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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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개요 == | |
− | [[파일: | + | [[파일:손숙오.jpeg|오른쪽|300픽셀]] |
− | + | [[춘추 시대]] 초나라의 명재상. 성은 위(蔿)이며 이름이 오(敖)이다. 아버지는 위가(蔿賈)로, 위애렵(蔿艾獵)이라고도 불렸다. 손숙이라는 성씨는 아버지인 위가가 반란에 연루돼 횡사할 때,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만든 위장 성씨이다. B.C.530년에 태어나 B.C.593년에 사망했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인 [[초장왕]]을 보좌했다. 손숙오의 일화는 동시대, 후대의 수많은 서적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검소하고 백성들과 소통하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추앙되어 왔다. | |
{{인물정보 | {{인물정보 | ||
− | |이름 = 손숙오(孫叔敖) | + | |이름 = 손숙오(孫叔敖) |
|출생일 = B.C 630(추정) | |출생일 = B.C 630(추정) | ||
|사망일 = B.C 593(추정) | |사망일 = B.C 593(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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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생애 == |
− | + | === 재상으로 발탁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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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손숙오는 원래 초나라에서 은둔하는 재야의 선비였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우구]](虞丘)가 초장왕에게 그를 추천했다. 우구는 손숙오에게 재상의 일을 대신하게 했으며, 이후 손숙오는 석 달만에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된다. | 손숙오는 원래 초나라에서 은둔하는 재야의 선비였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우구]](虞丘)가 초장왕에게 그를 추천했다. 우구는 손숙오에게 재상의 일을 대신하게 했으며, 이후 손숙오는 석 달만에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된다. | ||
− | === 다스리지 않아도 | + | === 다스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 |
손숙오는 재상으로써 "(그가)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未治而國人信之)"<ref>신서 춘추</ref>고 평가될 정도로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실제로 관리와 백성의 사이가 화목하고, 풍속이 순박해질 정도였다. 가벼운 정치로 백성들은 금지 사항을 반드시 지켰고, 관리들은 그를 속이지 않았으며, 도적떼가 나타나지 않았다.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손숙오는 재상으로써 "(그가)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未治而國人信之)"<ref>신서 춘추</ref>고 평가될 정도로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실제로 관리와 백성의 사이가 화목하고, 풍속이 순박해질 정도였다. 가벼운 정치로 백성들은 금지 사항을 반드시 지켰고, 관리들은 그를 속이지 않았으며, 도적떼가 나타나지 않았다.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
=== 잘못된 화폐 제도를 바로잡다 === | === 잘못된 화폐 제도를 바로잡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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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왕]]이 화폐를 바꾸었다. 원래의 화폐는 너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동전은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불편했다. 백성들은 새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초나라의 시장은 혼란해졌다. 손숙오는 시장의 혼란이 화폐 때문임을 눈치채고, 초장왕에게 원래의 화폐로 돌아갈 것을 간언했다.(「前日更幣, 以為軽. 今市令來言曰『市亂, 民莫安其処, 次行之不定』. 臣請遂令複如故.」) 이후 시장의 혼란은 안정됐다. | [[초장왕]]이 화폐를 바꾸었다. 원래의 화폐는 너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동전은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불편했다. 백성들은 새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초나라의 시장은 혼란해졌다. 손숙오는 시장의 혼란이 화폐 때문임을 눈치채고, 초장왕에게 원래의 화폐로 돌아갈 것을 간언했다.(「前日更幣, 以為軽. 今市令來言曰『市亂, 民莫安其処, 次行之不定』. 臣請遂令複如故.」) 이후 시장의 혼란은 안정됐다. | ||
− | === 낮은 | + | === 낮은 수레를 높이다=== |
초나라 사람들은 민속에서부터 낮은 수레(庳車)를 이용해왔다. 그러나 [[초장왕]]이 낮은 수레가 말에게는 불편하다고 생각해, 수레를 높이려했다. 이에 재상인 손숙오가 말리며, “정령이 자주 하달되면 백성들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 바를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만약에 왕께서 반드시 수레의 높이를 올리고 싶으시다면, 신은 청컨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문지방을 올리게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의 신분은 모두 군자들입니다. 그들은 문지방을 지나면서 번거롭게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레의 높이가 높아지게 됩니다.(「令數下, 民不知所従, 不可. 王必欲高車, 臣請教閭里使高其梱. 乗車者皆君子, 君子不能數下車.)"라고 간언했다. 초장왕은 이를 허락했고, 반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앉아서 타던 수레를 높이게 되었다. | 초나라 사람들은 민속에서부터 낮은 수레(庳車)를 이용해왔다. 그러나 [[초장왕]]이 낮은 수레가 말에게는 불편하다고 생각해, 수레를 높이려했다. 이에 재상인 손숙오가 말리며, “정령이 자주 하달되면 백성들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 바를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만약에 왕께서 반드시 수레의 높이를 올리고 싶으시다면, 신은 청컨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문지방을 올리게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의 신분은 모두 군자들입니다. 그들은 문지방을 지나면서 번거롭게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레의 높이가 높아지게 됩니다.(「令數下, 民不知所従, 不可. 王必欲高車, 臣請教閭里使高其梱. 乗車者皆君子, 君子不能數下車.)"라고 간언했다. 초장왕은 이를 허락했고, 반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앉아서 타던 수레를 높이게 되었다. | ||
− | === | + | ==후대의 평가 == |
+ | 사마천은 손숙오에 대해이 "바로 손숙오가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감화되어 따른 것이다.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직접 보며 본받고, 멀리 사는 자들은 주변에 있는 것의 변화를 관망하며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손숙오는 세 차례나 재상 직위에 올랐어도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 재능으로 얻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 차례 파면되어도 후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此不教而民従其化, 近者視而效之, 遠者四面望而法之. 故三得相而不喜, 知其材自得之也;三去相而不悔, 知非己之罪也.)"라고 평가했다.<br><ref>생애 부분의 대부분의 텍스트는 사마천의 『사기』를 정리한 것임</ref> | ||
+ | |||
+ | [[초장왕]]이 화폐를 크게 바꾸고, 낮은 수레를 올리고자 한 것은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큰 동전을 불편해할 것이고, 낮은 수레가 민속에서 왔기 때문에 반발감도 클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다. 이는 백성의 눈높이에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손숙오는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정사를 행하고 아무리 왕이라도 솔직하게 간언하고 보좌하는 것, 그것이 손숙오가 후대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 ||
+ | |||
+ | == 관련인물 및 일화 == | ||
+ | ==== [[초장왕]]과의 인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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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씨춘추]]』의 ⟨불구⟩에서 손숙오와 초장왕의 첫만남이 나타나있다. 어느날 [[초장왕]]이 조회를 끝내고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예로부터 어진선비를 스승으로 맞으면 훌륭한 군왕이 되고, 똑똑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면 처세에 걱정이 없다고 했다'며 신하들이 왕 본인보다 능력이 떨어짐을 걱정했다. 이때 손숙오라는 자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대규모의 관개수리공사를 시행한 덕분에 곡물 생산을 크게 늘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초장왕]]이 곧바로 손숙오를 불러들여, 그와 정치에 관해 몇마디 나누었더니, [[초장왕]]은 바로 그를 재상에 등용했다.<ref>여불위, 정영호 역, 『여씨춘추』, 자유문고, 2006 中 <불구>에서</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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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왕]]은 사냥하기를 즐기고, 환락적인 삶을 살았다. 이는 손숙오의 능력을 믿고 국가의 중대사를 전부 맡겼기 때문이다. 『[[여씨춘추]]』에서는 [[초장왕]]이 패왕이 되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된 이유를 손숙오 덕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ref>『여씨춘추』 <십이기> 中</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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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머리 두개 달린 뱀(兩頭蛇) ==== | ||
+ | 손숙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머리가 두개 달린 뱀' 일화일 것이다.『[[신서]](新書)』에서 전하는 이 일화는 손숙오가 어렸을 때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본일을 서술하고 있다. | ||
− | + | 손숙오가 어렸을 때, 나가 놀고 돌아오니, 근심하며 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연유를 물으니, 울며 대답하길,<br>"오늘 저는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보았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렵습니다."<br>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지금 뱀은 어디 있느냐?"<br>(손숙오가) 말하길 "제가 들었는데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본 자는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남들이 (이 뱀을) 또 볼까 두려워, 이미 그것을 (땅에) 묻었습니다."<br>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걱정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내가 듣건대, '음덕(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덕행)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복으로써 보답한다'고 한다.<br> 사람들이 그 일화를 듣고, 모두 그의 어짊을 알게 됐다. 영윤(재상)이 되었을 때,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br><br>孫叔敖之為嬰兒也,出遊而還,憂而不食。其母問其故,泣而對曰:「今日吾見兩頭蛇,恐去死無日矣。」其母曰:「今蛇安在?」曰:「吾聞見兩頭蛇者死,吾恐他人又見,吾已埋之也。」其母曰:「無憂,汝不死。吾聞之:『有陰德者,天報以福。』」人聞之,皆諭其能仁也。及為令尹,未治而國人信之。(신서(新書) ⟨春秋⟩ 中) | |
− | + | ||
− | + | 이 일화는 손숙오의 덕행과 어짊을 강조하고 있다. 남들을 위해 불행을 몰고다니는 머리 두개 달린 뱀을 묻은 것이 陰德이며, 하늘은 그에게 재상의 자리로 보답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서]](新書)』보다 후대의 저서인 『[[열녀전]]』(《列女傳》)에서는 그 주인공을 손숙오의 어머니로 바꾸어 이 일화를 전하고 있다. 앞의 줄거리는 같으나, 손숙오의 어머니가 조언해 주는 부분이 첨가되어있다. | |
− | + | ||
+ |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죽지 않는다. 무릇 음덕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양기가 그것을 보답한다. 덕은 불길한 것을 이기고, 어짊은 백가지 화를 제거한다. 하늘은 높이 있지만 낮은 곳(에서 나는 소리)을 들을 수 있다. 《서경》에서 이르지 않았느냐 '황천은 사사로움이 없으며, 오직 덕이 이를 돕는다'라고 말이다. 너는 말하지 말고 있거라, 너는 초나라에서 흥할 것이다."<br> 손숙오가 장성함에 미치자, 영윤(재상)이 되었다.<br> 군자가 이르길 "손숙오의 어머니는 도덕의 순서를 알았다." 《시경》에서 이르길 '어머니는 성스럽고 훌륭하도다'라는 말은 이를 이름이다.<br><br>楚令尹孫叔敖之母也。叔敖為嬰兒之時,出遊,見兩頭蛇,殺而埋之。歸見其母而泣焉,母問其故,對曰:「吾聞見兩頭蛇者死,今者出遊見之。」其母曰:「蛇今安在?」對曰:「吾恐他人復見之,殺而埋之矣。」其母曰:「汝不死矣。夫有陰德者,陽報之。德勝不祥,仁除百禍。天之處高而聽卑。書不云乎:『皇天無親,惟德是輔。』爾嘿矣,必興於楚。」及叔敖長,為令尹。君子謂叔敖之母知道德之次。《詩》云:「母氏聖善。」此之謂也。 | ||
+ | |||
+ | 음덕자에게 하늘이 보답한다는 말이 '어머니의 전언'에서 '직접 어머니가 말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어머니는 《[[서경]]》을 설명할 정도로 현인이 되었다. 또한 어떤 군자의 말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손숙오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첨가되었다. 후대에서도 존경받는 재상인 손숙오를 길러내고, 그의 장래까지 꿰뚫어본 어머니의 대단함을 '하늘의 도를 알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손숙오의 머리 두개 달린 뱀 일화는 후대에 어린 아이용 교재(《[[몽구]]蒙求》)나 여성의 모범을 보여주는 책(《[[열녀전]]列女傳》)에도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 ||
− | == | + | == 사상가들의 평가 == |
=== [[유가]] === | === [[유가]] === | ||
− | 유가에서는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르는(未治而國人信之)' 정치인을 높게 평가한다. 이는 어질고(仁), 의롭고(義), 예의법도를 지키고(禮), 지혜로운(知) 사람이며, 그 근거는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백성들과 관리들이 그를 어떻게 따르는가 등의 현실 속에서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맹자, | + | 유가에서는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르는(未治而國人信之)' 정치인을 높게 평가한다. 이는 어질고(仁), 의롭고(義), 예의법도를 지키고(禮), 지혜로운(知) 사람이며, 그 근거는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백성들과 관리들이 그를 어떻게 따르는가 등의 현실 속에서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맹자]]』, 『[[순자]]』에서 손숙오를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
==== [[맹자]] ==== | ==== [[맹자]] ==== | ||
− | + | 『[[맹자]]』의 ⟨고자 下⟩에서는 손숙오에 대해 [[순임금]], [[부열]], [[교격]], [[관중]](관이오), [[백리해]]의 훌륭한 정치인들과 나란히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하늘이 점지한 인물들로, 하늘은 그들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먼저 고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 |
− | 孟子曰:「舜發於畎畝之中,傅說舉於版築之閒,膠鬲舉於魚鹽之中,管夷吾舉於士,孫叔敖舉於海,百里奚舉於市。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必先苦其心志,勞其筋骨,餓其體膚,空乏其身,行拂亂其所為,所以動心忍性,曾益其所不能。人恒過,然後能改;困於心,衡於慮,而後作;徵於色,發於聲,而後喻。入則無法家拂士,出則無敵國外患者,國恒亡。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맹자』의 ⟨고자 下⟩ 中 | + | 원문: 孟子曰:「舜發於畎畝之中,傅說舉於版築之閒,膠鬲舉於魚鹽之中,管夷吾舉於士,孫叔敖舉於海,百里奚舉於市。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必先苦其心志,勞其筋骨,餓其體膚,空乏其身,行拂亂其所為,所以動心忍性,曾益其所不能。人恒過,然後能改;困於心,衡於慮,而後作;徵於色,發於聲,而後喻。入則無法家拂士,出則無敵國外患者,國恒亡。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맹자』의 ⟨고자 下⟩ 中 |
==== [[순자]] ==== | ==== [[순자]] ==== | ||
− | + | 『[[순자]]』에서는 ⟨비상⟩편, ⟨거도⟩편, ⟨요문⟩편에서 손숙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
⟨비상⟩편에서는 손숙오에 대해 '기사(期思)라는 고을의 촌사람으로, 튀어나온 대머리에다 왼 팔이 길었으나, 수레에 기대앉은 채로 초나라의 패업을 이룩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비상⟩편의 구절은 선대의 훌륭한 정치인들의 외모는 각기 달랐고, 손숙오처럼 기이한 형상을 띠는 자도 있었으니,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품고 있는 뜻이 중요한' 것이다.(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 위 구절을 통해 손숙오의 외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비상⟩편에서는 손숙오에 대해 '기사(期思)라는 고을의 촌사람으로, 튀어나온 대머리에다 왼 팔이 길었으나, 수레에 기대앉은 채로 초나라의 패업을 이룩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비상⟩편의 구절은 선대의 훌륭한 정치인들의 외모는 각기 달랐고, 손숙오처럼 기이한 형상을 띠는 자도 있었으니,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품고 있는 뜻이 중요한' 것이다.(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 위 구절을 통해 손숙오의 외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 | 蓋帝堯長,帝舜短;文王長,周公短;仲尼長,子弓短。昔者衛靈公有臣曰公孫呂,身長七尺,面長三尺,焉廣三寸,鼻目耳具,而名動天下。楚之孫叔敖,期思之鄙人也,突禿長左,軒較之下,而以楚霸。(중략) 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長短大小,美惡形相,豈論也哉! | + | 원문: 蓋帝堯長,帝舜短;文王長,周公短;仲尼長,子弓短。昔者衛靈公有臣曰公孫呂,身長七尺,面長三尺,焉廣三寸,鼻目耳具,而名動天下。楚之孫叔敖,期思之鄙人也,突禿長左,軒較之下,而以楚霸。(중략) 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長短大小,美惡形相,豈論也哉! |
− | ⟨거도⟩편에서는 선대의 정치가들을 태신, 찬신, 공신, 성신으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태신과 찬신은 간신 무리를, 공신과 성신을 충신이자 나라를 평안하게 안 명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순자는 손숙오를 공신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공신은 '안으로는 족히 백성을 하나가 되게하고, 박으로는 족히 환난을 막게해주며, 백성들이 그와 친하고, 선비들이 그를 믿고,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스러우며,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고 게으르지 않은' 자이며, '공신을 등용하는 자는 (세상의) 강자가 되며' '반드시 영화로워지는' 것이다. | + | ⟨거도⟩편에서는 선대의 정치가들을 태신, 찬신, 공신, 성신으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태신과 찬신은 간신 무리를, 공신과 성신을 충신이자 나라를 평안하게 안 명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순자는 손숙오를 공신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공신은 '안으로는 족히 백성을 하나가 되게하고, 박으로는 족히 환난을 막게해주며, 백성들이 그와 친하고, 선비들이 그를 믿고,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스러우며,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고 게으르지 않은' 자이며, '공신을 등용하는 자는 (세상의) 강자가 되며' '반드시 영화로워지는' 것이다. [[순자]]는 손숙오를 고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 | 人臣之論:有態臣者,有篡臣者,有功臣者,有聖臣者。(중략) 內足使以一民,外足使以距難,民親之,士信之,上忠乎君,下愛百姓而不倦,是功臣者也。(중략) 故用聖臣者王,用功臣者彊,用篡臣者危,用態臣者亡。態臣用則必死,篡臣用則必危,功臣用則必榮,聖臣用則必尊。(중략) 齊之管仲,晉之咎犯,楚之孫叔敖,可謂功臣矣。 | + | 원문: 人臣之論:有態臣者,有篡臣者,有功臣者,有聖臣者。(중략) 內足使以一民,外足使以距難,民親之,士信之,上忠乎君,下愛百姓而不倦,是功臣者也。(중략) 故用聖臣者王,用功臣者彊,用篡臣者危,用態臣者亡。態臣用則必死,篡臣用則必危,功臣用則必榮,聖臣用則必尊。(중략) 齊之管仲,晉之咎犯,楚之孫叔敖,可謂功臣矣。 |
⟨요문⟩편에서는 선대 정치인들의 일화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손숙도의 일화도 있다. | ⟨요문⟩편에서는 선대 정치인들의 일화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손숙도의 일화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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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오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세 번 초나라에서 재상노릇을 함에 마음은 더욱 낮추었고, 매번 녹이 늘어나면 더욱 베풀었으며, 지위가 높아지면 예로써 더욱 공경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벌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 손숙오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세 번 초나라에서 재상노릇을 함에 마음은 더욱 낮추었고, 매번 녹이 늘어나면 더욱 베풀었으며, 지위가 높아지면 예로써 더욱 공경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벌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 ||
− | + | [[순자]]가 강조하는 정치인의 덕목은 높은 자리에 있어도 겸손하며, 받은 녹봉은 백성에게 베풀고, 임금을 공경하는 인물인 것이다. | |
− | 원문 | + | 원문: 語曰:繒丘之封人,見楚相孫叔敖曰:「吾聞之也:處官久者士妒之,祿厚者民怨之,位尊者君恨之。為相國有此三者,而不得罪於楚之士民何也?」孫叔敖曰:「吾三相楚而心瘉卑,每益祿而施瘉博,位滋尊而禮瘉恭,是以不得罪於楚之士民也。」 |
− | 語曰:繒丘之封人,見楚相孫叔敖曰:「吾聞之也:處官久者士妒之,祿厚者民怨之,位尊者君恨之。為相國有此三者,而不得罪於楚之士民何也?」孫叔敖曰:「吾三相楚而心瘉卑,每益祿而施瘉博,位滋尊而禮瘉恭,是以不得罪於楚之士民也。」 | ||
=== [[도가]] === | === [[도가]] === | ||
− | + | 도가에서는 [[장자]]와 [[열자]]에서 손숙오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재상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겸손하고 소박했던 손숙오를 칭찬하고 있다. | |
==== [[장자]] ==== | ==== [[장자]] ==== | ||
− | + | 손숙오는 세번 재상(영윤)이 되어도 영화롭지 않고, 세번 그 자리에서 물러남에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장자]]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인데,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손숙오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손숙오는 재상이라는 권력과 자기 자신이 다른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의 권세가 곧 자신의 힘인양 믿고 어리석은 행위를 자행했던 그롯된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손숙오의 일화가 [[장자]]에 채택된 것은 '유유자적하며 사방을 바라보는 경지(方將躊躇,方將四顧)'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인용된 [[공자]]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숙오는 개인적이면서도 고고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신이 큰산을 거쳐도 방해받지 않고 못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천한 지위에 있어도 고달프지 않은 채 온 천지에 가득 차 있는(其神經乎大山而無介,入乎淵泉而不濡,處卑細而不憊,充滿天地)' 경지에서 도가의 귀감이 되는 것이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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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견오가 손숙오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세번 재상이 되셨으면서도 영화롭지 않고, 세번 물러남에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는데, 지금 선생님의 코둘레를 보니 아주 부드럽고 즐거운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께선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십니까?" 손숙오가 대답했다.내가 어찌 남보다 나은 데가 있겠습니까. 저는 저절로 찾아옴을 물리침이 불가하고 또 물러가는 걸 멈춤이 불가한 법이라 생각합니다. 즉 이해득실은 내가 마음대로 함이 아니라 여기니, 우려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또 존경받는 일이 저(재상일)에 있는지, 나에게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이 저(재상일)에 있다면, 나에게는 없고, 나에게 있다면, 재상일에는 없습니다. 나는 유유자적하며 사방을 바라보는 경지에 있으므로 어찌 부귀와 빈천 따위에 마음쓸 틈이 있겠습니까?"<br> | |
+ |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옛날 진인은 어떤 지자도 설득할 수가 없었고, 어떤 미인도 유혹할 수 없으며, 어떤 도둑도 겁줄 수 없었고 복희나 황제조차도 벗삼을 수가 없었다. 죽음과 삶은 역시 큰 일이지만 그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하물며 벼슬이나 봉록 따위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인물은 그 정신이 큰산을 거쳐도 방해받지 않고 못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천한 지위에 있어도 고달프지 않은 채 온 천지에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도 그 스스로에게는 차츰 더 많은 것이 갖추어지게 되고 만다"<ref>장자, 안동림 역, 『장자』,현암사, 1993</ref> | ||
− | + | 원문:肩吾問於孫叔敖曰:「子三為令尹而不榮華,三去之而無憂色。吾始也疑子,今視子之鼻間栩栩然,子之用心獨奈何?」孫叔敖曰:「吾何以過人哉!吾以其來不可卻也,其去不可止也,吾以為得失之非我也,而無憂色而已矣。我何以過人哉!且不知其在彼乎,其在我乎?其在彼邪,亡乎我;在我邪,亡乎彼。方將躊躇,方將四顧,何暇至乎人貴人賤哉!」 <br> 仲尼聞之曰:「古之真人,知者不得說,美人不得濫,盜人不得劫,伏戲、黃帝不得友。死生亦大矣,而無變乎己,況爵祿乎!若然者,其神經乎大山而無介,入乎淵泉而不濡,處卑細而不憊,充滿天地,既以與人,己愈有。」《外篇》《田子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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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자]] ==== | ==== [[열자]] ==== | ||
+ | [[열자]]에서는 두가지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일화는 『[[순자]]』의 ⟨요문⟩편의 일화와 비슷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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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구에 사는 노인이 손숙오에게 말하였다. <br> "사람에게는 세 가지 원망이 있는데 선생께선 그것을 아십니까?<br> 손숙오가 말하였다.<br> "무슨 말씀이신지요?"<br> 그가 대답했다. "직위가 녹으면 사람들이 그를 투기하고, 벼슬이 높으면 임금이 그를 미워하며, 녹을 두터이 받으면 원망이 그에게 미치게 됩니다.<br> 손숙오가 말하였다.<br> "저의 경우 직위가 높아질수록 뜻을 낮추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마음을 겸손히 하며, 녹이 두터워질수록 베푸는 것을 넓게 한다면, 이 세 가지 원망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ref>열자, 김학주 역,『열자』, 을유문화사, 2000</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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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狐丘丈人謂孫叔敖曰:「人有三怨,子知之乎?」孫叔敖曰:「何謂也?」對曰:「爵高者人妬之,官大者主惡之,祿厚者怨遠之。」孫叔敖曰:「吾爵益高,吾志益下;吾官益大,吾心益小;吾祿益厚,吾施益博。以是免於三怨,可乎?」 | ||
− | + | 두번째 일화는 손숙오의 유언으로, 매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을 후대에 당부한 것이다. 손숙오는 왕이 내리는 봉지도 매번 마다하였으며, 죽으면서까지 자손에게 변방의 땅을 받을 것을 당부한다. 좋은 땅을 받으면 그 땅은 남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언젠가는 빼앗길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피하는 변방의 땅을 받으면, 비록 그 땅이 좋지 않더라도 후손을이 대대로 살 수 있다. 이렇듯 욕심을 부리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도가의 또다른 덕목일 것이다. | |
− | 孫叔敖疾將死,戒其子曰:「王亟封我矣,吾不受也,為我死,王則封汝。汝必无受利地!楚、越之閒,有寢丘者,此地不利而名甚惡。楚人鬼而越人禨,可長有者唯此也。」孫叔敖死,王果以美地封其子。子辭而不受,請寢丘。與之,至今不失。《說符》 | + | |
+ | 손숙오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하여 그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임금이 나에게 여러 차례 봉지를 내리려 하였지만 그 때마다 나는 사양하였다. 이제 내가 죽고 나면 임금께서 대신 너에게 땅을 봉해주려 할 것이다. 그때 너는 절대로 좋은 땅을 받지 말거라.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침구라는 곳은 좋은 땅도 아니며 남들이 탐내는 지역도 아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기에 그곳을 꺼려하고, 월나라 사람들은 미신을 믿어 그곳을 싫어한다. 그러니 오히려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 지역뿐이다." 손숙오가 죽자, 왕은 과연 좋은 땅을 그의 아들에게 봉해 주혀 했다. 그의 아들은 사양하고 침구 지방을 요청하였다. 왕은 그 곳을 그에게 주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자손들이 그 땅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ref>열자, 김학주 역,『열자』, 을유문화사, 2000</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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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孫叔敖疾將死,戒其子曰:「王亟封我矣,吾不受也,為我死,王則封汝。汝必无受利地!楚、越之閒,有寢丘者,此地不利而名甚惡。楚人鬼而越人禨,可長有者唯此也。」孫叔敖死,王果以美地封其子。子辭而不受,請寢丘。與之,至今不失。《說符》 | ||
=== [[법가]] === | === [[법가]] === | ||
==== [[한비자]] ==== | ==== [[한비자]] ==== | ||
− | + | 법가에서는『[[한비자]]』에 두 가지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비자라는 책은 한비자와 그 일파들의 저서로, 손숙오의 첫번째 일화가 수록된 《유로(喻老)》는 노장([[도가]])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한비자 일파의 후대가 첨가한 부분이다. 따라서 법가적 사상보다는 노장 사상이 짙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열자]]』에 수록된 일화와 일치한다. | |
− | + | 초장왕은 황하의 형웅 사이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재상 손숙오에게 상을 주려고 했다. 손숙오가 한수 부근의 모래와 자갈이 있는 황무지를 청했다. 초나라 국법에는 신하에게 봉록을 내릴 때 2대가 지난 후에는 봉지를 거두게 되어 있었다. 오직 손숙오의 후손만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다. 국법으로 회수하지 못한 것은 그 땅이 척박했기 때문이다. 9대까지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도덕경]]의 제 54장에는 '잘 세우면 뽑히지 않고, 잘 끌어 않으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게 된다'고 말한 이류다. 이는 손숙오를 가리킨 말이다.<ref>한비자, 박건영 역, 『한비자』,청아, 2016</ref> | |
− | + | 원문: 楚莊王既勝狩於河雍,歸而賞孫叔敖,孫叔敖請漢間之地,沙石之處。楚邦之法,祿臣再世而收地,唯孫叔敖獨在。此不以其邦為收者,瘠也,故九世而祀不絕。故曰:「善建不拔,善抱不脫,子孫以其祭祀世世不輟」,孫叔敖之謂也。《喻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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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외제설좌하《外儲說左下》는 고대의 일화들을 법가적 사상을 가미하여 수록한 부분으로, 손숙오는 굉장히 검소한 인물로 나타나 있다. '암말이 끄는 대나무 수레', '거친 쌀로 만든 떡', '양가죽 옷' 등 손숙오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다. 뒤에 나오는 공자의 평가는 '검소함이 아랫사람을 위협할 정도'라는 해학적인 면모도 나타나는데, 이는 법가에서 중시하는 검소라는 윤리와 손숙오가 맞아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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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숙오가 초나라 재상이 됐다. 암말이 끄는 초라한 시렁 모양의 대나무 수레를 타고, 거친 쌀로 만든 떡과 야채국, 말라빠진 생선을 먹었다. 겨울에는 양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은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말했다. "손숙오는 비록 훌륭한 대부이기는 하나, 검소함은 아랫사람을 위협할 정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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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孫叔敖相楚,棧車牝馬,糲餅菜羹,枯魚之膳,冬羔裘,夏葛衣,面有飢色,則良大夫也,其儉偪下。《外儲說左下》 | ||
== 참고문헌 == | == 참고문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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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장자, 안동림 역, 『장자』,현암사, 1993<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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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자( | + | 한비자, 박건영 역, 『한비자』,청아, 2016<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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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열전』,을유문화사, 2002<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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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자, 김학주 역,『열자』, 을유문화사, 2000<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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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불위, 정영호 역, 『여씨춘추』, 자유문고, 2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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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적의 원문들 - 중국철학전자화계획(http://ctext.org/book-of-changes/zh) |
2019년 6월 26일 (수) 22:08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춘추 시대 초나라의 명재상. 성은 위(蔿)이며 이름이 오(敖)이다. 아버지는 위가(蔿賈)로, 위애렵(蔿艾獵)이라고도 불렸다. 손숙이라는 성씨는 아버지인 위가가 반란에 연루돼 횡사할 때,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만든 위장 성씨이다. B.C.530년에 태어나 B.C.593년에 사망했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인 초장왕을 보좌했다. 손숙오의 일화는 동시대, 후대의 수많은 서적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검소하고 백성들과 소통하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추앙되어 왔다.
손숙오(孫叔敖) | |
---|---|
출생 |
B.C 630(추정) |
사망 |
B.C 593(추정) |
생존시기 | 춘추시대 |
생애
재상으로 발탁되다
손숙오는 원래 초나라에서 은둔하는 재야의 선비였으나 당시 재상이었던 우구(虞丘)가 초장왕에게 그를 추천했다. 우구는 손숙오에게 재상의 일을 대신하게 했으며, 이후 손숙오는 석 달만에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된다.
다스리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랐다
손숙오는 재상으로써 "(그가)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랐다(未治而國人信之)"[1]고 평가될 정도로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실제로 관리와 백성의 사이가 화목하고, 풍속이 순박해질 정도였다. 가벼운 정치로 백성들은 금지 사항을 반드시 지켰고, 관리들은 그를 속이지 않았으며, 도적떼가 나타나지 않았다.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잘못된 화폐 제도를 바로잡다
초장왕이 화폐를 바꾸었다. 원래의 화폐는 너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동전은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불편했다. 백성들은 새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초나라의 시장은 혼란해졌다. 손숙오는 시장의 혼란이 화폐 때문임을 눈치채고, 초장왕에게 원래의 화폐로 돌아갈 것을 간언했다.(「前日更幣, 以為軽. 今市令來言曰『市亂, 民莫安其処, 次行之不定』. 臣請遂令複如故.」) 이후 시장의 혼란은 안정됐다.
낮은 수레를 높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민속에서부터 낮은 수레(庳車)를 이용해왔다. 그러나 초장왕이 낮은 수레가 말에게는 불편하다고 생각해, 수레를 높이려했다. 이에 재상인 손숙오가 말리며, “정령이 자주 하달되면 백성들은 어느 것을 따라야 할 바를 모르게 되므로 좋지 않습니다. 만약에 왕께서 반드시 수레의 높이를 올리고 싶으시다면, 신은 청컨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문지방을 올리게 하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의 신분은 모두 군자들입니다. 그들은 문지방을 지나면서 번거롭게 수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수레의 높이가 높아지게 됩니다.(「令數下, 民不知所従, 不可. 王必欲高車, 臣請教閭里使高其梱. 乗車者皆君子, 君子不能數下車.)"라고 간언했다. 초장왕은 이를 허락했고, 반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앉아서 타던 수레를 높이게 되었다.
후대의 평가
사마천은 손숙오에 대해이 "바로 손숙오가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감화되어 따른 것이다.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직접 보며 본받고, 멀리 사는 자들은 주변에 있는 것의 변화를 관망하며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손숙오는 세 차례나 재상 직위에 올랐어도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 재능으로 얻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 차례 파면되어도 후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기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此不教而民従其化, 近者視而效之, 遠者四面望而法之. 故三得相而不喜, 知其材自得之也;三去相而不悔, 知非己之罪也.)"라고 평가했다.
[2]
초장왕이 화폐를 크게 바꾸고, 낮은 수레를 올리고자 한 것은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큰 동전을 불편해할 것이고, 낮은 수레가 민속에서 왔기 때문에 반발감도 클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못했다. 이는 백성의 눈높이에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손숙오는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정사를 행하고 아무리 왕이라도 솔직하게 간언하고 보좌하는 것, 그것이 손숙오가 후대에도 존경을 받는 이유이지 않을까.
관련인물 및 일화
초장왕과의 인연
『여씨춘추』의 ⟨불구⟩에서 손숙오와 초장왕의 첫만남이 나타나있다. 어느날 초장왕이 조회를 끝내고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예로부터 어진선비를 스승으로 맞으면 훌륭한 군왕이 되고, 똑똑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면 처세에 걱정이 없다고 했다'며 신하들이 왕 본인보다 능력이 떨어짐을 걱정했다. 이때 손숙오라는 자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대규모의 관개수리공사를 시행한 덕분에 곡물 생산을 크게 늘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초장왕이 곧바로 손숙오를 불러들여, 그와 정치에 관해 몇마디 나누었더니, 초장왕은 바로 그를 재상에 등용했다.[3]
초장왕은 사냥하기를 즐기고, 환락적인 삶을 살았다. 이는 손숙오의 능력을 믿고 국가의 중대사를 전부 맡겼기 때문이다. 『여씨춘추』에서는 초장왕이 패왕이 되어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된 이유를 손숙오 덕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4]
머리 두개 달린 뱀(兩頭蛇)
손숙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는 '머리가 두개 달린 뱀' 일화일 것이다.『신서(新書)』에서 전하는 이 일화는 손숙오가 어렸을 때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본일을 서술하고 있다.
손숙오가 어렸을 때, 나가 놀고 돌아오니, 근심하며 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연유를 물으니, 울며 대답하길,
"오늘 저는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보았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렵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지금 뱀은 어디 있느냐?"
(손숙오가) 말하길 "제가 들었는데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을 본 자는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남들이 (이 뱀을) 또 볼까 두려워, 이미 그것을 (땅에) 묻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걱정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내가 듣건대, '음덕(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덕행)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이 복으로써 보답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일화를 듣고, 모두 그의 어짊을 알게 됐다. 영윤(재상)이 되었을 때,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孫叔敖之為嬰兒也,出遊而還,憂而不食。其母問其故,泣而對曰:「今日吾見兩頭蛇,恐去死無日矣。」其母曰:「今蛇安在?」曰:「吾聞見兩頭蛇者死,吾恐他人又見,吾已埋之也。」其母曰:「無憂,汝不死。吾聞之:『有陰德者,天報以福。』」人聞之,皆諭其能仁也。及為令尹,未治而國人信之。(신서(新書) ⟨春秋⟩ 中)
이 일화는 손숙오의 덕행과 어짊을 강조하고 있다. 남들을 위해 불행을 몰고다니는 머리 두개 달린 뱀을 묻은 것이 陰德이며, 하늘은 그에게 재상의 자리로 보답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서(新書)』보다 후대의 저서인 『열녀전』(《列女傳》)에서는 그 주인공을 손숙오의 어머니로 바꾸어 이 일화를 전하고 있다. 앞의 줄거리는 같으나, 손숙오의 어머니가 조언해 주는 부분이 첨가되어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죽지 않는다. 무릇 음덕을 행하는 자가 있으면, 양기가 그것을 보답한다. 덕은 불길한 것을 이기고, 어짊은 백가지 화를 제거한다. 하늘은 높이 있지만 낮은 곳(에서 나는 소리)을 들을 수 있다. 《서경》에서 이르지 않았느냐 '황천은 사사로움이 없으며, 오직 덕이 이를 돕는다'라고 말이다. 너는 말하지 말고 있거라, 너는 초나라에서 흥할 것이다."
손숙오가 장성함에 미치자, 영윤(재상)이 되었다.
군자가 이르길 "손숙오의 어머니는 도덕의 순서를 알았다." 《시경》에서 이르길 '어머니는 성스럽고 훌륭하도다'라는 말은 이를 이름이다.
楚令尹孫叔敖之母也。叔敖為嬰兒之時,出遊,見兩頭蛇,殺而埋之。歸見其母而泣焉,母問其故,對曰:「吾聞見兩頭蛇者死,今者出遊見之。」其母曰:「蛇今安在?」對曰:「吾恐他人復見之,殺而埋之矣。」其母曰:「汝不死矣。夫有陰德者,陽報之。德勝不祥,仁除百禍。天之處高而聽卑。書不云乎:『皇天無親,惟德是輔。』爾嘿矣,必興於楚。」及叔敖長,為令尹。君子謂叔敖之母知道德之次。《詩》云:「母氏聖善。」此之謂也。
음덕자에게 하늘이 보답한다는 말이 '어머니의 전언'에서 '직접 어머니가 말한 것'으로 바뀌었으며, 어머니는 《서경》을 설명할 정도로 현인이 되었다. 또한 어떤 군자의 말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손숙오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첨가되었다. 후대에서도 존경받는 재상인 손숙오를 길러내고, 그의 장래까지 꿰뚫어본 어머니의 대단함을 '하늘의 도를 알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손숙오의 머리 두개 달린 뱀 일화는 후대에 어린 아이용 교재(《몽구蒙求》)나 여성의 모범을 보여주는 책(《열녀전列女傳》)에도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사상가들의 평가
유가
유가에서는 '다스리지 않아도 나라의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르는(未治而國人信之)' 정치인을 높게 평가한다. 이는 어질고(仁), 의롭고(義), 예의법도를 지키고(禮), 지혜로운(知) 사람이며, 그 근거는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백성들과 관리들이 그를 어떻게 따르는가 등의 현실 속에서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맹자』, 『순자』에서 손숙오를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맹자
『맹자』의 ⟨고자 下⟩에서는 손숙오에 대해 순임금, 부열, 교격, 관중(관이오), 백리해의 훌륭한 정치인들과 나란히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하늘이 점지한 인물들로, 하늘은 그들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먼저 고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원문: 孟子曰:「舜發於畎畝之中,傅說舉於版築之閒,膠鬲舉於魚鹽之中,管夷吾舉於士,孫叔敖舉於海,百里奚舉於市。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必先苦其心志,勞其筋骨,餓其體膚,空乏其身,行拂亂其所為,所以動心忍性,曾益其所不能。人恒過,然後能改;困於心,衡於慮,而後作;徵於色,發於聲,而後喻。入則無法家拂士,出則無敵國外患者,國恒亡。然後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맹자』의 ⟨고자 下⟩ 中
순자
『순자』에서는 ⟨비상⟩편, ⟨거도⟩편, ⟨요문⟩편에서 손숙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상⟩편에서는 손숙오에 대해 '기사(期思)라는 고을의 촌사람으로, 튀어나온 대머리에다 왼 팔이 길었으나, 수레에 기대앉은 채로 초나라의 패업을 이룩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비상⟩편의 구절은 선대의 훌륭한 정치인들의 외모는 각기 달랐고, 손숙오처럼 기이한 형상을 띠는 자도 있었으니,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품고 있는 뜻이 중요한' 것이다.(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 위 구절을 통해 손숙오의 외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 蓋帝堯長,帝舜短;文王長,周公短;仲尼長,子弓短。昔者衛靈公有臣曰公孫呂,身長七尺,面長三尺,焉廣三寸,鼻目耳具,而名動天下。楚之孫叔敖,期思之鄙人也,突禿長左,軒較之下,而以楚霸。(중략) 故事不揣長,不揳大,不權輕重,亦將志乎爾。長短大小,美惡形相,豈論也哉!
⟨거도⟩편에서는 선대의 정치가들을 태신, 찬신, 공신, 성신으로 나누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태신과 찬신은 간신 무리를, 공신과 성신을 충신이자 나라를 평안하게 안 명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순자는 손숙오를 공신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공신은 '안으로는 족히 백성을 하나가 되게하고, 박으로는 족히 환난을 막게해주며, 백성들이 그와 친하고, 선비들이 그를 믿고,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스러우며,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고 게으르지 않은' 자이며, '공신을 등용하는 자는 (세상의) 강자가 되며' '반드시 영화로워지는' 것이다. 순자는 손숙오를 고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문: 人臣之論:有態臣者,有篡臣者,有功臣者,有聖臣者。(중략) 內足使以一民,外足使以距難,民親之,士信之,上忠乎君,下愛百姓而不倦,是功臣者也。(중략) 故用聖臣者王,用功臣者彊,用篡臣者危,用態臣者亡。態臣用則必死,篡臣用則必危,功臣用則必榮,聖臣用則必尊。(중략) 齊之管仲,晉之咎犯,楚之孫叔敖,可謂功臣矣。
⟨요문⟩편에서는 선대 정치인들의 일화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손숙도의 일화도 있다.
증나라의 국경을 관장하는 봉인이 초나라 재상 손숙오를 뵙고 말했다. "제가 듣건대, 벼슬에 오래 있는 사람은 (다른) 관리들이 그를 시기하고, 녹을 많이 받는 사람은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임금이 그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재상께서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벌을 받고 있지 않으니 어째서입니까?" 손숙오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세 번 초나라에서 재상노릇을 함에 마음은 더욱 낮추었고, 매번 녹이 늘어나면 더욱 베풀었으며, 지위가 높아지면 예로써 더욱 공경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벌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순자가 강조하는 정치인의 덕목은 높은 자리에 있어도 겸손하며, 받은 녹봉은 백성에게 베풀고, 임금을 공경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문: 語曰:繒丘之封人,見楚相孫叔敖曰:「吾聞之也:處官久者士妒之,祿厚者民怨之,位尊者君恨之。為相國有此三者,而不得罪於楚之士民何也?」孫叔敖曰:「吾三相楚而心瘉卑,每益祿而施瘉博,位滋尊而禮瘉恭,是以不得罪於楚之士民也。」
도가
도가에서는 장자와 열자에서 손숙오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재상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겸손하고 소박했던 손숙오를 칭찬하고 있다.
장자
손숙오는 세번 재상(영윤)이 되어도 영화롭지 않고, 세번 그 자리에서 물러남에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장자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인데,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손숙오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손숙오는 재상이라는 권력과 자기 자신이 다른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의 권세가 곧 자신의 힘인양 믿고 어리석은 행위를 자행했던 그롯된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손숙오의 일화가 장자에 채택된 것은 '유유자적하며 사방을 바라보는 경지(方將躊躇,方將四顧)'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인용된 공자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숙오는 개인적이면서도 고고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정신이 큰산을 거쳐도 방해받지 않고 못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천한 지위에 있어도 고달프지 않은 채 온 천지에 가득 차 있는(其神經乎大山而無介,入乎淵泉而不濡,處卑細而不憊,充滿天地)' 경지에서 도가의 귀감이 되는 것이 아닐까.
견오가 손숙오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세번 재상이 되셨으면서도 영화롭지 않고, 세번 물러남에도 우려하는 기색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는데, 지금 선생님의 코둘레를 보니 아주 부드럽고 즐거운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께선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십니까?" 손숙오가 대답했다.내가 어찌 남보다 나은 데가 있겠습니까. 저는 저절로 찾아옴을 물리침이 불가하고 또 물러가는 걸 멈춤이 불가한 법이라 생각합니다. 즉 이해득실은 내가 마음대로 함이 아니라 여기니, 우려하는 기색이 없을 뿐입니다. 또 존경받는 일이 저(재상일)에 있는지, 나에게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이 저(재상일)에 있다면, 나에게는 없고, 나에게 있다면, 재상일에는 없습니다. 나는 유유자적하며 사방을 바라보는 경지에 있으므로 어찌 부귀와 빈천 따위에 마음쓸 틈이 있겠습니까?"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옛날 진인은 어떤 지자도 설득할 수가 없었고, 어떤 미인도 유혹할 수 없으며, 어떤 도둑도 겁줄 수 없었고 복희나 황제조차도 벗삼을 수가 없었다. 죽음과 삶은 역시 큰 일이지만 그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하물며 벼슬이나 봉록 따위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인물은 그 정신이 큰산을 거쳐도 방해받지 않고 못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천한 지위에 있어도 고달프지 않은 채 온 천지에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도 그 스스로에게는 차츰 더 많은 것이 갖추어지게 되고 만다"[5]
원문:肩吾問於孫叔敖曰:「子三為令尹而不榮華,三去之而無憂色。吾始也疑子,今視子之鼻間栩栩然,子之用心獨奈何?」孫叔敖曰:「吾何以過人哉!吾以其來不可卻也,其去不可止也,吾以為得失之非我也,而無憂色而已矣。我何以過人哉!且不知其在彼乎,其在我乎?其在彼邪,亡乎我;在我邪,亡乎彼。方將躊躇,方將四顧,何暇至乎人貴人賤哉!」
仲尼聞之曰:「古之真人,知者不得說,美人不得濫,盜人不得劫,伏戲、黃帝不得友。死生亦大矣,而無變乎己,況爵祿乎!若然者,其神經乎大山而無介,入乎淵泉而不濡,處卑細而不憊,充滿天地,既以與人,己愈有。」《外篇》《田子方》
열자
열자에서는 두가지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일화는 『순자』의 ⟨요문⟩편의 일화와 비슷하다.
호구에 사는 노인이 손숙오에게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원망이 있는데 선생께선 그것을 아십니까?
손숙오가 말하였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가 대답했다. "직위가 녹으면 사람들이 그를 투기하고, 벼슬이 높으면 임금이 그를 미워하며, 녹을 두터이 받으면 원망이 그에게 미치게 됩니다.
손숙오가 말하였다.
"저의 경우 직위가 높아질수록 뜻을 낮추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마음을 겸손히 하며, 녹이 두터워질수록 베푸는 것을 넓게 한다면, 이 세 가지 원망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6]
원문: 狐丘丈人謂孫叔敖曰:「人有三怨,子知之乎?」孫叔敖曰:「何謂也?」對曰:「爵高者人妬之,官大者主惡之,祿厚者怨遠之。」孫叔敖曰:「吾爵益高,吾志益下;吾官益大,吾心益小;吾祿益厚,吾施益博。以是免於三怨,可乎?」
두번째 일화는 손숙오의 유언으로, 매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을 후대에 당부한 것이다. 손숙오는 왕이 내리는 봉지도 매번 마다하였으며, 죽으면서까지 자손에게 변방의 땅을 받을 것을 당부한다. 좋은 땅을 받으면 그 땅은 남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언젠가는 빼앗길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피하는 변방의 땅을 받으면, 비록 그 땅이 좋지 않더라도 후손을이 대대로 살 수 있다. 이렇듯 욕심을 부리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도가의 또다른 덕목일 것이다.
손숙오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하여 그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임금이 나에게 여러 차례 봉지를 내리려 하였지만 그 때마다 나는 사양하였다. 이제 내가 죽고 나면 임금께서 대신 너에게 땅을 봉해주려 할 것이다. 그때 너는 절대로 좋은 땅을 받지 말거라.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침구라는 곳은 좋은 땅도 아니며 남들이 탐내는 지역도 아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기에 그곳을 꺼려하고, 월나라 사람들은 미신을 믿어 그곳을 싫어한다. 그러니 오히려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그 지역뿐이다." 손숙오가 죽자, 왕은 과연 좋은 땅을 그의 아들에게 봉해 주혀 했다. 그의 아들은 사양하고 침구 지방을 요청하였다. 왕은 그 곳을 그에게 주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자손들이 그 땅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7]
원문:孫叔敖疾將死,戒其子曰:「王亟封我矣,吾不受也,為我死,王則封汝。汝必无受利地!楚、越之閒,有寢丘者,此地不利而名甚惡。楚人鬼而越人禨,可長有者唯此也。」孫叔敖死,王果以美地封其子。子辭而不受,請寢丘。與之,至今不失。《說符》
법가
한비자
법가에서는『한비자』에 두 가지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비자라는 책은 한비자와 그 일파들의 저서로, 손숙오의 첫번째 일화가 수록된 《유로(喻老)》는 노장(도가)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한비자 일파의 후대가 첨가한 부분이다. 따라서 법가적 사상보다는 노장 사상이 짙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열자』에 수록된 일화와 일치한다.
초장왕은 황하의 형웅 사이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재상 손숙오에게 상을 주려고 했다. 손숙오가 한수 부근의 모래와 자갈이 있는 황무지를 청했다. 초나라 국법에는 신하에게 봉록을 내릴 때 2대가 지난 후에는 봉지를 거두게 되어 있었다. 오직 손숙오의 후손만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다. 국법으로 회수하지 못한 것은 그 땅이 척박했기 때문이다. 9대까지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도덕경의 제 54장에는 '잘 세우면 뽑히지 않고, 잘 끌어 않으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자손이 대대로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내게 된다'고 말한 이류다. 이는 손숙오를 가리킨 말이다.[8]
원문: 楚莊王既勝狩於河雍,歸而賞孫叔敖,孫叔敖請漢間之地,沙石之處。楚邦之法,祿臣再世而收地,唯孫叔敖獨在。此不以其邦為收者,瘠也,故九世而祀不絕。故曰:「善建不拔,善抱不脫,子孫以其祭祀世世不輟」,孫叔敖之謂也。《喻老》
외제설좌하《外儲說左下》는 고대의 일화들을 법가적 사상을 가미하여 수록한 부분으로, 손숙오는 굉장히 검소한 인물로 나타나 있다. '암말이 끄는 대나무 수레', '거친 쌀로 만든 떡', '양가죽 옷' 등 손숙오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다. 뒤에 나오는 공자의 평가는 '검소함이 아랫사람을 위협할 정도'라는 해학적인 면모도 나타나는데, 이는 법가에서 중시하는 검소라는 윤리와 손숙오가 맞아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숙오가 초나라 재상이 됐다. 암말이 끄는 초라한 시렁 모양의 대나무 수레를 타고, 거친 쌀로 만든 떡과 야채국, 말라빠진 생선을 먹었다. 겨울에는 양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갈의를 입고, 얼굴은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말했다. "손숙오는 비록 훌륭한 대부이기는 하나, 검소함은 아랫사람을 위협할 정도였다."
원문: 孫叔敖相楚,棧車牝馬,糲餅菜羹,枯魚之膳,冬羔裘,夏葛衣,面有飢色,則良大夫也,其儉偪下。《外儲說左下》
참고문헌
장자, 안동림 역, 『장자』,현암사, 1993
한비자, 박건영 역, 『한비자』,청아, 2016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열전』,을유문화사, 2002
열자, 김학주 역,『열자』, 을유문화사, 2000
여불위, 정영호 역, 『여씨춘추』, 자유문고, 2006
서적의 원문들 - 중국철학전자화계획(http://ctext.org/book-of-changes/z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