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번째 줄: | 1번째 줄: | ||
당 대의 과거는 [[공거]](貢擧)와 [[제거]](制擧)로 나누어졌었다. 공과는 또한 상과(常科)라고도 하는데 과목에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서(明書), 명법(明法), 명산(明算) 등의 과가 있었다. | 당 대의 과거는 [[공거]](貢擧)와 [[제거]](制擧)로 나누어졌었다. 공과는 또한 상과(常科)라고도 하는데 과목에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서(明書), 명법(明法), 명산(明算) 등의 과가 있었다. | ||
− | |||
− | |||
− | |||
==과거제의 의의== | ==과거제의 의의== | ||
당 대 과거제는 비문벌 지주 대두의 역사적 추세에 따라 중앙 집권 강화에 중대한 작용을 하였고, 인재 선발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통일된 객관적 표준을 사용하여 고시를 행하였으므로, 사인들은 공개적으로 경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문벌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또한 고시가 주로 수도에서 진행되었고 선발권과 임용권도 모두 중앙에 집중 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인재를 결집시키고 정치·문화·사상의 교류를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봉건왕조의 통치기초를 확대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구품 중정제도와 비교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공평하였다. | 당 대 과거제는 비문벌 지주 대두의 역사적 추세에 따라 중앙 집권 강화에 중대한 작용을 하였고, 인재 선발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통일된 객관적 표준을 사용하여 고시를 행하였으므로, 사인들은 공개적으로 경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문벌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또한 고시가 주로 수도에서 진행되었고 선발권과 임용권도 모두 중앙에 집중 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인재를 결집시키고 정치·문화·사상의 교류를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봉건왕조의 통치기초를 확대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구품 중정제도와 비교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공평하였다. |
2016년 6월 21일 (화) 14:53 판
당 대의 과거는 공거(貢擧)와 제거(制擧)로 나누어졌었다. 공과는 또한 상과(常科)라고도 하는데 과목에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서(明書), 명법(明法), 명산(明算) 등의 과가 있었다.
과거제의 의의
당 대 과거제는 비문벌 지주 대두의 역사적 추세에 따라 중앙 집권 강화에 중대한 작용을 하였고, 인재 선발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통일된 객관적 표준을 사용하여 고시를 행하였으므로, 사인들은 공개적으로 경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문벌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또한 고시가 주로 수도에서 진행되었고 선발권과 임용권도 모두 중앙에 집중 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인재를 결집시키고 정치·문화·사상의 교류를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봉건왕조의 통치기초를 확대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구품 중정제도와 비교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공평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