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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성. 고대 북방 소수민족을 의미한다. 원래는 적적(赤狄)이라는 큰 개를 말했으며, 또 빠른 속도로 오고 감을 말하기도 했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2014</ref> 금문, 소전은 자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구조는 같다. 모두 편방(偏旁)에 [[犬]] 모양이 하나 있다. 犬은 당시 견융족(犬戎族)을 가리킨다. 犬은 개이고 [[戎]]는 무기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합치면 무기를 들고 개를 데리고 있는 유목·사냥민족을 의미한다. 금문과 소전의 왼쪽은 [[火]]로,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불을 둘러싸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火와 犬이 같이 있는 것이 불로 고기를 굽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며, 이것은 공통적으로 사냥꾼의 생활습관에 속하는 것이다.<ref> | + | 형성. 고대 북방 소수민족을 의미한다. 원래는 적적(赤狄)이라는 큰 개를 말했으며, 또 빠른 속도로 오고 감을 말하기도 했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3, 2014, p.554.</ref> 금문, 소전은 자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구조는 같다. 모두 편방(偏旁)에 [[犬]] 모양이 하나 있다. 犬은 당시 견융족(犬戎族)을 가리킨다. 犬은 개이고 [[戎]]는 무기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합치면 무기를 들고 개를 데리고 있는 유목·사냥민족을 의미한다. 금문과 소전의 왼쪽은 [[火]]로,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불을 둘러싸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火와 犬이 같이 있는 것이 불로 고기를 굽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며, 이것은 공통적으로 사냥꾼의 생활습관에 속하는 것이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2006, p.47.</ref> |
또 다른 자료에서는 狄을 '화'공(불을 이용한 공격) 및 사냥개(田犬)를 통해 사냥하는 것에 뛰어난 민족이라고 풀이한다. | 또 다른 자료에서는 狄을 '화'공(불을 이용한 공격) 및 사냥개(田犬)를 통해 사냥하는 것에 뛰어난 민족이라고 풀이한다. | ||
==文化== | ==文化== | ||
− | 狄은 고대에 사냥을 생계를 유지하던 북방민족이며 상과 주 시대에는 귀방, 융적, 견적이라 불렸다. 한나라 시대에는 흉노라 불리기도 하였다. <br>[[한서]]/[[흉노전]]에서는 이 북방민족을 표현하기를 "贪而好利,被发左衽,……辟居北垂寒露之野,逐草随畜,射猎为生。”(탐욕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산발을 하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며......북쪽 변방에 추운바람이 부는 평야에 살며 풀 자라나는 곳을 따라가며 짐승을 거느리고 활을 이용한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라고 하였다.<br><br>고대에는 사냥개를 전견(田犬)이라고 불렀다. 전견을 이용한 사냥 방법에는 화전이 있다. 화전(火田)은 화공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도망갈 수 있는 입구를 하나 남겨두고 불로 사냥감의 서식지를 전면을 둘러싸고 입구에 매복해서 사냥개로 사냥감을 포획하는 것이다. 한자 중에서 狄오랑캐 적과 狩사냥할 수는 이런 사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br> 화전에 관한 문화는 다양한 서적에 그 기록이 남겨져 있다. <br><<[[예기]]>>에서는 “昆虫未挚,不以火田”(곤충이 잠들지 않으면, 화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고, <br><<[[노자]]>>에서는 “不凅泽而渔,不焚林而猎"(강을 말리지 않고 물고기를 잡고, 숲을 태우지 않고 사냥을 해라)라고 하였으며, <br><<[[이아]]>>에서는 "火田为狩"(화전이란 사냥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 | 狄은 고대에 사냥을 생계를 유지하던 북방민족이며 상과 주 시대에는 귀방, 융적, 견적이라 불렸다. 한나라 시대에는 흉노라 불리기도 하였다. <br>[[한서]]/[[흉노전]]에서는 이 북방민족을 표현하기를 "贪而好利,被发左衽,……辟居北垂寒露之野,逐草随畜,射猎为生。”(탐욕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산발을 하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며......북쪽 변방에 추운바람이 부는 평야에 살며 풀 자라나는 곳을 따라가며 짐승을 거느리고 활을 이용한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라고 하였다.<br><br>초기 중국의 이방인 개념에는 거주 지역에 따라 남쪽의 만(蠻), 동쪽의 이(夷), 서쪽의 융(戎), 북쪽의 적(狄)으로 인식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 바로 만과 이는 항상 연합하거나 동화할 수 있는 이방인의 범주에 넣는 반면, 융과 적은 국외자 또는 동화될 수 없는 적대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었다. 관련된 사례로 적(狄)과 형(邢)나라의 관계를 기술한 기록이 있다. 기원전 661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유명한 재상인 관중(管仲)은 제나라가 형나라를 방어하는 데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형나라는 융과 적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관중은 "적과 융은 늑대와 같아 결코 만족할 줄 모릅니다. 화하의 모든 나라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니 어느 한 나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게으름을 피우며 휴식함은 곧 품어서는 안 되는 독약과 같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구는 주로 주나라 제후국들이 ’우리‘와 ’그들‘을 명백하게 구분하여 자각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ref>니콜라 디코스모, 이재정 역, 『오랑캐의 탄생: 중국이 만들어 낸 변방의 역사』, 황금가지, 2005, pp.132-134.</ref> <br><br>고대에는 사냥개를 전견(田犬)이라고 불렀다. 전견을 이용한 사냥 방법에는 화전이 있다. 화전(火田)은 화공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도망갈 수 있는 입구를 하나 남겨두고 불로 사냥감의 서식지를 전면을 둘러싸고 입구에 매복해서 사냥개로 사냥감을 포획하는 것이다. 한자 중에서 狄오랑캐 적과 狩사냥할 수는 이런 사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br> 화전에 관한 문화는 다양한 서적에 그 기록이 남겨져 있다. <br><<[[예기]]>>에서는 “昆虫未挚,不以火田”(곤충이 잠들지 않으면, 화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고, <br><<[[노자]]>>에서는 “不凅泽而渔,不焚林而猎"(강을 말리지 않고 물고기를 잡고, 숲을 태우지 않고 사냥을 해라)라고 하였으며, <br><<[[이아]]>>에서는 "火田为狩"(화전이란 사냥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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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1일 (월) 18:40 기준 최신판
語源
형성. 고대 북방 소수민족을 의미한다. 원래는 적적(赤狄)이라는 큰 개를 말했으며, 또 빠른 속도로 오고 감을 말하기도 했다.[1] 금문, 소전은 자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구조는 같다. 모두 편방(偏旁)에 犬 모양이 하나 있다. 犬은 당시 견융족(犬戎族)을 가리킨다. 犬은 개이고 戎는 무기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합치면 무기를 들고 개를 데리고 있는 유목·사냥민족을 의미한다. 금문과 소전의 왼쪽은 火로,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불을 둘러싸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火와 犬이 같이 있는 것이 불로 고기를 굽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며, 이것은 공통적으로 사냥꾼의 생활습관에 속하는 것이다.[2]
또 다른 자료에서는 狄을 '화'공(불을 이용한 공격) 및 사냥개(田犬)를 통해 사냥하는 것에 뛰어난 민족이라고 풀이한다.
文化
狄은 고대에 사냥을 생계를 유지하던 북방민족이며 상과 주 시대에는 귀방, 융적, 견적이라 불렸다. 한나라 시대에는 흉노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서/흉노전에서는 이 북방민족을 표현하기를 "贪而好利,被发左衽,……辟居北垂寒露之野,逐草随畜,射猎为生。”(탐욕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산발을 하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며......북쪽 변방에 추운바람이 부는 평야에 살며 풀 자라나는 곳을 따라가며 짐승을 거느리고 활을 이용한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라고 하였다.
초기 중국의 이방인 개념에는 거주 지역에 따라 남쪽의 만(蠻), 동쪽의 이(夷), 서쪽의 융(戎), 북쪽의 적(狄)으로 인식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 바로 만과 이는 항상 연합하거나 동화할 수 있는 이방인의 범주에 넣는 반면, 융과 적은 국외자 또는 동화될 수 없는 적대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었다. 관련된 사례로 적(狄)과 형(邢)나라의 관계를 기술한 기록이 있다. 기원전 661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유명한 재상인 관중(管仲)은 제나라가 형나라를 방어하는 데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형나라는 융과 적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관중은 "적과 융은 늑대와 같아 결코 만족할 줄 모릅니다. 화하의 모든 나라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니 어느 한 나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게으름을 피우며 휴식함은 곧 품어서는 안 되는 독약과 같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구는 주로 주나라 제후국들이 ’우리‘와 ’그들‘을 명백하게 구분하여 자각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3]
고대에는 사냥개를 전견(田犬)이라고 불렀다. 전견을 이용한 사냥 방법에는 화전이 있다. 화전(火田)은 화공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도망갈 수 있는 입구를 하나 남겨두고 불로 사냥감의 서식지를 전면을 둘러싸고 입구에 매복해서 사냥개로 사냥감을 포획하는 것이다. 한자 중에서 狄오랑캐 적과 狩사냥할 수는 이런 사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화전에 관한 문화는 다양한 서적에 그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예기>>에서는 “昆虫未挚,不以火田”(곤충이 잠들지 않으면, 화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고,
<<노자>>에서는 “不凅泽而渔,不焚林而猎"(강을 말리지 않고 물고기를 잡고, 숲을 태우지 않고 사냥을 해라)라고 하였으며,
<<이아>>에서는 "火田为狩"(화전이란 사냥을 말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