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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론의 개념==
 
==화이론의 개념==
'''華夷論'''. 전통적인 중원의 중국인들과 사이로 대표되는 각 소수민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유가적 견해를 말한다.<ref>출처: 바이두 지식백과. 다음 링크 참조 https://baike.baidu.com/item/%E5%8D%8E%E5%A4%B7%E8%AE%BA/62345986?fr=aladdin</ref>본 문서에서는 송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론과 [[송]]대 이후 이것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조선의 대외정책에 골자가 된 사상인 '화이론'과는 한자는 같지만 다른 내용이니 혼돈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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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夷論'''이란 전통적인 중원의 중국인들과 사이로 대표되는 각 소수민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유가적 견해를 말한다.<ref>출처: 바이두 지식백과</ref>본 문서에서는 송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론과 [[송]]대 이후 이것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조선의 대외정책에 골자가 된 사상인 '화이론'과는 한자는 같지만 다른 내용이니 혼돈이 없길 바란다.
  
==민족의 경계와 국가, 그리고 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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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경계와 국가==
  
모든 국가는 국가의 기원과 정통에 대한 서사가 있다. 국가라는 집단은 경계를 가진다. 국가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울타리로 작용한다. 한편, 이러한 집단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물질적인 것으로 나눈다고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국가들은 물질적인 국경과 더불어 사상적인 잣대로 이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의 경우 오늘날과는 달리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인 경계가 더욱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중국부터 [[명]], [[청]] 교체기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 바로 화이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특유의 광활한 공간과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옛 중국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인 중심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주변은 너무 넓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지리적인 '경계'는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관념적인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이]](四夷)'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화'와 '사이'의 차이였나? 바로 이들이 따르는 문화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민족적 국경 선은, 특정한 지리적 경계이기 보다는 어떤 문화를 따르는가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화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송]]대이지만, 이는 송대, 그 중에서도 북송 시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지, 그 이전에는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ref>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3-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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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가는 국가의 기원과 정통에 대한 서사가 있다. 국가라는 집단은 경계를 가진다. 국가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울타리로 작용한다. 한편, 이러한 집단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물질적인 것으로 나눈다고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국가들은 물질적인 국경과 더불어 사상적인 잣대로 이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의 경우 오늘날과는 달리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인 경계가 더욱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중국부터 [[명]], [[청]] 교체기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 바로 화이론이라 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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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특유의 광활한 공간과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옛 중국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인 중심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주변은 너무 넓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지리적인 '경계'는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관념적인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이(四夷)'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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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이 '중화'와 '사이'의 차이였나? 바로 이들이 따르는 문화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민족적 국경선은, 특정한 지리적 경계이기 보다는 어떤 문화를 따르는가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화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송]](宋)대이지만, 이는 북송 시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지, 그 이전에는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ref>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3-4.</ref>
  
==송대 이전 중국의 사상 - 정통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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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론==
  
전근대시기에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우선 서주에서 확립된 천명(天命)과 덕을 둘러싼 관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ref>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6.</ref> [[상]]나라에서 천명의 개념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나라 사회의 신권적 특징과 연결 지어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지도자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비이성적인 해석과 제사였다. 한편, [[상]]-[[주]] 교체기에 이르러,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이와 대비되는 새로운 개념의 천(天)을 제시하였다. 바로 천명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덕이 있는 자(有德者)에게 수탁된다는 것이다. 이는 천명을 그 활동 범위는 합리적인 측면에 제한시키고, 신비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합리적 행위를 보장하는 최후의 근거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유가]] 역시 이러한 사상에 동의하였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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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시기에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우선 [[서주]]에서 확립된 천명(天命)과 덕을 둘러싼 관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ref>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6.</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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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에서 천명의 개념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나라 사회의 신권적 특징과 연결 지어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지도자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비이성적인 해석과 제사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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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주 교체기에 이르러,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이와 대비되는 새로운 개념의 천([[]])을 제시하였다. 바로 천명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덕이 있는 자(有德者)에게 수탁된다는 것이다. 이는 천명을 그 활동 범위는 합리적인 측면에 제한시키고, 신비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합리적 행위를 보장하는 최후의 근거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유가]] 역시 이러한 사상에 동의하였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이 되고 온갖 사물이 자라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ref>논어, 양화편 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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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이 되고 온갖 사물이 자라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ref>논어, 양화편 中</ref>
 
 
==송대 이후 중국의 사상 - 구양수와 석개 - ==
 
 
 
{{인물정보
 
 
 
|이름=구양수
 
|사진=구양수.jpg|200픽셀
 
|연도=1007~1072
 
|인물정보=중국 송나라 시기 정치가 겸 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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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의 화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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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구양수.jpg|150픽셀|오른쪽|섬네일|구양수]]
 
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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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ref>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ref>와 서하(西夏)<ref>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ref>, 동북에는 금(金)<ref>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ref>,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ref>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ref>와 교지(交趾)<ref>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ref>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ref>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3~56.</ref>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ref>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ref>와 서하(西夏)<ref>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ref>, 동북에는 금(金)<ref>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ref>,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ref>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ref>와 교지(交趾)<ref>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ref>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ref>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3~56.</ref>
  
 
==사이'四夷' 와 아'亞'==
 
==사이'四夷' 와 아'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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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위 ‘중화-오랑캐(華夷)’ 관념은 적어도 [[전국]]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상상 속에서 ‘천하’를 구축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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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들을 두었고, 땅은 바둑판, 혹은 [[회]](回)자의 모양을 닮아 중심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네 변이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고 보았다. 중심은 자신들이 살고 있으며 왕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이며, 이 중심의 바깥 경계선은 화하(華夏) 또는 제하(諸夏)이고, 제하의 바깥은 오랑캐라고 여겼다. 고대 중국인들은 밖으로 가면 갈수록, 문명은 낙후되었으며 땅은 황폐하여 먹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ref>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7.</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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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중국인들은 이러한 중심점을 굳게 믿었는데, 그 원인은 [[불교]]와 같은 거대한 흐름을 제외하고는 송나라 시기 이전까지 중원이 격렬한 문명의 도전을 받아본 일이 없다는 것에 있다. 수백 수천년간 자신들만의 세계에 둘러 쌓여 있던 중국인들은 [[한족]]의 문명이 세계 문명의 최고봉이라는 자만에 가득 찼다. 이러한 자만은 그들의 외부 확장 의지를 사라지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주변의 ‘오랑캐’들은 전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열등한 자들로 특별히 경계를 지어 담을 쌓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옛 중국인에게 중원과 중국은, 문명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지, 지리적,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주위 국가들이 중국의 문명을 배우고, 이러한 관계를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며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br>
  
중국의 소위 ‘중화-오랑캐(華夷)’ 관념은 적어도 [[전국]]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상상 속에서 ‘천하’를 구축하였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들을 두었고, 땅은 바둑판, 혹은 [[회]](回)자의 모양을 닮아 중심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네 변이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고 보았다. 중심은 자신들이 살고 있으며 왕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이며, 이 중심의 바깥 경계선은 화하(華夏) 또는 제하(諸夏)이고, 제하의 바깥은 오랑캐라고 여겼다. 고대 중국인들은 밖으로 가면 갈수록, 문명은 낙후되었으며 땅은 황폐하여 먹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ref>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7.</ref> 옛 중국인들은 이러한 중심점을 굳게 믿었는데, 그 원인은 [[불교]]와 같은 거대한 흐름을 제외하고는 송나라 시기 이전까지 중원이 격렬한 문명의 도전을 받아본 일이 없다는 것에 있다. 수백 수천년간 자신들만의 세계에 둘러 쌓여 있던 중국인들은 [[한족]]의 문명이 세계 문명의 최고봉이라는 자만에 가득 찼다. 이러한 자만은 그들의 외부 확장 의지를 사라지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주변의 ‘오랑캐’들은 전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열등한 자들로 특별히 경계를 지어 담을 쌓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옛 중국인에게 중원과 중국은, 문명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지, 지리적,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주위 국가들이 중국의 문명을 배우고, 이러한 관계를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며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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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세상의 구조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이를 잘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亞]]’자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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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자는 가운데 사각형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사각형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중원을 중심으로 4개의 사각형이 붙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사방(四方)이다. 이를 본 딴 가장자리의 주황색 선의 모양이 바로 아[[亞)]인 것이다. 붙어있는 네 가지 사각형은 위쪽은 들짐승, 개의 글자가 들어가 있는 북적(北狄), 오른쪽은 활, 화살이 들어가 있는 동이(東[[夷]]), 아래쪽은 주술 도구가 들어가 있는 [[남만]](南蠻), 왼쪽은 창이 들어가 있는 서융(西戎)을 나타낸다.
이러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세상의 구조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이를 잘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亞]]’자이다. 이 글자는 가운데 사각형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사각형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중원을 중심으로 4개의 사각형이 붙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사방(四方)이다. 이를 본 딴 가장자리의 주황색 선의 모양이 바로 아[[亞)]인 것이다. 붙어있는 네 가지 사각형은 위쪽은 들짐승, 개의 글자가 들어가 있는 북적(北狄), 오른쪽은 활, 화살이 들어가 있는 동이(東[[夷]]), 아래쪽은 주술 도구가 들어가 있는 [[남만]](南蠻), 왼쪽은 창이 들어가 있는 서융(西戎)을 나타낸다.
 
  
[[파일:아.png|500픽셀|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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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png|300픽셀|가운데]]
  
 
==영향 및 의의==
 
==영향 및 의의==
중국 역사에 있어서 오랑캐, 이민족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만큼 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및 의의도 크다. 우선 화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북송대 시기, 강력해진 주변 오랑캐들로 인해 민족과 국가에 명확한 경계가 그어졌고 천하는 중국으로 축소되었으며 오랑캐는 대등한 상대로 바뀌었다. 이러한 점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의 ‘[[남북조]]’라는 호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경의 확정, 조공품의 수량, 무역의 등가 교환, 사절의 예식 등으로부터 중국인들에게 ‘타자’가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사상사와 문화사 두 분야에도 변화를 미쳤다. 바로 지식의 독점적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문화적 우월감을 등에 업고 다분히 이질적인 지식이나 문화에도 수용적이었다. 또한 다른 국가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것에 있어서도 제한을 크게 두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를 통해 오랑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 이러한 문화의 기증은 제한되었다. 송나라 진종(眞宗)때(1006년)부터 조정의 명령으로, 변경 지역 거주민은 아홉 가지 경전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서적을 지닌 채 무역소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규정했으며, 인종(仁宗) 천성(天聲)5년(1027년)에는 신료들이 지은 문집이 웅주의 무역소를 통해 북방의 요나라로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거듭 금지령을 내렸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명령했다.<ref>이와 관련된 자세한 예시들이 더욱 많다. 예시가 필요한 사람은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64~6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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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있어서 오랑캐, 이민족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만큼 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및 의의도 크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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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화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북송대 시기, 강력해진 주변 오랑캐들로 인해 민족과 국가에 명확한 경계가 그어졌고 천하는 중국으로 축소되었으며 오랑캐는 대등한 상대로 바뀌었다. 이러한 점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의 ‘[[남북조]]’라는 호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경의 확정, 조공품의 수량, 무역의 등가 교환, 사절의 예식 등으로부터 중국인들에게 ‘타자’가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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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러한 변화는 사상사와 문화사 두 분야에도 변화를 미쳤다. 바로 지식의 독점적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문화적 우월감을 등에 업고 다분히 이질적인 지식이나 문화에도 수용적이었다. 또한 다른 국가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것에 있어서도 제한을 크게 두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를 통해 오랑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 이러한 문화의 기증은 제한되었다. 송나라 진종(眞宗)때(1006년)부터 조정의 명령으로, 변경 지역 거주민은 아홉 가지 경전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서적을 지닌 채 무역소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규정했으며, 인종(仁宗) 천성(天聲)5년(1027년)에는 신료들이 지은 문집이 웅주의 무역소를 통해 북방의 요나라로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거듭 금지령을 내렸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명령했다.<ref>이와 관련된 자세한 예시들이 더욱 많다. 예시가 필요한 사람은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64~65.</ref>
  
 
천쉐린은 이러한 변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쉐린은 이러한 변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대 이래 집정자들은 걸핏하면 국방의 기밀이나 정치적 안위를 이유로 저작자의 권리를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했으며, 형법으로 민간의 일을 처리했다…. 이런 추세는 송대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 그 시대에는 서적 수출에 대해 그토록 경계심을 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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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이래 집정자들은 걸핏하면 국방의 기밀이나 정치적 안위를 이유로 저작자의 권리를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했으며, 형법으로 민간의 일을 처리했다…. 이런 추세는 송대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 그 시대에는 서적 수출에 대해 그토록 경계심을 품었을까?"
  
이러한 발언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오랑캐들의 존재감이 중국에 결속력, 문화에 대한 수용력, 관대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잇다.<ref>쉽게 생각해보자. 내가 시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을 때는 주변 친구들에게 공부 자료를 마음껏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점수가 그리 높지 않을 때는, 선뜻 자료를 공유하기 어렵다.</ref> 또한, 화이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족과 국가의 국경 의식은 두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하나는 ‘국경’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ref>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을 참고하라</ref>또 다른 하나는 외래의 종교, 습속, 기타 문명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으며 이를 탄압했다는 것이다.<ref>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72 참고</ref> 이러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주의는 훗날 중국이 서양 열강에 힘 없이 무너지게 되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지었을 때, 안타까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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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발언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오랑캐들의 존재감이 중국에 결속력, 문화에 대한 수용력, 관대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잇다.<ref>쉽게 생각해보자. 내가 시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을 때는 주변 친구들에게 공부 자료를 마음껏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점수가 그리 높지 않을 때는, 선뜻 자료를 공유하기 어렵다.</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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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화이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족과 국가의 국경 의식은 두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하나는 ‘국경’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ref>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을 참고하라</ref>또 다른 하나는 외래의 종교, 습속, 기타 문명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으며 이를 탄압했다는 것이다.<ref>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72 참고</ref> 이러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주의는 훗날 중국이 서양 열강에 힘 없이 무너지게 되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지었을 때, 안타까운 점으로 남는다.

2022년 12월 26일 (월) 15:54 기준 최신판

화이론의 개념

華夷論이란 전통적인 중원의 중국인들과 사이로 대표되는 각 소수민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유가적 견해를 말한다.[1]본 문서에서는 송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론과 대 이후 이것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조선의 대외정책에 골자가 된 사상인 '화이론'과는 한자는 같지만 다른 내용이니 혼돈이 없길 바란다.

민족의 경계와 국가

모든 국가는 국가의 기원과 정통에 대한 서사가 있다. 국가라는 집단은 경계를 가진다. 국가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울타리로 작용한다. 한편, 이러한 집단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물질적인 것으로 나눈다고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국가들은 물질적인 국경과 더불어 사상적인 잣대로 이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고대의 경우 오늘날과는 달리 명확한 국경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적인 경계가 더욱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중국부터 , 교체기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 바로 화이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특유의 광활한 공간과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옛 중국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인 중심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주변은 너무 넓어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지리적인 '경계'는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관념적인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이(四夷)'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화'와 '사이'의 차이였나? 바로 이들이 따르는 문화의 차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민족적 국경선은, 특정한 지리적 경계이기 보다는 어떤 문화를 따르는가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화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宋)대이지만, 이는 북송 시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지, 그 이전에는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2]

정통론

전근대시기에 건국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우선 서주에서 확립된 천명(天命)과 덕을 둘러싼 관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3]
나라에서 천명의 개념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라 사회의 신권적 특징과 연결 지어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지도자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비이성적인 해석과 제사였다.
한편, 상주 교체기에 이르러,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이와 대비되는 새로운 개념의 천()을 제시하였다. 바로 천명은 특정 통치 집단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 보다는, 덕이 있는 자(有德者)에게 수탁된다는 것이다. 이는 천명을 그 활동 범위는 합리적인 측면에 제한시키고, 신비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합리적 행위를 보장하는 최후의 근거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유가 역시 이러한 사상에 동의하였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하늘이 어찌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이 되고 온갖 사물이 자라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4]

송대의 화이론

구양수

중국의 민족성과 화이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두 사상가는 석개와 구양수이다. 석개(石介)는 저작으로 중국론(中國論)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현재 볼 수 있는 옛 중국의 문헌 가운데 “중국”만을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문장이다. 다른 한 편의 글이 바로 구양수(歐陽脩)의 정통론(正統論)인데, 그의 글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푸러청은 저서인 <당대 이민족 관념의 변화>에서 송대의 화이 관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음을 지적했다. 천팡밍의 경우, 송대의 전통론을 논하면서, 송나라 이전에는 “정통에 대한 현실적 논쟁만 있었을 뿐, 정통 이론의 출현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천쉐린은 <구양수의 전통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양수가 <정통론>을 저술했던 네 가지 배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중 첫 번째는 “송나라와 이전 왕조 사이의 정통성 계승 문제”이고, 두번째는 “춘추학 부흥의 영향”이며, 세 번째는 “선대 역사를 편찬하면서 마주친 문제”이고, 네 번째는 “북송 외교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정통성의 문제는 한 국가의 존재의 문제이며 어떠한 정치적 합법성을 갖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없었거나, 혹은 ‘상대방’이 자기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논의되지 않았을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당시 중국은 서북에는 서요(西辽)[5]와 서하(西夏)[6], 동북에는 금(金)[7], 남쪽에는 대리국(大理國)[8]와 교지(交趾)[9]등 다양한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과 현실에서의 위협은 옛 중국에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민족, 국가, 그리고 천하의 조공체제와 화이(華夷)관념에 심각한 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의 변화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의식을 통해 생성된 자아중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구양수의 정통론과 석개의 중국론은 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10]

사이'四夷' 와 아'亞'

중국의 소위 ‘중화-오랑캐(華夷)’ 관념은 적어도 전국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상상 속에서 ‘천하’를 구축하였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들을 두었고, 땅은 바둑판, 혹은 (回)자의 모양을 닮아 중심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네 변이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고 보았다. 중심은 자신들이 살고 있으며 왕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이며, 이 중심의 바깥 경계선은 화하(華夏) 또는 제하(諸夏)이고, 제하의 바깥은 오랑캐라고 여겼다. 고대 중국인들은 밖으로 가면 갈수록, 문명은 낙후되었으며 땅은 황폐하여 먹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11]
옛 중국인들은 이러한 중심점을 굳게 믿었는데, 그 원인은 불교와 같은 거대한 흐름을 제외하고는 송나라 시기 이전까지 중원이 격렬한 문명의 도전을 받아본 일이 없다는 것에 있다. 수백 수천년간 자신들만의 세계에 둘러 쌓여 있던 중국인들은 한족의 문명이 세계 문명의 최고봉이라는 자만에 가득 찼다. 이러한 자만은 그들의 외부 확장 의지를 사라지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주변의 ‘오랑캐’들은 전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열등한 자들로 특별히 경계를 지어 담을 쌓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옛 중국인에게 중원과 중국은, 문명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지, 지리적,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주위 국가들이 중국의 문명을 배우고, 이러한 관계를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며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세상의 구조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이를 잘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자이다.
이 글자는 가운데 사각형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사각형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중원을 중심으로 4개의 사각형이 붙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사방(四方)이다. 이를 본 딴 가장자리의 주황색 선의 모양이 바로 아[[亞)]인 것이다. 붙어있는 네 가지 사각형은 위쪽은 들짐승, 개의 글자가 들어가 있는 북적(北狄), 오른쪽은 활, 화살이 들어가 있는 동이(東), 아래쪽은 주술 도구가 들어가 있는 남만(南蠻), 왼쪽은 창이 들어가 있는 서융(西戎)을 나타낸다.

아.png

영향 및 의의

중국 역사에 있어서 오랑캐, 이민족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만큼 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및 의의도 크다.
우선 화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북송대 시기, 강력해진 주변 오랑캐들로 인해 민족과 국가에 명확한 경계가 그어졌고 천하는 중국으로 축소되었으며 오랑캐는 대등한 상대로 바뀌었다. 이러한 점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남북조’라는 호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경의 확정, 조공품의 수량, 무역의 등가 교환, 사절의 예식 등으로부터 중국인들에게 ‘타자’가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사상사와 문화사 두 분야에도 변화를 미쳤다. 바로 지식의 독점적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는 문화적 우월감을 등에 업고 다분히 이질적인 지식이나 문화에도 수용적이었다. 또한 다른 국가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는 것에 있어서도 제한을 크게 두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를 통해 오랑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 이러한 문화의 기증은 제한되었다. 송나라 진종(眞宗)때(1006년)부터 조정의 명령으로, 변경 지역 거주민은 아홉 가지 경전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서적을 지닌 채 무역소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규정했으며, 인종(仁宗) 천성(天聲)5년(1027년)에는 신료들이 지은 문집이 웅주의 무역소를 통해 북방의 요나라로 흘러들어 갔기 때문에 거듭 금지령을 내렸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금지할 것을 명령했다.[12]

천쉐린은 이러한 변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대 이래 집정자들은 걸핏하면 국방의 기밀이나 정치적 안위를 이유로 저작자의 권리를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했으며, 형법으로 민간의 일을 처리했다…. 이런 추세는 송대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 그 시대에는 서적 수출에 대해 그토록 경계심을 품었을까?"

이러한 발언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오랑캐들의 존재감이 중국에 결속력, 문화에 대한 수용력, 관대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잇다.[13]

또한, 화이론을 바탕으로 형성된 민족과 국가의 국경 의식은 두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하나는 ‘국경’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14]또 다른 하나는 외래의 종교, 습속, 기타 문명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으며 이를 탄압했다는 것이다.[15] 이러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주의는 훗날 중국이 서양 열강에 힘 없이 무너지게 되는 역사적 사실과 연결지었을 때, 안타까운 점으로 남는다.

  1. 출처: 바이두 지식백과
  2. 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3-4.
  3. 손애리, 구양수의 ‘정통론’읽기, 동양사회사상학회, 2022, p.6.
  4. 논어, 양화편 中
  5. 요나라가 망한 후 1132년 중앙 아시아에 세워진 나라
  6. 오르도스, 감숙성, 산시성에 걸치는 지역에 티베트계 탕구트인이 세운 나라
  7. 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나라
  8. 938년 중국의 윈난 지방에서 단사평이 세운 나라로, 1253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함
  9. 베트남 북부 지역의 옛 이름
  10.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3~56.
  11.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57.
  12. 이와 관련된 자세한 예시들이 더욱 많다. 예시가 필요한 사람은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64~65.
  13. 쉽게 생각해보자. 내가 시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을 때는 주변 친구들에게 공부 자료를 마음껏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점수가 그리 높지 않을 때는, 선뜻 자료를 공유하기 어렵다.
  14. 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을 참고하라
  15. 구체적인 예시는 거자오광, 이 중국에 거하라, 이원석 역, 글항아리, 2012, p.71~72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