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6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6번째 줄: | 6번째 줄: | ||
|출생지 = 두릉현(杜陵縣) | |출생지 = 두릉현(杜陵縣) | ||
|사망일 = B.C 60 | |사망일 = B.C 60 | ||
− | | | + | |국적 = 전한 |
− | | | + | |가족 = 아버지 소건, 아들 소원(蘇元), 소안(蘇安), 소통국(蘇通国). 형제는 蘇嘉, 蘇賢. |
− | | | + | |자 = 자경 |
+ | |활동분야 = 정치 | ||
+ | |별칭 = 관내후 | ||
}} | }} | ||
==개요== | ==개요== | ||
− | 소무(蘇武)는 중국 | + | 소무(蘇武)는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이다. 자는 자경(子卿)이다. 활동분야는 정치이고, 별칭은 관내후이다. |
− | |||
==생애== | ==생애== | ||
+ | 소무는 BC140년에 [[전한]] 중기 군인인 위위 소건(蘇建)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소건이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소무 형제가 모두 관리직에 올랐고 소무는 점차 출세하여 궁궐의 정원인 이원(樲園)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계속해서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서로 사신을 억류하는 일이 잦았다. <br> | ||
+ | 기원전 100년에 흉노에는 저제우 선우가 즉위하고 한나라의 침공이 있을까 두려웠던 그는 억류하고 있던 한나라의 사신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에 한무제는 소무를 중랑장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부중랑장인 장승(張勝)과 임시 사신인 상혜(常惠)와 더불어 병사와 척후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함께 출발하였다. 사신 일행이 흉노에 이르렀고 그들은 가지고 간 예물을 [[선우]](흉노왕의 칭호(單于))에게 바쳤다. <br> | ||
− | + | 흉노가 사신을 파견하여 소무 일행을 한나라로 호송하려고 할 무렵,마침 흉노 혼야왕의 조카 구왕(駆王)이 장수(長水)의 우상(虞賞)등과 더불어 흉노의 반기를 들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위율(흉노에 항복한 한나라 사람, 선우의 측근, 韋率)이 이끌고 흉노의 항복한 한나라 병사들과 음모를 꾸민 그는, 선우의 어머니인 연지(姢扺)를 협박하여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한나라에 있을 때 부중랑장으로 온 장승과 잘 알고 자낸 사이였던 우상은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계획을 말했다. <br> | |
− | + | :"한나라 천자가 위율을 매우 원망한다고 들었다. 내가 한나라를 위해 활을 숨기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 위율을 죽이겠다. 내 모친과 아우가 한나라에 남아있으니 모친과 아우를 도려주기 바란다."<br> | |
− | + | 그 말을 듣고 장승이 허락하고는 가지고 온 물품을 우상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선우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할 때 그 틈을 타 거사를 실행 하려고 했지만 그중 한 사람이 밤중에 밀고했다. 선우의 자제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과 전투를 벌여 구왕 등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우상은 생포되었다.<br> | |
− | + | 선우가 위율에게 이 사건을 다스리게 했다. 장승이 그 사실을 알고서 앞서 우상과 나눈 대화가 발설될까 두려워 그 전말을 소무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소무가 흉노에게 치욕스런 일을 당하리라 예측하고 자살하려 했지만 장승과 상혜가 겨우 자살을 막았다. | |
− | + | 예상대로 우상은 장승을 끌어들였고, 선우는 노하여 여러 귀인들을 소집해 상의하고서 한나라 사신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좌이질자(左伊秩呰: 훙노의 관직)가 그들을 죽이는 대신 그들을 모두 항복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br> | |
− | |||
− | + | 선우가 위율을 보내서 소무를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소무가 상혜 등에게 '사신의 임무를 잘못하여 황제를 욕되게 했으니, 살아난다고 한들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로 돌아가리오?'라고 말한 뒤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위율이 놀라서 직접 소무를 안고 말을 달려 의사를 불렀다. 응급처치를 마치자 소무는 기절한지 반나절이 되어서야 소생했다. 상혜등이 통곡하고 소무를 수레에 태우고서 진영으로 돌아왔다. 사신단 일행 모두가 소무를 데리고 사신 진영으로 오면서 대성통곡했다. 선우는 소무의 절개를 장하게 여겨 회유를 시도했다. | |
− | 소무는 그곳으로 추방당하여 들쥐와 풀뿌리로 | + | ===위율의 회유=== |
+ | "소군(蘇君)! 나는 예전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신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큰 은혜를 입어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소.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유한 말과 가축이 산을 뒤덮을 만큼 부귀를 누리고 있소. 소군이 오늘 항복한다면 내일부터 나와 똑같이 부귀를 누릴 것이오. 부질없이 초야의 퇴비처럼 몸을 버린들 누가 알아주겠소?" | ||
+ | 소무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위율이 다시 말했다. | ||
+ | "소군이 내 충고를 받아들여 항복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으려니와, 만약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뒷날 나를 보려고 애써도 보지 못할 게요!" | ||
+ | 소무는 이 말을 듣고 위율에게 욕설 퍼부었다. | ||
+ | " 너는 은혜와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신하로서 군주를 배반하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등진 채 오랑캐에게 항복했다. 그런 너를 무엇 때문에 보겠느냐! 또 선우가 너를 신임하여 생사를 결정하도록 맡겼거늘 공평한 마음과 바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두 군주를 싸우도록 하며 재앙과 패망의 난리를 꾸민다. 한나라 사신을 죽인 남월(南越)은 나라가 도륙되어 한나라의 9군으로 변했고, 한나라 사신을 죽인 대원(大宛)의 왕은 그 머리가 북문에 걸렸으며, 한나라 사신을 죽인 조선은 멸망당했다. 유독 흉노만이 아직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다. 너는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죽여 한나라와 흉노를 전쟁으로 몰아간다. 흉노의 재앙은 나로부터 시작되리라."<br> | ||
+ | [[파일:소무가 양을 키우는 모습 중국사이트.jpg|섬네일|소무가 양을 키우는 모습|300픽셀]] | ||
+ | 위율이 하는 수 없이 선우에게 보고하자 선우는 더더욱 항복을 받아내고 싶어하며 지하창고로 유폐시키고 사람의 출입을 막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소무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눈을 씹어서 입고 있던 가죽털 옷과 함께 삼켰다. 며칠이 지나도 죽지 않자 흉노 사람들은 소무를 신으로 여겼다.<br> | ||
+ | 선우는 소무가 결백을 주장하며 굴복을 거부하자 격노하여 저멀리 북해의 변으로 추방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려 끝까지 돌아오지지 못하게 했다.<br> | ||
+ | 소무는 그곳으로 추방당하여 음식이 오지않아,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했다. 소무는 양치기가 되어 양을 키우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절의를 지키며 살아가게 된다. 한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자, 한나라와 흉노는 다시 화친하면서 소무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흉노땅에 머문지 19년만의 귀국이었는데,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 ||
+ | 몇년이 지나 소무는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받고 식읍 300호를 받았지만 받은 하사품들을 아우들과 친우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소무는 여든을 넘겨 살다가 병을얻어 죽고말았다. | ||
− | |||
− | + | ==이릉과 소무== | |
− | == | + | [[이릉]](李陵)과 소무(蘇武)는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로 동시대를 살아갔던 인물인데 서로가 살아간 인생의 모습은 매우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면서 흥미롭고 가슴아픈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되고,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
− | + | [[파일:이릉과 소무의 이별장면 중국 위키.jpg|섬네일|이릉과 소무의 이별장면, 출처: 중국어 위키|300픽셀]] | |
− | + | 소무가 한나라 무제가 내린 포로 교환의 임무를 맡아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땅에 들어갔다가 내란에 휘말려 체포되는 변을 겪고, 이릉은 소무가 흉노땅으로 들어간 다음해 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토벌의 장수가 되어 5,000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훙노의 5만 병사들을 대적하여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끝내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포로가 된다. | |
+ | 이 소식을 들은 무제가 격노하여 이릉의 일가를 몰살시키는 형벌을 내렸고 이릉도 이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와 슬픔으로 절망하게 되는데 흉노왕 선우가 그를 빈객으로 후하게 대접하자 마음을 돌려 흉노 땅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 ||
+ | 이릉이 선우의 명을 받아 소무를 찾아가면서 두사람의 관계는 시작된다. | ||
− | + | 이릉이 소무에게 주연을 베풀고 위로하면서 ‘선우가 나를 보내 그대를 설득하여 데리고 오라 하였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데(인생여조로 人生如朝露) 그대도 이제 그만 고생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라고 설득하였지만 소무가 거절하자 이릉은 그냥 혼자서 돌아가야만 했다. | |
− | + | 그러나 이릉은 소무의 궁핍한 생활을 딱하게 여겨 소무를 도와주고 소무는 고생을 덜며 양치기 생활을 계속하였고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열고 교류하며 지내게 되었다. | |
− | + | 세월이 흘러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 땅에 특사를 파견하고 이 특사의 노력으로 소무는 풀려나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이릉에게도 같이 귀국할 것을 권하지만 이릉은 거절하고 흉노땅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게 된다. | |
− | + | 이릉은 귀국하는 소무와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서로가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주고받고 또 소무의 귀국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교신을 하게 된다. | |
− | + | [[파일:이릉과 소무.jpg|섬네일|나는 이제 오랑캐의 옷을 입었소|300픽셀]] | |
− | 各言長相思 (서로가 늘 잊지 말자 하네) | + | ===헤어지며 서로에게 보내는 시=== |
− | + | <big>'''與蘇武詩 其三 <소무에게 주는 세 번째 시>'''</big> | |
− | 安知非日月 (어찌 해와 달만이 아님을 알리오) | + | ''' - 李陵(이릉)''' |
− | + | 攜手上河梁 (서로 손을 이끌며 다리에 오르는데) | |
− | 弦望自有時 (스스로 차고 기우는 때가 있음을) | + | 游子暮何之 (떠나는 사람 저녁 늦게 어디로 가는가) |
− | + | 徘徊蹊路側 (좁은 길가를 서성이며 배회하며) | |
− | 努力崇明德 (밝은 덕을 모시기로 노력하고) | + | 悢悢不能辭 (한스럽고 한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네) |
− | + | 行人難久留 (가는 사람은 오래 머물 수 없어) | |
− | 皓首以爲期 (백발이 돼도 만날 것을 기약하네) | + | 各言長相思 (서로가 늘 잊지 말자 하네) |
− | + | 安知非日月 (어찌 해와 달만이 아님을 알리오) | |
− | + | 弦望自有時 (스스로 차고 기우는 때가 있음을) | |
− | + | 努力崇明德 (밝은 덕을 모시기로 노력하고) | |
− | + | 皓首以爲期 (백발이 돼도 만날 것을 기약하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big>'''蘇武別陵詩(소무가 이별하며 이릉에게 주는 시)'''</big> | ||
+ | '''- 蘇武(소무)''' | ||
+ | 雙鳧俱北飛 (두마리 오리가 함께 북녘을 날다가) | ||
+ | 一鳧獨南翔 (한 마리만 홀로 남쪽으로 날아가네) | ||
+ | 子當留斯館 (그대는 마땅히 옛집에 머물겠지만) | ||
+ | 我當歸故鄕 (나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리) | ||
+ | 一別如秦胡 (한번 헤어지면 진과 호로 갈라서니) | ||
+ | 會見何渠央 (다시 만남은 멀기만 하구려) | ||
+ | 愴恨切中懷 (슬픔으로 마음은 찢어져 나가) | ||
+ | 不覺淚霑裳 (눈물이 옷깃에 젖는데도 알지 못하네) | ||
+ | 願子長努力 (원컨데 그대는 항상 노력하여) | ||
+ | 言笑莫相忘 (서로 잊지 말자 웃으면서 말해주시게) |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
오피니언뉴스[http://www.opinionnews.co.kr] | 오피니언뉴스[http://www.opinionnews.co.kr] | ||
+ | 중국위키피디아 [https://zh.m.wikipedia.org/wiki/苏武] | ||
+ | 일본위키피디아[https://ja.m.wikipedia.org/wiki/蘇武] |
2019년 6월 27일 (목) 17:33 기준 최신판
소무(蘇武) | |
---|---|
| |
출생 |
B.C 140 두릉현(杜陵縣) |
사망 |
B.C 60 |
국적 | 전한 |
별칭 | 관내후 |
가족 | 아버지 소건, 아들 소원(蘇元), 소안(蘇安), 소통국(蘇通国). 형제는 蘇嘉, 蘇賢. |
개요
소무(蘇武)는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이다. 자는 자경(子卿)이다. 활동분야는 정치이고, 별칭은 관내후이다.
생애
소무는 BC140년에 전한 중기 군인인 위위 소건(蘇建)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소건이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소무 형제가 모두 관리직에 올랐고 소무는 점차 출세하여 궁궐의 정원인 이원(樲園)의 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계속해서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서로 사신을 억류하는 일이 잦았다.
기원전 100년에 흉노에는 저제우 선우가 즉위하고 한나라의 침공이 있을까 두려웠던 그는 억류하고 있던 한나라의 사신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에 한무제는 소무를 중랑장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부중랑장인 장승(張勝)과 임시 사신인 상혜(常惠)와 더불어 병사와 척후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함께 출발하였다. 사신 일행이 흉노에 이르렀고 그들은 가지고 간 예물을 선우(흉노왕의 칭호(單于))에게 바쳤다.
흉노가 사신을 파견하여 소무 일행을 한나라로 호송하려고 할 무렵,마침 흉노 혼야왕의 조카 구왕(駆王)이 장수(長水)의 우상(虞賞)등과 더불어 흉노의 반기를 들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위율(흉노에 항복한 한나라 사람, 선우의 측근, 韋率)이 이끌고 흉노의 항복한 한나라 병사들과 음모를 꾸민 그는, 선우의 어머니인 연지(姢扺)를 협박하여 한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한나라에 있을 때 부중랑장으로 온 장승과 잘 알고 자낸 사이였던 우상은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 계획을 말했다.
- "한나라 천자가 위율을 매우 원망한다고 들었다. 내가 한나라를 위해 활을 숨기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 위율을 죽이겠다. 내 모친과 아우가 한나라에 남아있으니 모친과 아우를 도려주기 바란다."
그 말을 듣고 장승이 허락하고는 가지고 온 물품을 우상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선우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할 때 그 틈을 타 거사를 실행 하려고 했지만 그중 한 사람이 밤중에 밀고했다. 선우의 자제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과 전투를 벌여 구왕 등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우상은 생포되었다.
선우가 위율에게 이 사건을 다스리게 했다. 장승이 그 사실을 알고서 앞서 우상과 나눈 대화가 발설될까 두려워 그 전말을 소무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소무가 흉노에게 치욕스런 일을 당하리라 예측하고 자살하려 했지만 장승과 상혜가 겨우 자살을 막았다.
예상대로 우상은 장승을 끌어들였고, 선우는 노하여 여러 귀인들을 소집해 상의하고서 한나라 사신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좌이질자(左伊秩呰: 훙노의 관직)가 그들을 죽이는 대신 그들을 모두 항복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선우가 위율을 보내서 소무를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소무가 상혜 등에게 '사신의 임무를 잘못하여 황제를 욕되게 했으니, 살아난다고 한들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로 돌아가리오?'라고 말한 뒤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위율이 놀라서 직접 소무를 안고 말을 달려 의사를 불렀다. 응급처치를 마치자 소무는 기절한지 반나절이 되어서야 소생했다. 상혜등이 통곡하고 소무를 수레에 태우고서 진영으로 돌아왔다. 사신단 일행 모두가 소무를 데리고 사신 진영으로 오면서 대성통곡했다. 선우는 소무의 절개를 장하게 여겨 회유를 시도했다.
위율의 회유
"소군(蘇君)! 나는 예전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신하였으나 다행스럽게도 큰 은혜를 입어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소.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소유한 말과 가축이 산을 뒤덮을 만큼 부귀를 누리고 있소. 소군이 오늘 항복한다면 내일부터 나와 똑같이 부귀를 누릴 것이오. 부질없이 초야의 퇴비처럼 몸을 버린들 누가 알아주겠소?" 소무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위율이 다시 말했다. "소군이 내 충고를 받아들여 항복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으려니와, 만약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뒷날 나를 보려고 애써도 보지 못할 게요!" 소무는 이 말을 듣고 위율에게 욕설 퍼부었다. " 너는 은혜와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신하로서 군주를 배반하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등진 채 오랑캐에게 항복했다. 그런 너를 무엇 때문에 보겠느냐! 또 선우가 너를 신임하여 생사를 결정하도록 맡겼거늘 공평한 마음과 바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두 군주를 싸우도록 하며 재앙과 패망의 난리를 꾸민다. 한나라 사신을 죽인 남월(南越)은 나라가 도륙되어 한나라의 9군으로 변했고, 한나라 사신을 죽인 대원(大宛)의 왕은 그 머리가 북문에 걸렸으며, 한나라 사신을 죽인 조선은 멸망당했다. 유독 흉노만이 아직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다. 너는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죽여 한나라와 흉노를 전쟁으로 몰아간다. 흉노의 재앙은 나로부터 시작되리라."
위율이 하는 수 없이 선우에게 보고하자 선우는 더더욱 항복을 받아내고 싶어하며 지하창고로 유폐시키고 사람의 출입을 막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소무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눈을 씹어서 입고 있던 가죽털 옷과 함께 삼켰다. 며칠이 지나도 죽지 않자 흉노 사람들은 소무를 신으로 여겼다.
선우는 소무가 결백을 주장하며 굴복을 거부하자 격노하여 저멀리 북해의 변으로 추방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려 끝까지 돌아오지지 못하게 했다.
소무는 그곳으로 추방당하여 음식이 오지않아,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했다. 소무는 양치기가 되어 양을 키우면서 힘든 나날을 보내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절의를 지키며 살아가게 된다. 한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자, 한나라와 흉노는 다시 화친하면서 소무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흉노땅에 머문지 19년만의 귀국이었는데,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몇년이 지나 소무는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받고 식읍 300호를 받았지만 받은 하사품들을 아우들과 친우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소무는 여든을 넘겨 살다가 병을얻어 죽고말았다.
이릉과 소무
이릉(李陵)과 소무(蘇武)는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로 동시대를 살아갔던 인물인데 서로가 살아간 인생의 모습은 매우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면서 흥미롭고 가슴아픈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되고,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소무가 한나라 무제가 내린 포로 교환의 임무를 맡아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땅에 들어갔다가 내란에 휘말려 체포되는 변을 겪고, 이릉은 소무가 흉노땅으로 들어간 다음해 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토벌의 장수가 되어 5,000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훙노의 5만 병사들을 대적하여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끝내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포로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가 격노하여 이릉의 일가를 몰살시키는 형벌을 내렸고 이릉도 이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와 슬픔으로 절망하게 되는데 흉노왕 선우가 그를 빈객으로 후하게 대접하자 마음을 돌려 흉노 땅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릉이 선우의 명을 받아 소무를 찾아가면서 두사람의 관계는 시작된다.
이릉이 소무에게 주연을 베풀고 위로하면서 ‘선우가 나를 보내 그대를 설득하여 데리고 오라 하였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데(인생여조로 人生如朝露) 그대도 이제 그만 고생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라고 설득하였지만 소무가 거절하자 이릉은 그냥 혼자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릉은 소무의 궁핍한 생활을 딱하게 여겨 소무를 도와주고 소무는 고생을 덜며 양치기 생활을 계속하였고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열고 교류하며 지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하여 흉노 땅에 특사를 파견하고 이 특사의 노력으로 소무는 풀려나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가게 되고 이릉에게도 같이 귀국할 것을 권하지만 이릉은 거절하고 흉노땅에 그대로 남아 살아가게 된다.
이릉은 귀국하는 소무와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서로가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주고받고 또 소무의 귀국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교신을 하게 된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보내는 시
與蘇武詩 其三 <소무에게 주는 세 번째 시> - 李陵(이릉) 攜手上河梁 (서로 손을 이끌며 다리에 오르는데) 游子暮何之 (떠나는 사람 저녁 늦게 어디로 가는가) 徘徊蹊路側 (좁은 길가를 서성이며 배회하며) 悢悢不能辭 (한스럽고 한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네) 行人難久留 (가는 사람은 오래 머물 수 없어) 各言長相思 (서로가 늘 잊지 말자 하네) 安知非日月 (어찌 해와 달만이 아님을 알리오) 弦望自有時 (스스로 차고 기우는 때가 있음을) 努力崇明德 (밝은 덕을 모시기로 노력하고) 皓首以爲期 (백발이 돼도 만날 것을 기약하네)
蘇武別陵詩(소무가 이별하며 이릉에게 주는 시) - 蘇武(소무) 雙鳧俱北飛 (두마리 오리가 함께 북녘을 날다가) 一鳧獨南翔 (한 마리만 홀로 남쪽으로 날아가네) 子當留斯館 (그대는 마땅히 옛집에 머물겠지만) 我當歸故鄕 (나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리) 一別如秦胡 (한번 헤어지면 진과 호로 갈라서니) 會見何渠央 (다시 만남은 멀기만 하구려) 愴恨切中懷 (슬픔으로 마음은 찢어져 나가) 不覺淚霑裳 (눈물이 옷깃에 젖는데도 알지 못하네) 願子長努力 (원컨데 그대는 항상 노력하여) 言笑莫相忘 (서로 잊지 말자 웃으면서 말해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