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여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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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정의== | ||
− | + | [[파일:30년대_중국신여성.png|오른쪽|400픽셀]] | |
− | + | 신여성담론은 청말부터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여권을 향상시킨 담론에 폭넓게 적용된다. 하지만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신여성이라는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신청년]]이라는 잡지가 창간된 후이다. | |
− | + | 신여성의 맹아는 [[무술유신]]부터 서서히 자라났으며 [[신문화운동]]에 이르러 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여성 담론의 발현을 [[신문화운동]] 시기로 정의하고 청말부터 신문화운동 이전까지의 기간을 신여성 사상의 맹아기로 정의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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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여성 담론의 맹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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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 ||
+ | ====무술유신 시기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 ||
+ | 청조가 서구에 의해 무너지면서, 청조 내부에서는 부국을 위한 고민이 시작된다. 이 고민에서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이었다. 즉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여성상은 낙후된 중국 문화이며, 따라서 이들은 중국이 발전하기 위해선 발전된 서양의 여성 문화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 신여성 운동의 맹아라고 볼 수 있는 변화가 제안된다. 전족 반대운동과 여성 교육 운동이 대표적이다. [[강유위]]의 주도로 시작된 전족 반대 운동은 [[양계초]]에 의해 구체화 되었고 1897년 <전족반대동맹조례>로 구체화된다. 양계초를 필두한 지식인들은 (不纏足會)를 조직해 전족 반대운동을 시작한다. 더불어 이 시기 양계초를 필두로 중국 지식인들은 부국을 위해 중국 여성 교육의 필요성 재기한다. 양계초는 중국이 여성을 교육시켜야 하는 이유를 '소득을 나누어쓰는 폐단을 극복해야함', '여성의 재주없음을 극복해야 함', '교육을 통해 좋은 어머니가 되야 함',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태교를 해야 함'으로 정의한다. 양계초는 전통적인 여성을 전족과 같은 전통에 의해 능력이 상실된 존재로 정의하고, 중국이 가난한 이유를 능력이 없는 여성들과 소득을 나누어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성이 전족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육을 통해 경제적 능력을 얻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교육을 통해 중국을 이끌어갈 중국인의 바람직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방식의 중국 여성 계몽은 여성을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갖는다. 여성이 전통에서 벗어나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성이라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육아라는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시기 여성 계몽운동의 한계로 지목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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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술유신 이후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 ||
+ | 무술유신 이후 이런 한계를 인식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급진적인 지식인 [[김일]]은 여계종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 책에서 김일은 중국 여성의 대표적인 문제는 전족, 몸치장, 미신에 빠지는 것, 구속되어 사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여성의 능력이 저하되고 구속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첫번째부터 세번째 주장은 무술유신 당시의 지식인의 것과 동일하지만 네번 째 주장에서 김일은 이전까지 지식인들의 중국 계몽의 한계를 지목한다. 그가 주장한 중국 여성의 네번 째 문제인 구속되어 사는 것의 근본전인 원인은 결혼이었다. 그에게 전통적인 결혼이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구속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남녀간의 교제를 공개적으로 하고 혼인을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김일은 주장한다. 즉 김일에겐 중국 여성은 가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중국 여성 개인을 위해 계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당시 지배적인 담론이 아니었으며, 양계초나 강유위에 의한 현모양처를 위한 중국 여성 계몽이 여전히 지배적인 담론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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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이 시기 국가나 민간에 의해 실시된 여성교육이나 전족 반대는 진정한 신여성을 위한 계몽이라기 보단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여성상 양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성의 교육이 사회 전역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여성들이 교육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족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등장하게 된 점, 더불어 김일과 같은 진정한 신여성 사상을 가진 지식인이 등장했다는 점은 신여성 사상의 맹아가 이 시기에 서서히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 ||
− | == | + | ===신해 혁명 시기 남녀 불평등 문제 제기=== |
− | + | 신여성의 맹아는 [[신해혁명]] 시기에서 좀 더 성숙한다. 혁명군이 무한에서 세 곳의 진영을 점령하고 병력이 부족해 징집 광고를 내자 [[오숙경]]이라는 여성은 무한 혁명 정부의 대도독이었던 [[여원홍]]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도 군대에 들어와 힘을 보태고 싶다고 주장했다. 여원홍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오숙경은 혁명에서 남녀간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고 여원홍을 설득해 여원홍은 대대적으로 여군을 모집하게 된다. 이런 여군에 대해 대중들은 뜨겁게 반응했으나, 신해혁명 간부들은 여성의 참전을 조롱거리로 생각했다. 신해혁명의 간부들이 여성의 참전을 동의하자 않자 오숙경의 여군은 곧 해산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은 혁명에서 여성이 제한적인 지위밖에 갖지 못하는 현실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남경 임시정부에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신주여계참정동맹회, 여자동맹회 같은 단체가 생겨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한다. 실제로 당군영 등 20인을 대표로 하는 신주여계참정동맹회, 여자동맹회와 같은 단체들은 임시정부 약법에 남녀 평등 조문을 넣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임시 약법에 이런 내용은 들어가지 않자, 여권 운동가들은 분노하여 여자참정동맹회의 당군영을 대표로 손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다. 이들의 항의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의원의 유리창을 깨고 경비를 걷어차는 등의 난폭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즉 이 시기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과 불평등 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통에서 벗어난 신여성 사상의 맹아가 발현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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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신여성 담론의 발현기 및 전성기: 전통으로부터의 여성 해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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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신여성 담론의 발현=== |
− | + | [[파일:신청년.jpg|오른쪽|180픽셀]] | |
− | + | [[진독수]]에 의해 발간된 [[신청년]]이 등장하게 된 시기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했던 시기와 비슷하다. [[신해혁명]]을 통해 봉건에서 벗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위안스카이에 의해 다시 봉건제도로 돌아가게 될 위기를 느낀 진독수는 계몽을 통해 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진독수는 봉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몽시켜야 할 대상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진독수는 청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신청년]]을 발간하게 된다. 신여성 사상은 이 잡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발현되며, 결혼제도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주체로써의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 |
− | + | 잡지 신청년에서 진독수는 여성 계몽을 이끌어나간다. 그는 신청년 창간호부터 여성해방을 다룬다. 아래 글은 그가 신청년 창간호에 실었던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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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파일:진독수.jpg|왼쪽|280픽셀]] | |
+ | "세상은 근대 유럽 역사를 해방의 역사라 칭한다. 군권을 깨뜨려 정치적 해방을 추구하고 | ||
+ | 교권을 부정하여 종교적 해방을 추구하며 균산설 均産說을 일으켜 경제적 해방을 | ||
+ | 추구한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으로 남성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한다." -[[신청년]], [[진독수]] | ||
+ | 더 나아가 그는 신여성 담론의 확대 생산을 위해 [[여자문제]]라는 글에서 여성계몽의 필요성을 밝히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 ||
− | + | "여성은 국민의 반수를 차지한다 가정에서 특히 무상의 책임을 지고 있다 국가사회의 개진을 위해서라도 여자문제는 방치할 수 없다. | |
− | + | 여성 교육 여성 직업 결혼 이혼 재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동거 독신 생활 피임 여성 참정 법률상 여성권리 등은 여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로서 이 중 하나를 선택하여 | |
− | + | 자신의 소견을 본지에 발표해 주시기를 여성 여러분에게 감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여자문제]], [[진독수]] | |
− | + | 진독수는 여성을 구속하는 요소로 전통을 지목하고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을 강하게 비난한다. 실제로 그는 그의 글에서 "서양에서 여성들의 재가는 결코 사회에서 천시되지 않는다 중국의 예법에는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지 않는다라는 법도가 있어 두 주인을 섬기거나 아내가 두 남편을 섬기면 모두 절개 없는 행동으로 치욕이라고 간주한다 서양은 변호사 의사에서 점원 여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개척해 나간다. 그러나 공자의 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녀 간에 직접 주고받는 것은 안 된다. 남자는 안에서 하는 여자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에서 하는 남자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아내는 남편의 부속품이므로 아내는 당연히 남편에게 부양되어야 하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성을 억압하는 공자를 비판한다.더불어 그는 1915년 11월에 발표한 [[유럽 여걸 7인방]]을 통해서 여성의 능력없음을 당연시하는 중국 사회를 비판하며, 다시 한 번 청년들에게 여성 계몽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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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여성의 지능이 박약한 것 같다는 이유를 핑계로 매번 남성은 여성을 무시했으며 국민의 지적 수준이 낮다는 이유를 핑계로 정부는 매번 민권을 유린했다 이것은 모두 | |
− | + | 일시적인 환상만을 대변한 것으로 그 본질을 깊이 탐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본질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유럽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성의 공적을 중국 남성과 | |
− | + | 비교하면 어찌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칭송받는 유럽 여걸 인방을 여기에 기록하오니 중국 청년 여성 동포들이 느끼는 바가 있기를 희망한다." | |
− | + | -[[유럽 여걸 7 인방]], [[진독수]] | |
− | + | 또한 1916년에 신청년에 기고한 [[1916년]]이라는 글에서 진독수는 여성들에게 "정복자의 자리에 스스로 거하고 피정복자의 자리를 자처하지 말라", "개인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부속품이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글을 계기로 많은 지식이들은 신청년에 여성과 관련된 글을 투고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주작인이다. [[주작인]]은 [[신청년]]에 [[여사야정자]]의 글을 번역한 [[정조론]]을 투고한다. 이 글은 전통적으로 여성에 도덕적 의무로 강요되어 왔던 정조는 사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취향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중국 여성을 억압하던 전통들 역시도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작인은 주장한다. 이 글은 당시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정조문제]], [[나의 정절관]]과 같은 글로 이어지며 신여성 담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적]]과 같은 지식인들은 신여성의 모습을 다룬 서양의 문학작품을 앞다투어 소개했으며 이를 통해 중국 신여성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구체화 시켜갔다. | |
− | + |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신여성 담론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전통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여성들에게 강조되어 왔던 정조 등의 전통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학에서 다뤄지는 여성상이나 서양의 여성인식은 중국 신여성 담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신여성담론은 여성의 재가, 이혼, 시어머니문제, 피임 등의 가정적 영역부터 참정권, 직업, 여성권리 등의 사회적 영역까지 폭넓게 전개되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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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파일:5.4운동.jpg|왼쪽|300픽셀]] | |
− | + | ===신여성 담론이 가져온 사회 변화=== | |
− | + | 신문화운동에서 논의된 신여성 담론은 여성 권리 향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신여성 담론은 여성의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이나 생활습관의 변화와 같은 개인적 부문과 더불어 참정권, 노동권 등의 사회적 부문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 |
− | + | ====교육==== | |
− | + | 먼저 교육부분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전까지 나뉘던 남과 여의 교육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광범위하게 받아드려졌다. 먼저 소학교에서 남녀공학이 보편화 되었고, 대학에서도 여성의 입학을 허락한다. 실제로 1922년에는 대학에서 이전까지 전무하던 여성 신입생이 665명이 입학한다. 이는 무술유신 이전부터 성장하던 교육의 평등이라는 맹아가 발현되었음을 시사한다. | |
− | + | ====직업==== | |
− | + | 신여성 운동은 직업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5.4운동 이전에는 여성의 직업에는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신여성운동은 이런 제한을 서서히 제거했다. 실제로 5.4 이후 남자 학교에서도 여교사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경, 천진, 상해 등의 대도시에서는 여주가 운영하는 상점도 생겨났다. 즉 신여성운동을 통해 적어도 지식인 계층에서는 여성들도 능력만 갖추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겼다. | |
− | + | ====정치==== | |
− | + | 신여성운동은 신해혁명부터 시작되었던 여성의 참정권 요구를 이어 받아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다. 이런 요구를 위정자들은 더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고등교육를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여성 지식인들이 다수 등장하였고, 능력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이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여성은 점차 정계로 나아갔고 대중 여성의 참정권도 서서히 등장한다. 실제로 광동의 임시성의회는 여성에게 한정적인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여성의원 10명이 선출되었다. 또한 호남성에서는 비슷한 시기 남녀평등 조항을 법률에 추가하고 여성 의원 왕창국을 선출했다. | |
− | + | ====생활==== | |
− | + | 더불어 신여성 담론은 여성 생활 전반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미치게된다. 실제로 과거에 여성의 상징이었던 전족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것이라는 의식이 공통적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전통적인 머리카락과 의복 역시도 여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여성 지식인들은 머리를 자르고 개량된 의복을 입었으며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더불어 신여성 운동은 결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결혼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자유 연애를 추구했다. 즉 신여성운동을 통해 적어도 지식인 계층은 결혼의 조건의 부모나 가족의 동의가 아닌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라는 의식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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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중국 신여성 담론의 한계: 루쉰의 사상을 중심으로== |
− | + | ===루쉰과 신여성담론=== | |
+ |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을 기반으로 진행된 신여성 운동이 중국 여성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운동을 통해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정치에 일정부분 참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직업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시기 신여성사상에 대한 한계가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지적되기 시작했다. 이런 한계를 지적한 사람 중 대표적인 지식인은 [[루쉰]]이다. [[파일:루쉰.jpg|오른쪽|200픽셀]] | ||
+ | 1917년 루쉰이 신청년에 기고한 [[나의절열관]]을 보면 그는 여성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므로 남편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면 되고, 그가(남편이) 살아있으면 물론 빼앗길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루쉰에게도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은 남성의 물건이라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더불어 루쉰은 “정복당한 국민이 되어보호할 힘도, 저항할 용기도 없어지면 하는 수 없이 이상한 묘안을 짜내어 여자들의 자살을 고취시킨다.”라고 말하며 전통적인 여성을 대하는 남성과 사회를 비판한다. 이런 루쉰은 [[신문화운동]]과 [[5.4 운동]]에 등장한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신여성 사상을 신여성 담론 초기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여성 사상으로 발현된 신여성의 삶의 모습은 루쉰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그는 소설 [[애도]]와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통해 신여성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 ||
− | + | ===소설 [[애도(傷逝)]] 속 신여성담론의 한계=== | |
+ | 루쉰은 신여성 운동이 실행되어 신여성의 삶이 어느정도 실현이 되었을 무렵인 1925년에 [[애도(傷逝)]]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신여성을 삶을 사는 쯔쥔은 애인인 쥐엔셩과 함께 동거를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경제와 가사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점점 불행해지고 결국 쯔쥔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죽게된다. 쯔쥔에 죽음에 대해 쥐엔성은 반성하며 소설은 끝난다. 루신이 이 소설에서 지적하는 신여성 담론의 한계는 남성 지식인과 신여성 담론과 현실의 괴리에 있다. 쯔쥔은 동거를 시작한 후 집안일 때문에 지적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쥐엔셩은 동거 후 가사 활동을 하지 않고 지적 활동에만 열중하게 된다. 이에 따라 쯔쥔은 쥐엔성이 사랑했던 지적인 신여성적인 모습을 잃어가고, 쥐엔셩은 결별을 선언한다. 즉 가사는 여성의 것이라는 전통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쥐엔성의 모습은 당시 신여성 사상을 추구하는 남성 지식인들 조차도 여성 소유라는 전통적인 남성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쥐엔성은 자유연애를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되고 이는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는 당시 신여성 사상을 대한 사회의 냉담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파일:쉬광핑1.PNG|왼쪽|200픽셀]] | ||
+ | 즉 루쉰이 바라본 신여성의 한계는 남성과 사회에 있었다. 신여성담론을 만들어가는 지식인들 조차도 신여성을 자유연애를 위한 대상이자 소유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 등장한 신여성 담론 역시도 여성을 남성에게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더불어 신문화운동이 지식인 계층에 국한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여성 담론을 가지 못한 대중들에게 신여성이란 그저 부정한 여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여성 사상으로 집을 나온 신여성들로 하여금 중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 환경을 조성하는 요인이었다. 이는 루쉰이 생각하는 신여성 담론을 바라보는 사회의 한계이다. | ||
− | + |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 속 신여성담론의 한계=== | |
+ | 루쉰은 뒤에 발표하는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통해 이런 신여성의 한계를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이 산문에서 루쉰은 신여성을 대표하는 노라가 집을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타락'아니면 '회귀'이라고 정의한다. 남성 지식인들이 신여성을 독립적 주체가 아닌 자유연애에 대상으로 생각하고 소비했기 때문에, 연애라는 환상이 끝나면 신여성과 신여성담론은 존재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경제권을 갖지 못한 신여성들 중 일부는 다시 봉건적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봉건적 삶으로 돌아간 신여성은 이제 예전과 같은 전통적 여성의 지위를 갖을 수 없다. 왜냐하면 봉건적 관점에서 신여성의 길을 가다가 돌아온 여성은 부정적인 여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권을 어떻게든 마련해 신여성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타락한 여성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루쉰이 주장한 해결 방법은 경제이다. 즉 여성이 돈을 갖고 있을 때, 온전한 주체로써의 신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
− | + | ==참고문헌== | |
+ | * 김은희," 5.4신문화운동기(新文化運動期)중국의 신여성(新女性)연구",『중국어문학지』, 2009, 30권0호 : 125-150 | ||
+ | * 이화여자대학교 중국여성사 연구실, 『중국여성 신화에서 혁명까지』, 서해문집, 2005 | ||
+ | * 전형준, " 루쉰 소설의 페미니즘적 해석에 대한 재검토",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2013, 51 : 69-87 | ||
+ | * 유세종, " 루쉰의 여성 해방 운동", 『중국어문논역총간』, 2001, 8집 : 143-166 | ||
+ | * 황선미 "번역가로서의 천두슈(陳獨秀)와 여성해방",『동아시아 문화연구』,2010 , 제48집 : 271-298 | ||
+ | * 진동원,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박이정, 2005 | ||
+ | *百度百科, 伤逝, http://baike.baidu.com/link?url=gWrnm9WzhWQBBm0Ag41A-5rxTP0_mkE9ChwxmFh26kqMw_WWbi4YCy5A65XGnN8Mkc8KA6GQdnEMxMlpvbF60yVrEbL9y7eXzSbFFvxjmUm | ||
+ | [[분류:중국의 역사]] |
2022년 12월 28일 (수) 04:09 기준 최신판
목차
중국의 신여성 담론
정의
신여성담론은 청말부터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여권을 향상시킨 담론에 폭넓게 적용된다. 하지만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신여성이라는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신청년이라는 잡지가 창간된 후이다. 신여성의 맹아는 무술유신부터 서서히 자라났으며 신문화운동에 이르러 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여성 담론의 발현을 신문화운동 시기로 정의하고 청말부터 신문화운동 이전까지의 기간을 신여성 사상의 맹아기로 정의하겠다.
신여성 담론의 맹아기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무술유신 시기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청조가 서구에 의해 무너지면서, 청조 내부에서는 부국을 위한 고민이 시작된다. 이 고민에서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이었다. 즉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여성상은 낙후된 중국 문화이며, 따라서 이들은 중국이 발전하기 위해선 발전된 서양의 여성 문화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 신여성 운동의 맹아라고 볼 수 있는 변화가 제안된다. 전족 반대운동과 여성 교육 운동이 대표적이다. 강유위의 주도로 시작된 전족 반대 운동은 양계초에 의해 구체화 되었고 1897년 <전족반대동맹조례>로 구체화된다. 양계초를 필두한 지식인들은 (不纏足會)를 조직해 전족 반대운동을 시작한다. 더불어 이 시기 양계초를 필두로 중국 지식인들은 부국을 위해 중국 여성 교육의 필요성 재기한다. 양계초는 중국이 여성을 교육시켜야 하는 이유를 '소득을 나누어쓰는 폐단을 극복해야함', '여성의 재주없음을 극복해야 함', '교육을 통해 좋은 어머니가 되야 함',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태교를 해야 함'으로 정의한다. 양계초는 전통적인 여성을 전족과 같은 전통에 의해 능력이 상실된 존재로 정의하고, 중국이 가난한 이유를 능력이 없는 여성들과 소득을 나누어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성이 전족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육을 통해 경제적 능력을 얻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교육을 통해 중국을 이끌어갈 중국인의 바람직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런 방식의 중국 여성 계몽은 여성을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갖는다. 여성이 전통에서 벗어나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성이라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육아라는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시기 여성 계몽운동의 한계로 지목된다.
무술유신 이후 부국을 위한 여성 계몽
무술유신 이후 이런 한계를 인식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급진적인 지식인 김일은 여계종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 책에서 김일은 중국 여성의 대표적인 문제는 전족, 몸치장, 미신에 빠지는 것, 구속되어 사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여성의 능력이 저하되고 구속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첫번째부터 세번째 주장은 무술유신 당시의 지식인의 것과 동일하지만 네번 째 주장에서 김일은 이전까지 지식인들의 중국 계몽의 한계를 지목한다. 그가 주장한 중국 여성의 네번 째 문제인 구속되어 사는 것의 근본전인 원인은 결혼이었다. 그에게 전통적인 결혼이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구속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남녀간의 교제를 공개적으로 하고 혼인을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김일은 주장한다. 즉 김일에겐 중국 여성은 가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중국 여성 개인을 위해 계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당시 지배적인 담론이 아니었으며, 양계초나 강유위에 의한 현모양처를 위한 중국 여성 계몽이 여전히 지배적인 담론이었다.
즉 이 시기 국가나 민간에 의해 실시된 여성교육이나 전족 반대는 진정한 신여성을 위한 계몽이라기 보단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여성상 양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성의 교육이 사회 전역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여성들이 교육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족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등장하게 된 점, 더불어 김일과 같은 진정한 신여성 사상을 가진 지식인이 등장했다는 점은 신여성 사상의 맹아가 이 시기에 서서히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신해 혁명 시기 남녀 불평등 문제 제기
신여성의 맹아는 신해혁명 시기에서 좀 더 성숙한다. 혁명군이 무한에서 세 곳의 진영을 점령하고 병력이 부족해 징집 광고를 내자 오숙경이라는 여성은 무한 혁명 정부의 대도독이었던 여원홍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도 군대에 들어와 힘을 보태고 싶다고 주장했다. 여원홍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오숙경은 혁명에서 남녀간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고 여원홍을 설득해 여원홍은 대대적으로 여군을 모집하게 된다. 이런 여군에 대해 대중들은 뜨겁게 반응했으나, 신해혁명 간부들은 여성의 참전을 조롱거리로 생각했다. 신해혁명의 간부들이 여성의 참전을 동의하자 않자 오숙경의 여군은 곧 해산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은 혁명에서 여성이 제한적인 지위밖에 갖지 못하는 현실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남경 임시정부에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신주여계참정동맹회, 여자동맹회 같은 단체가 생겨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한다. 실제로 당군영 등 20인을 대표로 하는 신주여계참정동맹회, 여자동맹회와 같은 단체들은 임시정부 약법에 남녀 평등 조문을 넣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임시 약법에 이런 내용은 들어가지 않자, 여권 운동가들은 분노하여 여자참정동맹회의 당군영을 대표로 손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다. 이들의 항의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의원의 유리창을 깨고 경비를 걷어차는 등의 난폭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즉 이 시기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과 불평등 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통에서 벗어난 신여성 사상의 맹아가 발현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신여성 담론의 발현기 및 전성기: 전통으로부터의 여성 해방
신여성 담론의 발현
진독수에 의해 발간된 신청년이 등장하게 된 시기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했던 시기와 비슷하다. 신해혁명을 통해 봉건에서 벗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위안스카이에 의해 다시 봉건제도로 돌아가게 될 위기를 느낀 진독수는 계몽을 통해 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진독수는 봉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몽시켜야 할 대상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진독수는 청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신청년을 발간하게 된다. 신여성 사상은 이 잡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발현되며, 결혼제도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주체로써의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잡지 신청년에서 진독수는 여성 계몽을 이끌어나간다. 그는 신청년 창간호부터 여성해방을 다룬다. 아래 글은 그가 신청년 창간호에 실었던 글이다.
"세상은 근대 유럽 역사를 해방의 역사라 칭한다. 군권을 깨뜨려 정치적 해방을 추구하고 교권을 부정하여 종교적 해방을 추구하며 균산설 均産說을 일으켜 경제적 해방을 추구한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으로 남성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한다." -신청년, 진독수
더 나아가 그는 신여성 담론의 확대 생산을 위해 여자문제라는 글에서 여성계몽의 필요성을 밝히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국민의 반수를 차지한다 가정에서 특히 무상의 책임을 지고 있다 국가사회의 개진을 위해서라도 여자문제는 방치할 수 없다. 여성 교육 여성 직업 결혼 이혼 재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동거 독신 생활 피임 여성 참정 법률상 여성권리 등은 여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로서 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소견을 본지에 발표해 주시기를 여성 여러분에게 감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여자문제, 진독수
진독수는 여성을 구속하는 요소로 전통을 지목하고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을 강하게 비난한다. 실제로 그는 그의 글에서 "서양에서 여성들의 재가는 결코 사회에서 천시되지 않는다 중국의 예법에는 남편이 죽으면 재가하지 않는다라는 법도가 있어 두 주인을 섬기거나 아내가 두 남편을 섬기면 모두 절개 없는 행동으로 치욕이라고 간주한다 서양은 변호사 의사에서 점원 여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개척해 나간다. 그러나 공자의 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녀 간에 직접 주고받는 것은 안 된다. 남자는 안에서 하는 여자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에서 하는 남자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아내는 남편의 부속품이므로 아내는 당연히 남편에게 부양되어야 하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성을 억압하는 공자를 비판한다.더불어 그는 1915년 11월에 발표한 유럽 여걸 7인방을 통해서 여성의 능력없음을 당연시하는 중국 사회를 비판하며, 다시 한 번 청년들에게 여성 계몽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여성의 지능이 박약한 것 같다는 이유를 핑계로 매번 남성은 여성을 무시했으며 국민의 지적 수준이 낮다는 이유를 핑계로 정부는 매번 민권을 유린했다 이것은 모두 일시적인 환상만을 대변한 것으로 그 본질을 깊이 탐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본질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유럽 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성의 공적을 중국 남성과 비교하면 어찌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칭송받는 유럽 여걸 인방을 여기에 기록하오니 중국 청년 여성 동포들이 느끼는 바가 있기를 희망한다." -유럽 여걸 7 인방, 진독수
또한 1916년에 신청년에 기고한 1916년이라는 글에서 진독수는 여성들에게 "정복자의 자리에 스스로 거하고 피정복자의 자리를 자처하지 말라", "개인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부속품이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글을 계기로 많은 지식이들은 신청년에 여성과 관련된 글을 투고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주작인이다. 주작인은 신청년에 여사야정자의 글을 번역한 정조론을 투고한다. 이 글은 전통적으로 여성에 도덕적 의무로 강요되어 왔던 정조는 사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취향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중국 여성을 억압하던 전통들 역시도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작인은 주장한다. 이 글은 당시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정조문제, 나의 정절관과 같은 글로 이어지며 신여성 담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적과 같은 지식인들은 신여성의 모습을 다룬 서양의 문학작품을 앞다투어 소개했으며 이를 통해 중국 신여성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구체화 시켜갔다.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신여성 담론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전통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여성들에게 강조되어 왔던 정조 등의 전통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학에서 다뤄지는 여성상이나 서양의 여성인식은 중국 신여성 담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신여성담론은 여성의 재가, 이혼, 시어머니문제, 피임 등의 가정적 영역부터 참정권, 직업, 여성권리 등의 사회적 영역까지 폭넓게 전개되어갔다.
신여성 담론이 가져온 사회 변화
신문화운동에서 논의된 신여성 담론은 여성 권리 향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신여성 담론은 여성의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이나 생활습관의 변화와 같은 개인적 부문과 더불어 참정권, 노동권 등의 사회적 부문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교육
먼저 교육부분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전까지 나뉘던 남과 여의 교육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광범위하게 받아드려졌다. 먼저 소학교에서 남녀공학이 보편화 되었고, 대학에서도 여성의 입학을 허락한다. 실제로 1922년에는 대학에서 이전까지 전무하던 여성 신입생이 665명이 입학한다. 이는 무술유신 이전부터 성장하던 교육의 평등이라는 맹아가 발현되었음을 시사한다.
직업
신여성 운동은 직업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5.4운동 이전에는 여성의 직업에는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신여성운동은 이런 제한을 서서히 제거했다. 실제로 5.4 이후 남자 학교에서도 여교사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경, 천진, 상해 등의 대도시에서는 여주가 운영하는 상점도 생겨났다. 즉 신여성운동을 통해 적어도 지식인 계층에서는 여성들도 능력만 갖추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겼다.
정치
신여성운동은 신해혁명부터 시작되었던 여성의 참정권 요구를 이어 받아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다. 이런 요구를 위정자들은 더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고등교육를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여성 지식인들이 다수 등장하였고, 능력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이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여성은 점차 정계로 나아갔고 대중 여성의 참정권도 서서히 등장한다. 실제로 광동의 임시성의회는 여성에게 한정적인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여성의원 10명이 선출되었다. 또한 호남성에서는 비슷한 시기 남녀평등 조항을 법률에 추가하고 여성 의원 왕창국을 선출했다.
생활
더불어 신여성 담론은 여성 생활 전반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미치게된다. 실제로 과거에 여성의 상징이었던 전족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것이라는 의식이 공통적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전통적인 머리카락과 의복 역시도 여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여성 지식인들은 머리를 자르고 개량된 의복을 입었으며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더불어 신여성 운동은 결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결혼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자유 연애를 추구했다. 즉 신여성운동을 통해 적어도 지식인 계층은 결혼의 조건의 부모나 가족의 동의가 아닌 배우자에 대한 애정이라는 의식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중국 신여성 담론의 한계: 루쉰의 사상을 중심으로
루쉰과 신여성담론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을 기반으로 진행된 신여성 운동이 중국 여성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운동을 통해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정치에 일정부분 참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직업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시기 신여성사상에 대한 한계가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지적되기 시작했다. 이런 한계를 지적한 사람 중 대표적인 지식인은 루쉰이다.
1917년 루쉰이 신청년에 기고한 나의절열관을 보면 그는 여성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므로 남편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면 되고, 그가(남편이) 살아있으면 물론 빼앗길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루쉰에게도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은 남성의 물건이라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더불어 루쉰은 “정복당한 국민이 되어보호할 힘도, 저항할 용기도 없어지면 하는 수 없이 이상한 묘안을 짜내어 여자들의 자살을 고취시킨다.”라고 말하며 전통적인 여성을 대하는 남성과 사회를 비판한다. 이런 루쉰은 신문화운동과 5.4 운동에 등장한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신여성 사상을 신여성 담론 초기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여성 사상으로 발현된 신여성의 삶의 모습은 루쉰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고, 그는 소설 애도와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통해 신여성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소설 애도(傷逝) 속 신여성담론의 한계
루쉰은 신여성 운동이 실행되어 신여성의 삶이 어느정도 실현이 되었을 무렵인 1925년에 애도(傷逝)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을 거부하고 신여성을 삶을 사는 쯔쥔은 애인인 쥐엔셩과 함께 동거를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경제와 가사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점점 불행해지고 결국 쯔쥔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죽게된다. 쯔쥔에 죽음에 대해 쥐엔성은 반성하며 소설은 끝난다. 루신이 이 소설에서 지적하는 신여성 담론의 한계는 남성 지식인과 신여성 담론과 현실의 괴리에 있다. 쯔쥔은 동거를 시작한 후 집안일 때문에 지적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쥐엔셩은 동거 후 가사 활동을 하지 않고 지적 활동에만 열중하게 된다. 이에 따라 쯔쥔은 쥐엔성이 사랑했던 지적인 신여성적인 모습을 잃어가고, 쥐엔셩은 결별을 선언한다. 즉 가사는 여성의 것이라는 전통적인 성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쥐엔성의 모습은 당시 신여성 사상을 추구하는 남성 지식인들 조차도 여성 소유라는 전통적인 남성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쥐엔성은 자유연애를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되고 이는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는 당시 신여성 사상을 대한 사회의 냉담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루쉰이 바라본 신여성의 한계는 남성과 사회에 있었다. 신여성담론을 만들어가는 지식인들 조차도 신여성을 자유연애를 위한 대상이자 소유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 등장한 신여성 담론 역시도 여성을 남성에게서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더불어 신문화운동이 지식인 계층에 국한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여성 담론을 가지 못한 대중들에게 신여성이란 그저 부정한 여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여성 사상으로 집을 나온 신여성들로 하여금 중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 환경을 조성하는 요인이었다. 이는 루쉰이 생각하는 신여성 담론을 바라보는 사회의 한계이다.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 속 신여성담론의 한계
루쉰은 뒤에 발표하는 산문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통해 이런 신여성의 한계를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이 산문에서 루쉰은 신여성을 대표하는 노라가 집을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타락'아니면 '회귀'이라고 정의한다. 남성 지식인들이 신여성을 독립적 주체가 아닌 자유연애에 대상으로 생각하고 소비했기 때문에, 연애라는 환상이 끝나면 신여성과 신여성담론은 존재할 수 없다. 이로 인해 경제권을 갖지 못한 신여성들 중 일부는 다시 봉건적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봉건적 삶으로 돌아간 신여성은 이제 예전과 같은 전통적 여성의 지위를 갖을 수 없다. 왜냐하면 봉건적 관점에서 신여성의 길을 가다가 돌아온 여성은 부정적인 여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권을 어떻게든 마련해 신여성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타락한 여성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신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루쉰이 주장한 해결 방법은 경제이다. 즉 여성이 돈을 갖고 있을 때, 온전한 주체로써의 신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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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세종, " 루쉰의 여성 해방 운동", 『중국어문논역총간』, 2001, 8집 : 143-166
- 황선미 "번역가로서의 천두슈(陳獨秀)와 여성해방",『동아시아 문화연구』,2010 , 제48집 : 271-298
- 진동원,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박이정, 2005
- 百度百科, 伤逝, http://baike.baidu.com/link?url=gWrnm9WzhWQBBm0Ag41A-5rxTP0_mkE9ChwxmFh26kqMw_WWbi4YCy5A65XGnN8Mkc8KA6GQdnEMxMlpvbF60yVrEbL9y7eXzSbFFvxjm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