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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반란 이전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br> | ||
+ | 번진은 중앙정부와 주 사이에 설치되었고, 한 개의 번진이 2~3개의 주 혹은 10여 개의 주를 관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br> | ||
+ | 강회지역(양자강과 회수지역)처럼 중앙에서 문관이 절도사로 파견된 번진의 경우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었지만, 무인절도사가 지배하는 하북과 하남의 번진은 중앙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번진은 거의 독립왕국화되어 갔다. <br> | ||
+ | 그 중 특히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분권적이고 반독립적인 성향을 보인 번진은 [[안사의 난]]에 가담했던 장수들이 절고사로 있었던 하북의 삼진이다. 하북삼진은 위박, 성덕, 노용을 말하는데, 안록산과 사사명을 높이 받들면서 당조의 개입을 저지했다. 이들은 [[절도사]]직을 세습하면서 조세를 중앙에 보내지 않고 독점했으며, 관내 관리의 임명과 파면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등 독립 상태를 당 말기까지 유지했다.<br> | ||
+ | 이외에도 화북의 평로, 회서, 산남농도 등의 번진도 당조의 명을 받지 않고 반독립적인 경향을 보였다. <br> | ||
+ | 이렇게 당조로부터 독립적이거나 원심적인 경향을 보이는 번인을 '''반측지지'''라고 하는데, 화북의 동부에 주로 밀집되어 있었다. <br> | ||
+ | 반면 당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지배를 받는 번지을 '''순지'''라고 하는데. 안사의 난 이후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한 강회지역을 포함해 화중, 강남지역이 여기에 속했고, 주로 환관과 문신관료가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 ||
− | [[안사의 난]] | + | == 번진의 구조와 특성 == |
+ | 위와 같은 번진체제는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멸망까지 약 140년을 존속했는데,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절도사]]의 권력이 반드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위박과 같은 경우 부자 혹은 일족 사이에 상속된 예이지만 대부분은 끊임없이 부하 장병들에 의해 폐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br> | ||
+ | 군대는 번진 병력의 중추를 담당했는데, [[절도사]]로부터 모든 생활기반을 제공받는 모병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중군은 우수한 병력으로 대우도 좋았는데, 자신들의 생활기반에 매우 민감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출정을 거부하거나 절도사까지 폐립하고 아군의 장교 중에서 새 절도사를 옹립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심지어 야심이 있는 자는 스스로 절도사의 지위를 강탈하는 등 번진 내부는 완전히 하극상의 세계였다. 물론 절도사들도 이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부양하는 사병 혹은 가병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주로 가병으로서 절도사와 가부자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반측지지'''에 많이 보이며, 이 두 세력이 번진 병력의 이중구조를 형성해 절도사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br> | ||
− | + | 이제 병사들은 부병제시대처럼 비참한 존재가 아니었다. 절도사들은 아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사재를 털어 장병들에게 베풀거나 조정에 추천해 중앙의 관직을 얻어 주는 등 군대의 환심을 얻기 위해 힘썼다.<br> 번진이 이렇게 많은 수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령제]]의 붕괴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수많은 몰락농민이 등장했고, 이들이 번지의 예비병력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br> 또한 강남의 경제력이 증대되어 수많은 모병을 부양할 수 있는 생산력의 기초가 갖추어져 있었고, 성장하고 있던 지역의 토호들 역시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 번진의 존속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br>그러나 번진체제는 당조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5만에서 10만에 이르는 번진의 병사는 모병이었고, 이들은 결국 양세법이라는 수취체제에 의존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번진 사이의 대립과 세력균형 및 번진 내부의 권력구조의 불안정 역시 당조의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 |
− | === 번진 | + | == 번진의 순지화 == |
+ | 반독립적으로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번진들을 다시 당의 통치제제 내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즉 순지화가 2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br> | ||
+ | 1차는 덕종시기에 행해졌는데, '''반측지지'''의 연합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2차는 현종때 두 차례에 걸친 위협과 토벌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809)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원화중흥'이라 부르는데, 당조가 번진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재정적인 기반을 갖고, 중앙의 금군인 신책군을 적극적으로 강화, 육성한 결과였다. 신책군은 황제 개인의 군대라는 성격을 띠며 주로 환관이 통솔했다. 그 결과 [[절도사]]의 번진 병력 통제권을 부분적으로 중앙으로 회수했고, 재정권도 회수했다. 이로써 절도사의 기반은 약화되었으며, 환관이 절도사 휘하의 군대를 감찰하기 위해 설치된 감군으로 파견되어 절도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br> | ||
+ | 그러나 순지화의 과정은 어디까지나 무력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무력의 원천은 강회, 강남지역의 경제력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풍부한 생산력과 이를 수도로 운반할 수 있는 운하는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진 당조의 생명선이었다. | ||
− | + | ==참고문헌== | |
− | +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
− | + |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
− | + |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 |
− | + |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 |
− | + | [[분류:당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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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7일 (월) 16:41 기준 최신판
번진의 성립
안사의 난 중에 반란군의 세력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당조는 중국 내의 경조부와 하남부를 제외한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이리하여 내지에만 40개 정도의 번진이 생겼는데 변경의 번진과 합쳐 총 50개 정도의 번진이 설치되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반란 이전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번진은 중앙정부와 주 사이에 설치되었고, 한 개의 번진이 2~3개의 주 혹은 10여 개의 주를 관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강회지역(양자강과 회수지역)처럼 중앙에서 문관이 절도사로 파견된 번진의 경우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었지만, 무인절도사가 지배하는 하북과 하남의 번진은 중앙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번진은 거의 독립왕국화되어 갔다.
그 중 특히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분권적이고 반독립적인 성향을 보인 번진은 안사의 난에 가담했던 장수들이 절고사로 있었던 하북의 삼진이다. 하북삼진은 위박, 성덕, 노용을 말하는데, 안록산과 사사명을 높이 받들면서 당조의 개입을 저지했다. 이들은 절도사직을 세습하면서 조세를 중앙에 보내지 않고 독점했으며, 관내 관리의 임명과 파면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등 독립 상태를 당 말기까지 유지했다.
이외에도 화북의 평로, 회서, 산남농도 등의 번진도 당조의 명을 받지 않고 반독립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렇게 당조로부터 독립적이거나 원심적인 경향을 보이는 번인을 반측지지라고 하는데, 화북의 동부에 주로 밀집되어 있었다.
반면 당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지배를 받는 번지을 순지라고 하는데. 안사의 난 이후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한 강회지역을 포함해 화중, 강남지역이 여기에 속했고, 주로 환관과 문신관료가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번진의 구조와 특성
위와 같은 번진체제는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멸망까지 약 140년을 존속했는데,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절도사의 권력이 반드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위박과 같은 경우 부자 혹은 일족 사이에 상속된 예이지만 대부분은 끊임없이 부하 장병들에 의해 폐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는 번진 병력의 중추를 담당했는데, 절도사로부터 모든 생활기반을 제공받는 모병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중군은 우수한 병력으로 대우도 좋았는데, 자신들의 생활기반에 매우 민감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출정을 거부하거나 절도사까지 폐립하고 아군의 장교 중에서 새 절도사를 옹립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심지어 야심이 있는 자는 스스로 절도사의 지위를 강탈하는 등 번진 내부는 완전히 하극상의 세계였다. 물론 절도사들도 이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부양하는 사병 혹은 가병을 조직했는데, 이들은 주로 가병으로서 절도사와 가부자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반측지지에 많이 보이며, 이 두 세력이 번진 병력의 이중구조를 형성해 절도사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제 병사들은 부병제시대처럼 비참한 존재가 아니었다. 절도사들은 아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사재를 털어 장병들에게 베풀거나 조정에 추천해 중앙의 관직을 얻어 주는 등 군대의 환심을 얻기 위해 힘썼다.
번진이 이렇게 많은 수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령제의 붕괴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수많은 몰락농민이 등장했고, 이들이 번지의 예비병력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강남의 경제력이 증대되어 수많은 모병을 부양할 수 있는 생산력의 기초가 갖추어져 있었고, 성장하고 있던 지역의 토호들 역시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 번진의 존속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번진체제는 당조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5만에서 10만에 이르는 번진의 병사는 모병이었고, 이들은 결국 양세법이라는 수취체제에 의존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또한 번진 사이의 대립과 세력균형 및 번진 내부의 권력구조의 불안정 역시 당조의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번진의 순지화
반독립적으로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번진들을 다시 당의 통치제제 내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즉 순지화가 2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1차는 덕종시기에 행해졌는데, 반측지지의 연합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2차는 현종때 두 차례에 걸친 위협과 토벌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809)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원화중흥'이라 부르는데, 당조가 번진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재정적인 기반을 갖고, 중앙의 금군인 신책군을 적극적으로 강화, 육성한 결과였다. 신책군은 황제 개인의 군대라는 성격을 띠며 주로 환관이 통솔했다. 그 결과 절도사의 번진 병력 통제권을 부분적으로 중앙으로 회수했고, 재정권도 회수했다. 이로써 절도사의 기반은 약화되었으며, 환관이 절도사 휘하의 군대를 감찰하기 위해 설치된 감군으로 파견되어 절도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지화의 과정은 어디까지나 무력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무력의 원천은 강회, 강남지역의 경제력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풍부한 생산력과 이를 수도로 운반할 수 있는 운하는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진 당조의 생명선이었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