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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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궈펑]]== | ||
+ | [[화궈펑]]은 마오쩌둥에 의해 임명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지시와 결정을 절대적 권위 삼아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외관상 마오주의 형식을 많이 따랐더라도, 마오의 모든 행방을 따르진 않았다. 화궈펑은 마오주의 말기의 정책을 폐기하고 상당부분을 1950년대의 마오주의로 돌렸다. 화궈펑은 마오의 외양을 하면서 마오 말기의 정책을 폐기했는데, 예를 들어 "백화제방"이라는 마오의 슬로건을 외치며, 문혁 때 폐기되었던 연극·오페라·영화 등을 부활시켰다. 문학 잡지와 학술 잡지도 재발행되었고, 다양한 잡지들이 새롭게 창간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상흔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양위중용"이라는 마오주의의 격언을 상기시키며 국제문화교류를 촉진하고 서양문학도 번역 출판하도록 했다. 그리고 1977~78년에는 문혁이나 그 이전부터 침묵당했던 지식인들이 조용히 복권되었다. 그리고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문혁기의 평등주의적 교육개혁을 폐지하고 50년대의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를 재확립했다. 대학교와 고등연구소가 부활하고, 이에 따라 관련 기관들의 기능을 문혁 이전처럼 회복시켜 나가며 새로이 공포된 당과 국가헌법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용어인 '4개 현대화'를 위해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게다가 공식 이데올로기로는 마오주의의 [[다자이 모델]]이 계속 찬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업생산을 위한 [[자류지]] 확대를 허용하고 농촌시장의 발전을 장려했다. 화궈펑은 경제적 근대화의 주역이 되고자 했다. 그는 1975년 가을 덩샤오핑이 국무원에 제출한 정책 문건에 기초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수사적 표현을 빌려 경제적 제안을 하였다. (물론, 덩샤오핑의 제안이 먼저였다는 것은 철저히 내비치지 않았다) 1977년 화궈펑 정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고, 중국의 석탄과 석유를 수출하여 그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 <br><br>화궈펑은 1978년 11월에 개막사에서 중앙공작회의의 의제로 ①농업을 기초로 하는 방침 문제와 농업 생산력 제고 문제, ②1979년과 1980년의 경제 계획에 관한 문제 ③리셴녠(李先念)이 국무원 이론회의에서 했던 연설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화궈펑은 이 세 가지에 대해 토론하기 전에 먼저 1979년 1월부터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당의 사업 중심을 전환하는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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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덩샤오핑== | ||
+ | 덩샤오핑은 대내 개혁을 통해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이끌어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 대신 대외개방을 통해 국제 시장에 참여하고자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덩샤오핑]] 문서 참고. | ||
− | + | ==덩샤오핑 이후~현재== | |
+ | ==참고자료== | ||
+ | 『차이나 핸드북』, 성균중국연구소 엮음 <br>『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모리스 마이스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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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5일 (화) 21:59 기준 최신판
개혁개방 연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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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닉슨의 중국 방문 |
1973 | 43 방안 |
1975 | 덩샤오핑, 국무원에 사회주의 현대화 관련 정책 문건 제출 |
1976 |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당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
1978 | 중국 고위 경제사절단 해외 방문 |
1978 | 11기 3중전회 |
1979 | 중미국교정상화 |
개요
단기적으로는 공산당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의 결과, 장기적으로는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문혁이 종결되는 1976년 즈음의 중국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195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마오쩌둥 사망과 문혁의 종결 이후 등장한 화궈펑 체제는 체제 정당성을 위해서 새로운 경제발전 방식을 모색하였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개혁개방은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한 화궈펑 체제의 의제이기도 했다. 게다가 개혁개방은 본래 마오 시기, 즉 문혁 후반기의 중미 관계 개선이나 외국 자본 유치, 기술 도입 등의 기초 위에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화궈펑 체제에서 개혁개방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문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1978년 11기 3중전회부터이다. 화궈펑 체제는 마오쩌둥의 지명을 통해 등장했으므로 마오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양개범시를 제시했다. 하지만 양개범시가 존재하는 한 문혁 시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에 문혁 반대 세력이 양개범시에 대해 반대를 하며 진리표준토론을 전개했다. 그 결과 화궈펑 세력이 패배하고 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덩샤오핑 등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혁개방 이전 | 개혁개방 이후 | |
---|---|---|
소유 제도 | 공유제 | 공유제+비공유제 |
자원배분 제도 | 계획경제 | 시장경제+계획경제 |
경제발전의 중심(노동력의 배치) | 전통·농업(농촌) | 현대·공업(도시) |
화궈펑
화궈펑은 마오쩌둥에 의해 임명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지시와 결정을 절대적 권위 삼아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외관상 마오주의 형식을 많이 따랐더라도, 마오의 모든 행방을 따르진 않았다. 화궈펑은 마오주의 말기의 정책을 폐기하고 상당부분을 1950년대의 마오주의로 돌렸다. 화궈펑은 마오의 외양을 하면서 마오 말기의 정책을 폐기했는데, 예를 들어 "백화제방"이라는 마오의 슬로건을 외치며, 문혁 때 폐기되었던 연극·오페라·영화 등을 부활시켰다. 문학 잡지와 학술 잡지도 재발행되었고, 다양한 잡지들이 새롭게 창간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상흔문학'이 쏟아져 나왔다. "양위중용"이라는 마오주의의 격언을 상기시키며 국제문화교류를 촉진하고 서양문학도 번역 출판하도록 했다. 그리고 1977~78년에는 문혁이나 그 이전부터 침묵당했던 지식인들이 조용히 복권되었다. 그리고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문혁기의 평등주의적 교육개혁을 폐지하고 50년대의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를 재확립했다. 대학교와 고등연구소가 부활하고, 이에 따라 관련 기관들의 기능을 문혁 이전처럼 회복시켜 나가며 새로이 공포된 당과 국가헌법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용어인 '4개 현대화'를 위해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게다가 공식 이데올로기로는 마오주의의 다자이 모델이 계속 찬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업생산을 위한 자류지 확대를 허용하고 농촌시장의 발전을 장려했다. 화궈펑은 경제적 근대화의 주역이 되고자 했다. 그는 1975년 가을 덩샤오핑이 국무원에 제출한 정책 문건에 기초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수사적 표현을 빌려 경제적 제안을 하였다. (물론, 덩샤오핑의 제안이 먼저였다는 것은 철저히 내비치지 않았다) 1977년 화궈펑 정부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로부터 근대적 기술을 도입하고, 중국의 석탄과 석유를 수출하여 그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
화궈펑은 1978년 11월에 개막사에서 중앙공작회의의 의제로 ①농업을 기초로 하는 방침 문제와 농업 생산력 제고 문제, ②1979년과 1980년의 경제 계획에 관한 문제 ③리셴녠(李先念)이 국무원 이론회의에서 했던 연설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화궈펑은 이 세 가지에 대해 토론하기 전에 먼저 1979년 1월부터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당의 사업 중심을 전환하는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대내 개혁을 통해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이끌어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폐쇄적인 자력갱생정책 대신 대외개방을 통해 국제 시장에 참여하고자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덩샤오핑 문서 참고.
덩샤오핑 이후~현재
참고자료
『차이나 핸드북』, 성균중국연구소 엮음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모리스 마이스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