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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춘추오패]]의 한 명인 부차는 [[춘추]]시대 말기의 오(吳)나라 왕이다. 합려의 아들인 태자 부차의 나이 16세 당시, 오나라는 초나라를 부순 후 중원을 장악하고 패자로서의 위엄을 떨쳤다. 이때 오나라의 동쪽에 [[구천]](句踐)이 다스리는 월나라가 등장하여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br> | |
− | ==관련 | + | 월나라를 치려고 기회를 노리던 오나라는 윤상이 죽자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구천의 참모 범려가 뛰어난 전술로 오나라의 군대가 일격에 대파했다. [[합려]]는 죽기 전 태자 부차(夫差)를 불러 여러 차례 다짐을 주었다. 부차는 매일 밤마다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아버지의 한을 되새겼다. 부차는 대부 백비를 태재로 임명하여 나랏일을 보게 하고 자신은 군사훈련에 매달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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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를 안 월왕 구천은 선수를 치기로 했으나 크케 패했다. 오나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월나라의 수도 회계를 포위했다. 목숨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범려(范蠡)의 말을 들은 구천은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재물을 보내고 강화를 요청했다. 오왕은 구천의 화의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오자서]]가 이를 제지했다. 하지만 월나라 사신 문종(文種)는 재차 화의를 요청하였고 오왕은 화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승장구하던 오왕은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를 정복한 오왕 부차는 패자가 되었다. 이때, 월나라 구천 군사가 오나라를 쳐들어왔고, 오왕은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월나라 군사들은 오나라의 태자를 죽이고 유수 부대도 섬멸했다. 부차는 고소산으로 피신하고 대부 공손옹을 월나라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범려는 화의를 반대했으나 구천은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고, 4년뒤 구천은 군비를 강화해 오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부차는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부차는 자결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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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치부심(切齒腐心)=== | ===절치부심(切齒腐心)=== | ||
(갈 절, 이 치, 썩을 부, 마음 심)<br> | (갈 절, 이 치, 썩을 부, 마음 심)<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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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장작더미를 침대로 삼아 잠을 자리라!|오왕 부차}} | {{인용문|장작더미를 침대로 삼아 잠을 자리라!|오왕 부차}} | ||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한 후 절치부심의 각오로 장작 위에서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왕 합려가 월나라를 치려다가 크게 패한 데에 대한 복수 였다. |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한 후 절치부심의 각오로 장작 위에서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왕 합려가 월나라를 치려다가 크게 패한 데에 대한 복수 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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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臥薪嘗膽)=== | ===와신상담(臥薪嘗膽)=== | ||
(누울 와, 섶나무 신, 맛볼 상, 쓸개 담)<br> | (누울 와, 섶나무 신, 맛볼 상, 쓸개 담)<br> | ||
− | 섶나무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정신을 말한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의 젊은 제후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에 진 이 빚을 절대 잊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부차는 날마다 불편한 섶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를 향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리고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494년 마침내 월나라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참패한 월나라 구천은 명참모 범려의 의견대로 오나라의 탐욕스러운 재상에게 뇌물을 갖다 바쳤고, 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부차에게 공격을 멈추고 화평을 맺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작전이 성공해 간신이 멸망을 피한 구천은 이후 쓰디쓴 쓸개를 씹으면서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 부차에 대한 복수의 염을 키워 갔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을 상징하는 단어인 부차의 '와신(臥薪)'과 구천의 '상담(嘗膽)'은 이후 와신상담으로 불리면서, 미래의 재기를 기약하며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 + | 섶나무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정신을 말한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의 젊은 제후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에 진 이 빚을 절대 잊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부차는 날마다 불편한 섶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를 향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리고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494년 마침내 월나라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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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패한 월나라 구천은 명참모 범려의 의견대로 오나라의 탐욕스러운 재상에게 뇌물을 갖다 바쳤고, 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부차에게 공격을 멈추고 화평을 맺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작전이 성공해 간신이 멸망을 피한 구천은 이후 쓰디쓴 쓸개를 씹으면서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 부차에 대한 복수의 염을 키워 갔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을 상징하는 단어인 부차의 '와신(臥薪)'과 구천의 '상담(嘗膽)'은 이후 와신상담으로 불리면서, 미래의 재기를 기약하며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
2021년 3월 20일 (토) 00:39 기준 최신판
부차(夫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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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將) |
생애
춘추오패의 한 명인 부차는 춘추시대 말기의 오(吳)나라 왕이다. 합려의 아들인 태자 부차의 나이 16세 당시, 오나라는 초나라를 부순 후 중원을 장악하고 패자로서의 위엄을 떨쳤다. 이때 오나라의 동쪽에 구천(句踐)이 다스리는 월나라가 등장하여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월나라를 치려고 기회를 노리던 오나라는 윤상이 죽자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구천의 참모 범려가 뛰어난 전술로 오나라의 군대가 일격에 대파했다. 합려는 죽기 전 태자 부차(夫差)를 불러 여러 차례 다짐을 주었다. 부차는 매일 밤마다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아버지의 한을 되새겼다. 부차는 대부 백비를 태재로 임명하여 나랏일을 보게 하고 자신은 군사훈련에 매달렸다.
이를 안 월왕 구천은 선수를 치기로 했으나 크케 패했다. 오나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월나라의 수도 회계를 포위했다. 목숨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범려(范蠡)의 말을 들은 구천은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재물을 보내고 강화를 요청했다. 오왕은 구천의 화의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오자서가 이를 제지했다. 하지만 월나라 사신 문종(文種)는 재차 화의를 요청하였고 오왕은 화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승장구하던 오왕은 오자서가 죽은 다음 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를 정복한 오왕 부차는 패자가 되었다. 이때, 월나라 구천 군사가 오나라를 쳐들어왔고, 오왕은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월나라 군사들은 오나라의 태자를 죽이고 유수 부대도 섬멸했다. 부차는 고소산으로 피신하고 대부 공손옹을 월나라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범려는 화의를 반대했으나 구천은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고, 4년뒤 구천은 군비를 강화해 오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부차는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부차는 자결하였다.
관련 성어
절치부심(切齒腐心)
(갈 절, 이 치, 썩을 부, 마음 심)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의 태도를 가리키는 표현. 와신상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장작더미를 침대로 삼아 잠을 자리라!
” — 오왕 부차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한 후 절치부심의 각오로 장작 위에서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왕 합려가 월나라를 치려다가 크게 패한 데에 대한 복수 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
(누울 와, 섶나무 신, 맛볼 상, 쓸개 담)
섶나무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정신을 말한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의 젊은 제후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에 진 이 빚을 절대 잊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부차는 날마다 불편한 섶 위에서 잠을 자며 월나라를 향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리고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494년 마침내 월나라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아버지의 유언을 지켰다.
참패한 월나라 구천은 명참모 범려의 의견대로 오나라의 탐욕스러운 재상에게 뇌물을 갖다 바쳤고, 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부차에게 공격을 멈추고 화평을 맺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작전이 성공해 간신이 멸망을 피한 구천은 이후 쓰디쓴 쓸개를 씹으면서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 부차에 대한 복수의 염을 키워 갔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을 상징하는 단어인 부차의 '와신(臥薪)'과 구천의 '상담(嘗膽)'은 이후 와신상담으로 불리면서, 미래의 재기를 기약하며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참고 자료
- 이나미 리쓰고,『고사성어로 읽는 중국사 이야기』, 민음in, 2007
- 조관희,『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003
- 이형기,『인물로 풀어 쓴 이야기 중국사』, 아이템북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