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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일본은 계속해서 중국을 잠식해가고 있으나, 이를 신경쓰기 보다는 공산당만을 탄압하는 장개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 |원인 = 일본은 계속해서 중국을 잠식해가고 있으나, 이를 신경쓰기 보다는 공산당만을 탄압하는 장개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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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张学良과 [[양호성]]杨虎城이 일으킨 사변. | + |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张学良과 [[양호성]]杨虎城이 일으킨 사변. <ref>중국에서는 이를두고 兵谏이라고 부르는데, 谏은 신하가 군주의 잘못을 바로 잡도록 간언하는 것으로, 앞에 兵이 붙음으로서 무력으로 협박을 해서 군주에게 간언한 것이 되는 셈. 때문에 정변政变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이 일이 끝나고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순순히 잡혔다.)</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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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2사변" | + | "12.12사변" 이라고도 불리는 서안사변은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이 국공 합작을 위해 당시 국민당 총수였던 [[장개석]]의 마음을 바꾸려고 일으킨 사변이다. 이 사변이 일어나기 전 [[장개석]]는 "攘外必先安内"(외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내부를 평정해야한다.)라는 기조 아래 점점 중국 대륙으로 들어오는 일본을 신경쓰지 않고 [[공산당]]을 탄압하기 일쑤였다. [[장학량]]은 이 사변을 일으키며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항일 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힘을 합치기를 요구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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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 중앙과 [[주은래]]의 주도 아래, 장개석는 "내전을 멈추고, 연합하여 일본과 싸우자 停止内战,联共抗日" 라는 결의를 받아들였다. 서안 사변으로 야기된 평화 협정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위한 필요조건이었고, 중국 내의 전쟁이 항일민족전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 1936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 중앙과 [[주은래]]의 주도 아래, 장개석는 "내전을 멈추고, 연합하여 일본과 싸우자 停止内战,联共抗日" 라는 결의를 받아들였다. 서안 사변으로 야기된 평화 협정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위한 필요조건이었고, 중국 내의 전쟁이 항일민족전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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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때문에 이를 9.18 사변이라고 부른다.) 일본 관동군은 중국 동북3성의 전부를 점령한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동북에 세운 만주국 괴뢰 정부의 꼭두각시로 앉힌다. 중국의 위기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고, 중국과 일본간의 갈등은 점점 중국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은 항일전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br> | 1931년 9월 18일.(때문에 이를 9.18 사변이라고 부른다.) 일본 관동군은 중국 동북3성의 전부를 점령한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동북에 세운 만주국 괴뢰 정부의 꼭두각시로 앉힌다. 중국의 위기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고, 중국과 일본간의 갈등은 점점 중국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은 항일전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br> | ||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장개석은 일본이란 싸움을 하려기 보다는 중국 공산당을 탄압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고, 중국공산당은 1934년 목적지가 없는 이동을 시작하여 1935년 2만5천리의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혁명지 보안保安현(현재는 지단志丹현)에 도착하였다. |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장개석은 일본이란 싸움을 하려기 보다는 중국 공산당을 탄압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고, 중국공산당은 1934년 목적지가 없는 이동을 시작하여 1935년 2만5천리의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혁명지 보안保安현(현재는 지단志丹현)에 도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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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년 8월, 코민테른의 대표단인 왕명(王明)등은 코민테른 회의의 요구에 근거하여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명의로 < 전국 동포에게 고함!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자! 为抗日救国告全体同胞书>를 발표하였으며, 항일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제기하였다. | ||
+ | 1935년 12월 9일,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를 거행하는데, 그 시위의 구호는 "내전을 멈추고, 외적을 향해 일치단결하자!",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자!" 등이었다. 이 시위는 전국의 많은 민중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항일에 대한 생각이 더 고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시위 등은 攘外必先安内라는 정책을 표방하고 있는 국민당 정부에게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에 발맞추어 항일통일전선에 대한 정책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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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듬해 1936년 4월 9일, [[장학량]]은 비행기를 타고 [[연안]]에 도착하여 [[주은래]]를 만난다. 그리고 9월, 중국 공산당과 동북군은 정식으로 <항일구국협정>에 서명한다. 12월 4일, 때마침 [[장개석]]은 서안에 와서 초공전剿共(공산당을 섬멸함)을 몸소 지휘하고자 하였고, 12월 9일, [[장개석]]은 [[섬서성]] 정부주석인 소력자邵力子에게 비밀스레 서신을 보내 장학량과 양호성의 초공전 병권을 박탈하고, 장정문蒋鼎文으로 하여금 그 직위를 대신 하도록 하였다. | ||
+ | ==사건 전개== | ||
+ | *1936년 12월 7일, [[장학량]]은 화청지에 도착하여 [[장개석]]을 만난다. 재차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공산당과 힘을 합치기를 권하나 거절 당한다. | ||
+ | *1936년 12월 10일, [[장학량]]은 백봉상白凤翔과 함께 [[장개석]]을 만난다. 장개석은 마침 회의 중 이었는데, 이 때 정식으로 제 6차 초공전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12월 12일, 전쟁에 대한 동원령을 선포한다. | ||
+ | *1936년 12월 11일 저녁, 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장정문, 진성, 주소양 등을 연회에 초청한다. 연회를 하는 동안, 장개석은 장정문이 서북지역 초공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군의 교체를 명한다. 이는 중앙군이 동북군과 서북군을 대신해 초공전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각각 동북군과 17로군의 고위급 장령들을 불러 12월 12일 이른 아침, 사변을 거행하기로 계획한다. | ||
+ |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 동북군은 장학량의 명령을 따라 화청지에 도착하였고, 장개석을 체포한다. 장개석은 침실 창문을 통해 도망을 갔으나, 등에 부상을 입었고, 한 바위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곧 발견이 되고, 이와 동시에 17로군이 진성, 소력자, 장정문, 진조원 등의 국민당 군정 요원들을 체포하였다. 소원충邵元冲 등은 체포과정에서 사망하였다. | ||
+ |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은 전국에 " 1. 남경 정부를 바꿔야 한다. 나라는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책임이 있다. 2.내전을 일체 멈추라. 3.즉시 상하이에 잡혀있는 애국 지도자들을 석방하라. 4.당장 전국에 수용되어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하라. 5.민중 애국 운동을 전개하라. 6.인민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를 일체 보장하라, 7.쑨원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라, 8.당장 구국 회의를 개시하라."라는 8개의 주장을 전했다. 이에 장개석은 "나를 명령에 따라 석방하거나 아니면 나를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해라."라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 ||
+ | *1936년 12월 12일, 코민테른은 서안사변의 소식을 접했고,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지부의 대표단 및 코민테른의 집행위원들은 당장 장개석의 처형을 원했다. [[모택동]]또한 장개석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 ||
+ | *남경정부의 중앙위원회는 서안 사변 당일, 밤 11시 30분, 중앙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회는 회의를 개최하였고, 군사를 보내 엄벌에 처하고자 하였다. 회의의 결론은 엄벌에 처하는 것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응흠何应钦으로 하여금 반란군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석임于右任을 섬서성과 감숙성의 대사로 임명하였다. | ||
+ | *1936년 12월 16일 반란군 토벌군 하응흠은 서안지역 토벌을 명령하고 [[장개석]]이 수감되어 있는 서안 지역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 ||
+ | *1936년 12월 19일 [[장개석]]은 하응흠에게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시안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 ||
+ | *1936년 12월 20일 장개석의 처남 송자문이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의 편지를 들고 협상을 위해 서안에 도착하였다. | ||
+ | *1936년 12월 24일 공산당의 [[주은래]]가 협상을 위해 직접 서안으로 향하였다. 그 후 장학량의 8개 주장중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고 협상을 완료하였다. | ||
+ | *1936년 12월 26일 [[장개석]]은 협상을 마치고 난징으로 무사 귀환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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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안사변의 결과와 의의== | ||
+ | 당시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서안사변은 이후 중국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는데, 당시 국공합작을 거부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집중하던 [[장개석]]은 서안 사변 이후 국공합작을 맺고 일본에 맞서 항일전쟁을 계속 하였다. 서안 사변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후 운명을 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초공작전을 통해 국민당에게 거의 궤멸 당하고 [[대장정]]을 통해서 겨우겨우 극소수의 세력만을 부지한 공산당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원래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입장은 장개석을 즉결 처형하는 것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장학량]]과 온건파였던 [[주은래]]의 설득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장개석이 사라질 경우 국민당의 실권이 친일파인 하응흠에게 돌아간다는 것 또한 입장 변화에 일조하였다. 또한 장개석이 비록 협상 과정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으나, [[장학량]]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국민당 내부의 반일 세력이 더욱 지지를 얻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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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안사건인물들.jpg|400픽셀|섬네일|왼쪽|서안사변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왼쪽부터 장학량, 양호성, 장제스이다.]]<br> [[파일:총알자국.jpg|300픽셀|섬네일|왼쪽|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총알 자국들]]<br> | [[파일:서안사건인물들.jpg|400픽셀|섬네일|왼쪽|서안사변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왼쪽부터 장학량, 양호성, 장제스이다.]]<br> [[파일:총알자국.jpg|300픽셀|섬네일|왼쪽|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총알 자국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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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참고 문헌== | |
+ | *오수열. 『서안사변(西安事變)의 전개와 중국정치에 미친 영향』, 2012. | ||
+ | *존 킹 페어뱅크・멀 골드만 지음, 김형종・신성곤 옮김, 《신중국사》, 까치(2005) |
2022년 2월 13일 (일) 16:05 기준 최신판
'서안 사변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 | |
날짜 | 1936.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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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중국 섬서성 서안 |
원인 | 일본은 계속해서 중국을 잠식해가고 있으나, 이를 신경쓰기 보다는 공산당만을 탄압하는 장개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
참여자 | 장학량, 양호성, 장개석 |
개요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张学良과 양호성杨虎城이 일으킨 사변. [1]
"12.12사변" 이라고도 불리는 서안사변은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이 국공 합작을 위해 당시 국민당 총수였던 장개석의 마음을 바꾸려고 일으킨 사변이다. 이 사변이 일어나기 전 장개석는 "攘外必先安内"(외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내부를 평정해야한다.)라는 기조 아래 점점 중국 대륙으로 들어오는 일본을 신경쓰지 않고 공산당을 탄압하기 일쑤였다. 장학량은 이 사변을 일으키며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항일 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힘을 합치기를 요구하였다.
1936년 12월 25일, 중국 공산당 중앙과 주은래의 주도 아래, 장개석는 "내전을 멈추고, 연합하여 일본과 싸우자 停止内战,联共抗日" 라는 결의를 받아들였다. 서안 사변으로 야기된 평화 협정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위한 필요조건이었고, 중국 내의 전쟁이 항일민족전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사건 배경
국제적 상황
1935년 7,8월경, 국제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에서 7차 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통일 전선 설립에 관한 문제에 중점을 두고 토론을 하였다. 1936년 8월 15일.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전보를 쳐 "장개석과 일본의 침략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과 장개석의 군대와 싸우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우리 코민테른은 너희들 중국 공산당이 서남(西南)에 모여 반 장개석 성명을 낸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을 전하며,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과 공동으로 항일 전선에 나서기를 촉구하였다. 이로 짐작해 보건데, 아직 중국 공산당 측은 아니더라도, 소련의 코민테른과 같은 국제적인 정세는 제 2차 국공합작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적 상황
1931년 9월 18일.(때문에 이를 9.18 사변이라고 부른다.) 일본 관동군은 중국 동북3성의 전부를 점령한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동북에 세운 만주국 괴뢰 정부의 꼭두각시로 앉힌다. 중국의 위기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고, 중국과 일본간의 갈등은 점점 중국 사회의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은 항일전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장개석은 일본이란 싸움을 하려기 보다는 중국 공산당을 탄압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고, 중국공산당은 1934년 목적지가 없는 이동을 시작하여 1935년 2만5천리의 대장정을 마치고 섬서혁명지 보안保安현(현재는 지단志丹현)에 도착하였다.
1935년 8월, 코민테른의 대표단인 왕명(王明)등은 코민테른 회의의 요구에 근거하여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와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명의로 < 전국 동포에게 고함!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자! 为抗日救国告全体同胞书>를 발표하였으며, 항일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제기하였다.
1935년 12월 9일,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를 거행하는데, 그 시위의 구호는 "내전을 멈추고, 외적을 향해 일치단결하자!",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자!" 등이었다. 이 시위는 전국의 많은 민중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항일에 대한 생각이 더 고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시위 등은 攘外必先安内라는 정책을 표방하고 있는 국민당 정부에게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에 발맞추어 항일통일전선에 대한 정책을 세웠다.
이듬해 1936년 4월 9일, 장학량은 비행기를 타고 연안에 도착하여 주은래를 만난다. 그리고 9월, 중국 공산당과 동북군은 정식으로 <항일구국협정>에 서명한다. 12월 4일, 때마침 장개석은 서안에 와서 초공전剿共(공산당을 섬멸함)을 몸소 지휘하고자 하였고, 12월 9일, 장개석은 섬서성 정부주석인 소력자邵力子에게 비밀스레 서신을 보내 장학량과 양호성의 초공전 병권을 박탈하고, 장정문蒋鼎文으로 하여금 그 직위를 대신 하도록 하였다.
사건 전개
- 1936년 12월 7일, 장학량은 화청지에 도착하여 장개석을 만난다. 재차 장개석에게 공산당과의 내전을 멈추고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공산당과 힘을 합치기를 권하나 거절 당한다.
- 1936년 12월 10일, 장학량은 백봉상白凤翔과 함께 장개석을 만난다. 장개석은 마침 회의 중 이었는데, 이 때 정식으로 제 6차 초공전의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12월 12일, 전쟁에 대한 동원령을 선포한다.
- 1936년 12월 11일 저녁, 장개석은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장정문, 진성, 주소양 등을 연회에 초청한다. 연회를 하는 동안, 장개석은 장정문이 서북지역 초공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군의 교체를 명한다. 이는 중앙군이 동북군과 서북군을 대신해 초공전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각각 동북군과 17로군의 고위급 장령들을 불러 12월 12일 이른 아침, 사변을 거행하기로 계획한다.
-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 동북군은 장학량의 명령을 따라 화청지에 도착하였고, 장개석을 체포한다. 장개석은 침실 창문을 통해 도망을 갔으나, 등에 부상을 입었고, 한 바위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곧 발견이 되고, 이와 동시에 17로군이 진성, 소력자, 장정문, 진조원 등의 국민당 군정 요원들을 체포하였다. 소원충邵元冲 등은 체포과정에서 사망하였다.
- 1936년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은 전국에 " 1. 남경 정부를 바꿔야 한다. 나라는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책임이 있다. 2.내전을 일체 멈추라. 3.즉시 상하이에 잡혀있는 애국 지도자들을 석방하라. 4.당장 전국에 수용되어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하라. 5.민중 애국 운동을 전개하라. 6.인민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를 일체 보장하라, 7.쑨원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라, 8.당장 구국 회의를 개시하라."라는 8개의 주장을 전했다. 이에 장개석은 "나를 명령에 따라 석방하거나 아니면 나를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해라."라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 1936년 12월 12일, 코민테른은 서안사변의 소식을 접했고,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지부의 대표단 및 코민테른의 집행위원들은 당장 장개석의 처형을 원했다. 모택동또한 장개석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 남경정부의 중앙위원회는 서안 사변 당일, 밤 11시 30분, 중앙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회는 회의를 개최하였고, 군사를 보내 엄벌에 처하고자 하였다. 회의의 결론은 엄벌에 처하는 것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응흠何应钦으로 하여금 반란군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석임于右任을 섬서성과 감숙성의 대사로 임명하였다.
- 1936년 12월 16일 반란군 토벌군 하응흠은 서안지역 토벌을 명령하고 장개석이 수감되어 있는 서안 지역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 1936년 12월 19일 장개석은 하응흠에게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시안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 1936년 12월 20일 장개석의 처남 송자문이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의 편지를 들고 협상을 위해 서안에 도착하였다.
- 1936년 12월 24일 공산당의 주은래가 협상을 위해 직접 서안으로 향하였다. 그 후 장학량의 8개 주장중 일부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고 협상을 완료하였다.
- 1936년 12월 26일 장개석은 협상을 마치고 난징으로 무사 귀환 하였다.
서안사변의 결과와 의의
당시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서안사변은 이후 중국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는데, 당시 국공합작을 거부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집중하던 장개석은 서안 사변 이후 국공합작을 맺고 일본에 맞서 항일전쟁을 계속 하였다. 서안 사변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후 운명을 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초공작전을 통해 국민당에게 거의 궤멸 당하고 대장정을 통해서 겨우겨우 극소수의 세력만을 부지한 공산당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원래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입장은 장개석을 즉결 처형하는 것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장학량과 온건파였던 주은래의 설득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장개석이 사라질 경우 국민당의 실권이 친일파인 하응흠에게 돌아간다는 것 또한 입장 변화에 일조하였다. 또한 장개석이 비록 협상 과정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으나, 장학량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국민당 내부의 반일 세력이 더욱 지지를 얻게 되었다.
관련 사진
서안시 화청지 뒤편에 있는 려산에 가면 서안사변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참고 문헌
- 오수열. 『서안사변(西安事變)의 전개와 중국정치에 미친 영향』, 2012.
- 존 킹 페어뱅크・멀 골드만 지음, 김형종・신성곤 옮김, 《신중국사》, 까치(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