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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8대 부족으로 나뉘어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후 당이 멸망한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요(遼)를 건국하였다. 요의 성종은 994년 고려를 굴복시킨 후 계속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송 역시 당시 국정의 최고과제가 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의 회복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황하의 전주 지방에서 송과 요가 대치하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전연의 맹약]]’이라는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송과 요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 [[거란]]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8대 부족으로 나뉘어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후 당이 멸망한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요(遼)를 건국하였다. 요의 성종은 994년 고려를 굴복시킨 후 계속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송 역시 당시 국정의 최고과제가 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의 회복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황하의 전주 지방에서 송과 요가 대치하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전연의 맹약]]’이라는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송과 요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 ||
− |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탕쿠르족]]이 건립한 서하(西夏)였다. 이원호는 탕쿠르 내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하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호는 송조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서북지방에 침입하면서 양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송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투입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범중업]과 한기를 전선에 파견해 방어했지만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약 7년간의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되자 송은 막대한 군사비와 이 틈을 노린 요의 침입이 우려되기 시작하였고, 서하는 전쟁비용의 부담과 송조의 경계봉쇄에 따른 물자결핍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1044년 송과 요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송은 매년 세폐로서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 평화조약에 의해 서하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하의 침입을 받았다. | + |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탕쿠르족]]이 건립한 서하(西夏)였다. 이원호는 탕쿠르 내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하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호는 송조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서북지방에 침입하면서 양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송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투입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범중업]]과 한기를 전선에 파견해 방어했지만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약 7년간의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되자 송은 막대한 군사비와 이 틈을 노린 요의 침입이 우려되기 시작하였고, 서하는 전쟁비용의 부담과 송조의 경계봉쇄에 따른 물자결핍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1044년 송과 요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송은 매년 세폐로서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 평화조약에 의해 서하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하의 침입을 받았다. |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 ||
=== 북송의 쇠퇴와 남송 === | === 북송의 쇠퇴와 남송 === |
2016년 5월 11일 (수) 04:51 판
송의 영역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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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10국 시기를 거쳐 당 왕조의 정치와 제도를 계승한 송 왕조는 시기별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눌 수 있다. 북송은 피를 흘리지 않은 병변(兵變)형식으로 탄생한 왕조로, 중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북송은 개봉(開封)에 도읍을, 남송은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했다. 지식과 발명의 시대이고, 엄청난 상업과 경제의 발달로 돈으로 주변국과의 평화를 유지한 나라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은 이런 발전을 사회 계급의 전환을 불러오는 것까지의 과정은 다소 부족했다. 또한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도 송의 한 가지 약점이다.
당송교체기:송 건국
사회변화기(사대부)
건국과 부흥
정치
경제발전
또한 송의 영토를 보면 가로로 긴 강과 넓은 삼각 지대를 볼 수 있다. 특히 남송의 남방 이전으로 인해 풍족한 경작지와 수운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 직물과 금속 가공 등의 소공업도 점점 번영을 누려갔다. 또 송 왕조는 상품 경제가 발달하고 도시 생활은 번화했다. 송대에 들어 성시의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개봉의 성시 전체가 상업분위기로 물들었다. 이에 정부는 금수하를 성시안으로 끌어들여 공공 식수로 제공하는 것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락과 서비스 업종이 상품화되어 전문 오락장과 공연 장소인 '구란(句欄)과 와사(瓦肆)과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번화했을 때 개봉의 인구는 당대의 장안성보다 1.5배 많았다. 이런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비정치적인 순수 상업 성시, 즉 진시(鎭市)가 출현했다. 그것의 전신(前身)은 백성들이 약속을 정해 놓고 열었던 초시(草市)였다. 이러한 번영은 성시기능의 송의 비교적 긴 평화기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남송은 반쪽 강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6000만 명에 이르러 성당 시대를 방불케 했다. 송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상인의 지위도 송대에 크게 향상되었다. 정보도 너그러운 정책으로 상인이 과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상인은 이제 더 이상 관기(官妓)나 거지와 함께 분류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업 조직인 '행단(行團)'도 송대에 형성되었다. 상업의 번영은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을 초래하여 동전으로 유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철로 만든 화폐와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 등장했다. 지폐 출현의 기술적 배경은 대외 무역의 재도약이었다. '해외 비단길'이 대외 무역의 주요 노선이 되었으며, 수출 상품 중 자기는 중국의 가장 특징적인 상품이었다. 이 와중에 왕안석의 경제사상이 등장했다.
문화
역대급 경제 호황과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송의 문화는 발전양상을 보인다. '사(詞)'는 본래 민간에서 유행한 속요에 지나지 않았으나 송대에 들어 새로운 예술 체제로 탈바꿈했다. 북송의 '사(詞)'는 감정이 섬세하게 반영된 풍격을 구비하여 '일절(一絶)'이라고 칭해졌다. 송사와 함께 산수화가 발달했다. 북송의 산수화에는 객관적이고 풍부한 표현법이 사용되었다면, 남송에 들어서는 대치 상황으로부터의 안정을 바라는 사회심리적인 요소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있다. 고문이나 통속 문학, 희극, 설창(說唱) 예술도 급격히 발전했다. 활자인쇄술ㆍ화약ㆍ나침반의 3대 발명품은 북송 시대 과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상징한다. 남송에 들어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은 북송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한다. 또한 남송 시대에 주희(1130-1200년)는 백록동 서원을 창립하고 이학(理學)을 선전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민학(閩學)'학파를 창립했다.
쇠퇴기
대외정책
송이 건국된 10세기 초,중기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지나친 문치주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꾸준한 위협과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당과 밀접했던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거란족이 건립한 요나라였는데 이후 송과 대립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제관계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거란은 10세기초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이 8대 부족으로 나뉘어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전제적인 권력을 확립하며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이후 당이 멸망한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요(遼)를 건국하였다. 요의 성종은 994년 고려를 굴복시킨 후 계속해서 남진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송 역시 당시 국정의 최고과제가 장성 이남의 연운십육주의 회복인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황하의 전주 지방에서 송과 요가 대치하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전연의 맹약’이라는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송과 요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동북방의 요와 함께 송을 위협한 것은 서북방의 탕쿠르족이 건립한 서하(西夏)였다. 이원호는 탕쿠르 내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하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원호는 송조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서북지방에 침입하면서 양국은 교전 상태에 들어갔다. 송은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투입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범중업과 한기를 전선에 파견해 방어했지만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약 7년간의 장기적인 소모전이 계속되자 송은 막대한 군사비와 이 틈을 노린 요의 침입이 우려되기 시작하였고, 서하는 전쟁비용의 부담과 송조의 경계봉쇄에 따른 물자결핍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어 1044년 송과 요 사이의 평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대신 송은 매년 세폐로서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해 교역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 평화조약에 의해 서하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이 극도로 고갈되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서하의 침입을 받았다.
거란족의 요가 11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이때 요의 배후지역인 만주에서는 퉁구스계인 여진족이 일어났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1115년 아골타(阿骨打)가 금을 건국하면서 요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요는 대군을 보내 금을 공격하였지만 요와의 전쟁에서 금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금은 남하하여 요동을 공략하고 요의 본거지인 요서로 진격하였다. 금이 이렇게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은 맹안모극제라는 특유의 제도 덕이 컸다. 금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자 송조는 금에게 요에 대한 협공을 제안하였다. 이후 금군은 요군에 대패하였고 이로써 요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