널리 알린 것은 광범위한 한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하영삼, 『사진으로 떠나는 한자 역사 기행』, 도서출판3, 2018.
  2. 이운부, 『삼차원 한자학』, 하영삼, 김화영 역, 도서출판3,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