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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개혁으로 국부를 키우고 징병을 양성하여 [[위]](魏)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본격적인 개혁으로 국부를 키우고 징병을 양성하여 [[위]](魏)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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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영(嬴)이고, 이름은 거량(渠梁)이다. 기원전 359년과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br>
 
성은 영(嬴)이고, 이름은 거량(渠梁)이다. 기원전 359년과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br>
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초]](楚)나라와 화친하고 [[한]](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秦), 조(趙), [[제]](齊) 삼국 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魏)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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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초]](楚)나라와 화친하고 [[한]](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진(秦), 조(趙), [[제]](齊) 삼국 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魏)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br>
 
여러 번에 걸친 위(魏)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br>
 
여러 번에 걸친 위(魏)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br>
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魏)나라는 진(秦)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그는 이 후 병이 들어 44세에 죽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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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魏)나라는 진(秦)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이후 병이 들어 44세에 죽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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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을 참모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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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공(秦孝公)의 시기는 전국시대로 접어든 시기로 난세의 심도가 깊었다. 진효공(秦孝公)은 즉위 당시 진(秦)나라가 중원의 제후국에 속하지 못하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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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군 [[진목공]](秦穆公)은 덕을 닦고 무력을 길러 동쪽으로 진(秦)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황하를 경계로 삼았다. 또한 서쪽으로는 융적을 제압하고 땅을 1000리나 넓혔다. 천자가 그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리자 제후들이 모두 착하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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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를 위해 가업을 개창한 것이 참으로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 대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고 국내에 우환이 있어 밖의 일을 처리할 여가가 없었다. 3진이 이 틈을 노려 하서를 빼앗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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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 진헌공(秦献公)은 즉위한 후 도성을 역양으로 옮기고 동쪽으로 진출함으로써 진목공(秦穆公) 때의 고지를 회복하고 당시의 정령을 실행하고자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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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실지를 회복하고 정령의 본의를 밝게 드러내고자 하나 늘 부끄럽고 비통한 생각뿐이다. 빈객과 군신들 가운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진(秦)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오라! 내가 그에게 관직을 내리고 땅도 나누어줄 것이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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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령(求賢令)이 포고되자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중 위(魏)나라의 상앙(商鞅)이 진효공을 찾아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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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은 진효공의 총신인 대부 경감(景監)을 찾아갔고 경감은 그를 진효공(秦孝公)에게 천거했다. 『상군열전』에 따르면 상앙(商鞅)은 먼저 도가에서 말하는 최상의 치도인 제도부터 이야기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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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은 이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태평천하에서 구사할 수 있는 치도였고, 당시 상황은 그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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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 상앙(商鞅)은 진효공(秦孝公)에게 다시 찾아갔고, 이번에는 왕도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의 입장에서 왕도 또한 제도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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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을 찾아갔을 때 그는 패도(覇道)에 대해 설명을 했다.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는 패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진효공은 매우 기뻐하며 3일동안 상앙(商鞅)과 문답(問答)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상앙(商鞅)을 곧바로 참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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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집행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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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치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조정의 명을 거스르지 않고 잘 듣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마련한 변법은 세족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도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려웠기에 진효공(秦孝公)은 고민이 많았다. 그 때 상앙(商鞅)이 나섰다. 상앙은 도성의 남문에 3장(丈) 길이의 나무를 세운 뒤 옆에 방을 붙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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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가 있으면 10금의 상을 내릴 것이다.” <br />
  
==진효공, 상앙을 참모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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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백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br />
진효공(秦孝公)의 시기는 전국시대로 접어든 시기로 난세의 심도가 깊었다. 진효공(秦孝公)은 즉위 당시 진(秦)나라가 중원의 제후국에 속하지 못하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다.<br>
+
::“무슨 속뜻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네. 아무튼 속지 않는 게 좋을 것일세.”<br>
“옛날 선군 진목공(秦穆公)은 덕을 닦고 무력을 길러 동쪽으로 진(秦)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황하를 경계로 삼았다. 또한 서쪽으로는 융적을 제압하고 땅을 1000리나 넓혔다. 천자강 뤼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리자 제후들이 모두 착하했다.
+
아무도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상앙(商鞅)이 다시 분부했다.
후대를 위해 기업을 개창한 것 이 참으로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 대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고 국내에 우환이 있어 밖의 일을 처리할 여가가 없었다. 3진이 이 틈을 노려 하서를 빼앗았다. 이보다 더 큰 치욕은 없다.
+
::"50금의 상을 주겠다고 다시 써서 붙여라.<br>
선군 진헌공(秦献公)은 즉위한 후 도성을 역양으로 옮기고 동쪽으로 진 출함으로써 진목공(秦穆公) 때의 고지를 회복하고 당시의 정령을 실행하고자 했다.<br>
+
이때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과인은 실지를 회복하고 정령의 본의를 밝게 드러내고자 하나 늘 부끄럽고 비통한 생각뿐이다. 빈객과 군신들 가운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진(秦)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오라! 내가 그에게 관직을 내리고 땅도 나누어줄 것이다.”<br><br>
+
::“우리 진() 나라는 자고로 많은 상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포고문이 나붙었으니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비록 50금을 주지 않을지라도 아무 상도 내리지 않을 리 없다. 설령 상을 주지 않을지라도 벌을 내릴 리야 있겠는가!”<br />
구현령(求賢令)이 포고되자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중 위(魏)나라의 상앙(商鞅)이 진효공을 찾아왔다.
 
상앙은 진효공의 총신인 대부 경감(景監)을 찾아갔고 경감은 그를 진효공(秦孝公)에게 천거했다. 『상군열전』에 따르면 상앙(商鞅)은 먼저 도가에서 말하는 최상의 치도인 제도부터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은 이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태평천하에서 구사할 수 있는 치도였고, 당시 상황은 그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br>
 
닷새 뒤 상앙(商鞅)은 진효공(秦孝公)에게 다시 찾아갔고, 이번에는 왕도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의 입장에서 왕도 또한 제도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br>
 
마지막으로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을 찾아갔을 때 그는 패도(覇道)에 대해 설명을 했다.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는 패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진효공은 매우 기뻐하며 3일동안 상앙(商鞅)과 문답(問答)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상앙(商鞅)을 곧바로 참모로 삼았다.
 
  
==관련 일화==
+
그러고는 그가 나서서 나무를 뽑아 어깨에 메고 가 북문에 세웠다. 관원이 곧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곧바로 50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백성들이 서로 말했다.<br />
  
새로운 치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조정의 명을 거스르지 않고 잘 듣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마련한 변법은 세족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도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
::“좌서장은 명령을 내리면 꼭 실행하는 사람이다.”<br>
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려웠기에 진효공은 고민이 많았다. <br>
+
여기서 남문사목(南門徙木), 사목상금(徙木償金), 사목지신(徙木之信), [[이목지신]]([[移木之信]]) 등의 성어가 나왔다.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백성들은 조정의 정령을 믿게 되었다.
그 때 상앙(商鞅)이 나섰다. 상앙은 도성의 남문에 3장(丈) 길이의 나무를 세운 뒤 옆에 방을 붙였다.
 
“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가 있으면 10금의 상을 내릴 것이다.” 이를 본 백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속뜻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네. 아무튼 속지 않는 게 좋을 것일세.”<br>
 
아무도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상앙(商鞅)이 다시 분부했다.
 
“50금의 상을 주겠다고 다시 써서 붙여라.”<br>
 
이때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진(秦) 나라는 자고로 많은 상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포고문이 나붙었으니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비록 50금을 주지 않을지라도 아무 상도 내리지 않을 리 않다. 설령 상을 주지 않을지라도 벌을 내릴 리야 있겠는가!”
 
그러고는 그가 나서서 나무를 뽑아 어깨에 메고 가 북문에 세웠다. 관원이 곧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곧바로 50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백성들이 서로 말했다.
 
“좌서장은 명령을 내리면 꼭 실행하는 사람이다.”<br>
 
여기서 남문사목(南門徙木), 사목상금(徙木償金), 사목지신(徙木之信), 이목지신(移木之信) 등의 성어가 나왔다.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백성들은 조정의 정령을 믿게 되었다.
 
  
==1차 변법의 시행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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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법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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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공은 상앙의 제안에 따라 아래와 같이 두 번의 변법을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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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변법의 시행령===
 
* 천도(遷都): 진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함양(咸陽) 땅이니 도읍을 역성에서 함양으로 옮긴다. <br>
 
* 천도(遷都): 진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함양(咸陽) 땅이니 도읍을 역성에서 함양으로 옮긴다. <br>
 
* 관작(官爵):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하나 얻을 때마다 한 계급씩 승진한다. 반면 후퇴하는 자는 즉시 참형에 처한다. 존비와 관작의 등급은 전공에 따라 정하며, 전공이 없는 자는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법에 의해 삼베옷을 입고 소를 타고 다녀야 한다.
 
* 관작(官爵):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하나 얻을 때마다 한 계급씩 승진한다. 반면 후퇴하는 자는 즉시 참형에 처한다. 존비와 관작의 등급은 전공에 따라 정하며, 전공이 없는 자는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법에 의해 삼베옷을 입고 소를 타고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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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법(遵法): 남녀노소, 상하귀천 할 것 없이 이 법령이 공포되는 날로부터 모두 준수해야만 한다. <br>
 
* 준법(遵法): 남녀노소, 상하귀천 할 것 없이 이 법령이 공포되는 날로부터 모두 준수해야만 한다. <br>
  
이 외에도 봉건제를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로 바꾸고 인구를 대거 늘리기 위해 부모와 장성한 자식이 한 집에 살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br>
+
이 외에도 [[봉건제도]]를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로 바꾸고 인구를 대거 늘리기 위해 부모와 장성한 자식이 한 집에 살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br>
  
==2차 변법의 시행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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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변법의 시행령===
 
* 현(縣)  설치: 경내의 모든 촌락은 현에 소속시킨다. 작은 향 여럿이 모여 하나의 현이 되었다. <br>
 
* 현(縣)  설치: 경내의 모든 촌락은 현에 소속시킨다. 작은 향 여럿이 모여 하나의 현이 되었다. <br>
 
* 개간: 수레와 말이 다니는 도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교외와 광야를 개간한다.<br>
 
* 개간: 수레와 말이 다니는 도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교외와 광야를 개간한다.<br>
* 중산: 관한 건이다. 백성들은 본업인 농사에 종사해야 한다. 곡식과 비단을 많이 쌓아놓은 자에게는 요역을 면제해준다. 아들이 둘 이상 있을 때에는 반드시 별거해야 한다. 장정들은 각기 소정의 세를 국가에 내야 한다. 별거를 원치 않는 자는 여러 사람 분의 세를 내야 한다. 생산 단위의 세분화를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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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 백성들은 본업인 농사에 종사해야 한다. 곡식과 비단을 많이 쌓아놓은 자에게는 요역을 면제해준다. 아들이 둘 이상 있을 때에는 반드시 별거해야 한다. 장정들은 각기 소정의 세를 국가에 내야 한다. 별거를 원치 않는 자는 여러 사람 분의 세를 내야 한다. 생산 단위의 세분화를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br>
  
 
이 외에도 모든 전답의 국유화를 전제로 하여 황무지를 남김없이 개간하기 위한 의도로 부세법(賦稅法)을 시행하였다. 군사 이동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다. <br>
 
이 외에도 모든 전답의 국유화를 전제로 하여 황무지를 남김없이 개간하기 위한 의도로 부세법(賦稅法)을 시행하였다. 군사 이동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다. <br>

2018년 6월 26일 (화) 14:25 기준 최신판

진효공(秦孝公)
출생 B.C 381
사망 B.C 338
생존시기 전국시대

개요

전국시대 (秦)나라 제25대 군주로 진헌공(秦献公)의 아들이다. 6년 상앙(商鞅)을 임용하여 변법(變法)을 실천했다.
본격적인 개혁으로 국부를 키우고 징병을 양성하여 (魏)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생애

성은 영(嬴)이고, 이름은 거량(渠梁)이다. 기원전 359년과 기원전 351년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시행했다.
효공 11년 기원전 350년, 함양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역사상 최초로 군자를 위한 부세를 징수했다. 대외적으로는 (楚)나라와 화친하고 (韓)과 맹약을 맺고, 다시 진(秦), 조(趙), (齊) 삼국 동맹을 맺어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위(魏)나라를 동서에서 협공하고자 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魏)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낙수(洛水) 이동의 땅을 개척했다.
전국 초기 초강대국이었던 위(魏)나라는 진(秦)나라의 동진정책에 밀려 그 도성을 하동의 안읍에서 동쪽의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이후 병이 들어 44세에 죽었다.

상앙을 참모로 삼다

진효공(秦孝公)의 시기는 전국시대로 접어든 시기로 난세의 심도가 깊었다. 진효공(秦孝公)은 즉위 당시 진(秦)나라가 중원의 제후국에 속하지 못하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렸다.

“옛날 선군 진목공(秦穆公)은 덕을 닦고 무력을 길러 동쪽으로 진(秦)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황하를 경계로 삼았다. 또한 서쪽으로는 융적을 제압하고 땅을 1000리나 넓혔다. 천자가 그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리자 제후들이 모두 착하했다.
후대를 위해 가업을 개창한 것이 참으로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 대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고 국내에 우환이 있어 밖의 일을 처리할 여가가 없었다. 3진이 이 틈을 노려 하서를 빼앗았다.
선군 진헌공(秦献公)은 즉위한 후 도성을 역양으로 옮기고 동쪽으로 진출함으로써 진목공(秦穆公) 때의 고지를 회복하고 당시의 정령을 실행하고자 했다.
과인은 실지를 회복하고 정령의 본의를 밝게 드러내고자 하나 늘 부끄럽고 비통한 생각뿐이다. 빈객과 군신들 가운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진(秦)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오라! 내가 그에게 관직을 내리고 땅도 나누어줄 것이다.”

구현령(求賢令)이 포고되자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중 위(魏)나라의 상앙(商鞅)이 진효공을 찾아왔다.
상앙은 진효공의 총신인 대부 경감(景監)을 찾아갔고 경감은 그를 진효공(秦孝公)에게 천거했다. 『상군열전』에 따르면 상앙(商鞅)은 먼저 도가에서 말하는 최상의 치도인 제도부터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은 이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태평천하에서 구사할 수 있는 치도였고, 당시 상황은 그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닷새 뒤 상앙(商鞅)은 진효공(秦孝公)에게 다시 찾아갔고, 이번에는 왕도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하지만 진효공(秦孝公)의 입장에서 왕도 또한 제도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을 찾아갔을 때 그는 패도(覇道)에 대해 설명을 했다.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는 패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진효공은 매우 기뻐하며 3일동안 상앙(商鞅)과 문답(問答)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상앙(商鞅)을 곧바로 참모로 삼았다.

법령집행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다

새로운 치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조정의 명을 거스르지 않고 잘 듣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마련한 변법은 세족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도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려웠기에 진효공(秦孝公)은 고민이 많았다. 그 때 상앙(商鞅)이 나섰다. 상앙은 도성의 남문에 3장(丈) 길이의 나무를 세운 뒤 옆에 방을 붙였다.

“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가 있으면 10금의 상을 내릴 것이다.”

이를 본 백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속뜻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네. 아무튼 속지 않는 게 좋을 것일세.”

아무도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상앙(商鞅)이 다시 분부했다.

"50금의 상을 주겠다고 다시 써서 붙여라.”

이때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진(秦) 나라는 자고로 많은 상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포고문이 나붙었으니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다. 비록 50금을 주지 않을지라도 아무 상도 내리지 않을 리 없다. 설령 상을 주지 않을지라도 벌을 내릴 리야 있겠는가!”

그러고는 그가 나서서 나무를 뽑아 어깨에 메고 가 북문에 세웠다. 관원이 곧 이 사실을 보고하자 곧바로 50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백성들이 서로 말했다.

“좌서장은 명령을 내리면 꼭 실행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남문사목(南門徙木), 사목상금(徙木償金), 사목지신(徙木之信), 이목지신(移木之信) 등의 성어가 나왔다.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백성들은 조정의 정령을 믿게 되었다.

변법의 시행

진효공은 상앙의 제안에 따라 아래와 같이 두 번의 변법을 시행하였다.

1차 변법의 시행령

  • 천도(遷都): 진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함양(咸陽) 땅이니 도읍을 역성에서 함양으로 옮긴다.
  • 관작(官爵): 전장에서 적의 머리를 하나 얻을 때마다 한 계급씩 승진한다. 반면 후퇴하는 자는 즉시 참형에 처한다. 존비와 관작의 등급은 전공에 따라 정하며, 전공이 없는 자는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법에 의해 삼베옷을 입고 소를 타고 다녀야 한다.
  • 십오(什伍): 5개 가오를 오(伍), 10개 가호를 십(什)으로 조직해 상호 연대책임을 진다.
  • 준법(遵法): 남녀노소, 상하귀천 할 것 없이 이 법령이 공포되는 날로부터 모두 준수해야만 한다.

이 외에도 봉건제도를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로 바꾸고 인구를 대거 늘리기 위해 부모와 장성한 자식이 한 집에 살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2차 변법의 시행령

  • 현(縣) 설치: 경내의 모든 촌락은 현에 소속시킨다. 작은 향 여럿이 모여 하나의 현이 되었다.
  • 개간: 수레와 말이 다니는 도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교외와 광야를 개간한다.
  • 중산: 백성들은 본업인 농사에 종사해야 한다. 곡식과 비단을 많이 쌓아놓은 자에게는 요역을 면제해준다. 아들이 둘 이상 있을 때에는 반드시 별거해야 한다. 장정들은 각기 소정의 세를 국가에 내야 한다. 별거를 원치 않는 자는 여러 사람 분의 세를 내야 한다. 생산 단위의 세분화를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 외에도 모든 전답의 국유화를 전제로 하여 황무지를 남김없이 개간하기 위한 의도로 부세법(賦稅法)을 시행하였다. 군사 이동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다.

참고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조병한 역, 『중국통사』 ,서커스, 2016.
박인수 저, 『춘추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
신동준 저, 『춘추전국의 영웅들1, 패도로 난세를 평정하다』, 한길사, 2011.
신동준 저, 『춘추전국의 영웅들3, 천하통일의 방략』, 한길사, 2011.
조관희 저,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고대 신화전설의 시대에서 신해혁명까지』, 궁리출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