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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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 | [[파일:전족1.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파일:전족한 여성의 발.jpeg|300픽셀|섬네일|오른쪽]] | |
− |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 + | 전족(缠足,纏足,chánzú)은 중국에서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 등으로 묶던 풍습을 뜻한다.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
− | +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15/story_n_5497725.html 여기]에서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은 중국 여인들의 전족한 발을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 |
−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15/story_n_5497725.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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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족의 기원== | ==전족의 기원== | ||
:전족은 [[남북조]], [[당]]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말]]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 :전족은 [[남북조]], [[당]]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말]]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 ||
+ | 각 시기마다 전족이 유행하는 묶은 방식이 다 따르다.청대에는 3인치짜리 "황금 연꽃"을 선호했다.청말민초에 전족이 나쁜 관습이라고 봤다.청정부와 민국정부가 이 관습을 패지한다고 주장했다.결국 전족 관습은 민국 30년(1941년)후에야 완전히 패지했다.전족의 가장 잔인한 측면은 한족 농민대중이 상류계급을 모방했다는 점이다.전족은 고된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한족 농민여성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 ||
==전족 전파 과정== | ==전족 전파 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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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 상류층 보편화>=== | ===<원대: 상류층 보편화>=== | ||
− | :다음 시대인 [[원]]대에는 전족이 사대부층 전반의 보편적인 풍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경록』]]에서는 "사람마다 전족을 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원대에 전족이 지배계층의 일반적 풍속으로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br> | + | :다음 시대인 [[원]]대에는 전족이 사대부층 전반의 보편적인 풍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경록』]]에서는 "사람마다 전족을 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원대에 전족이 지배계층의 일반적 풍속으로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원나라는 한족이 아닌 몽고인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중원의 정복 이후에도 한족의 풍습인 전족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족은 몽골족과 한족의 여인들을 구분하는 주요 잣대가 되어 더욱 번창하였다. 원나라는 비록 몽고족의 지배체제 였지만 전족의 풍습은 송나라시대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br> |
===<명청대: 전 계층 보편화>=== | ===<명청대: 전 계층 보편화>=== | ||
− | :명청대에 전족은 지배계층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민중에까지 확산되었다. 한족은 물론이고 서북, 서남의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하였다. | + | :명청대에 전족은 지배계층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민중에까지 확산되었다.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명나라시대의 주된 목적은 한족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였다. 한족의 고유문화를 재정비하고 사회 전반의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한족 고유의 문화로 자리 잡은 전족은 더욱 강조되고 찬양되었다. 또한 이전과는 달리 전족의 크기와 모양에 대해서 여러가지 요구를 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삼촌(三寸)은 10.2cm정도의 크기로 명나라시대에 등장한 기준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전족은 성적인 색채를 띠게 되며 수많은 성문화 작품에 반영되었다. 명나라 시대에 전족이 성적 상징물이 되었다면, 청나라 시대에 전족은 여성의 혼인에 있어서 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나라 시기에 전족은 보편화되어 한족은 물론이고 서북, 서남의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하였다. 명을 몰아내고 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수차례에 걸쳐 전족을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민간의 압도적인 풍조를 막아내지 못했고, 급기야 만주족들도 전족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br> |
==전족의 방법== | ==전족의 방법== | ||
− | [[파일: | + | [[파일:전족과정2.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전족을 하고 있는 아이]] |
:전족은 보통 아이가 걸을 수 있는 나이인 4~5살 때 시작한다. 그러나 전족하기 전에 아이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발에 꼭 끼는 신발을 신겨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전족할 때는 길이가 7~8척, 폭이 3~3.5치되는 무명천(쉽게 느슨해지는 비단과 같은 천은 사용하지 않는다), 바늘과 실, 가위, 더운물, 명반(지혈제) 등이 준비되어야한다. | :전족은 보통 아이가 걸을 수 있는 나이인 4~5살 때 시작한다. 그러나 전족하기 전에 아이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발에 꼭 끼는 신발을 신겨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전족할 때는 길이가 7~8척, 폭이 3~3.5치되는 무명천(쉽게 느슨해지는 비단과 같은 천은 사용하지 않는다), 바늘과 실, 가위, 더운물, 명반(지혈제) 등이 준비되어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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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족 후에는 발이 아무리 아파도 걸어야한다. 그래야만 전족이 완성한 후에 걷지 못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 :그리고 전족 후에는 발이 아무리 아파도 걸어야한다. 그래야만 전족이 완성한 후에 걷지 못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 ||
− | ==전족의 | + | ==전족의 여러 상징== |
[[파일:전족그림.jpg|250픽셀|왼쪽]] | [[파일:전족그림.jpg|250픽셀|왼쪽]] | ||
===<중국인과 작은 발>=== | ===<중국인과 작은 발>=== | ||
− | :중국인들은 예부터 작은 발을 미의 잣대로 삼았고, 작은 발을 가진 여자가 걷는 것을 보면서 우아하고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심미관이 동한 말기의 민요 [[ | + | :중국인들은 예부터 작은 발을 미의 잣대로 삼았고, 작은 발을 가진 여자가 걷는 것을 보면서 우아하고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심미관이 동한 말기의 민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관념은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 ===<성(性)적 | + | ===<성(性)적 상징>=== |
:중국에서 여성의 발은 남편이 아니면 접촉할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신체부위였다. 특히 맨발을 외간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보다도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족한 발은 신체의 그 어느 부위보다도 가장 은밀한 부분이자 성적 매력의 결집체로 이해되었다.<br> | :중국에서 여성의 발은 남편이 아니면 접촉할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신체부위였다. 특히 맨발을 외간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보다도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족한 발은 신체의 그 어느 부위보다도 가장 은밀한 부분이자 성적 매력의 결집체로 이해되었다.<br> | ||
:이외에도 전족을 하게 되면 보행시 보폭이 줄게 되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게 되는데, 이 모습이 성적 매력으로 비추어졌다는 설명도 있으며, 이러한 보행 습관으로 인해 엉덩이와 생식기의 근육이 발달하게 되어 성적 쾌감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br> | :이외에도 전족을 하게 되면 보행시 보폭이 줄게 되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게 되는데, 이 모습이 성적 매력으로 비추어졌다는 설명도 있으며, 이러한 보행 습관으로 인해 엉덩이와 생식기의 근육이 발달하게 되어 성적 쾌감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br> | ||
:전족을 [[페티시즘]]의 일부로 보는 관점도 존재하는데, 여성의 몸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전족이 성행위의 상징이 되어 전족에 대한 더 심한 집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전족 특유의 부패하는 냄새가 남성들의 페티시즘을 자극시켰다는 설명도 존재한다.<br> | :전족을 [[페티시즘]]의 일부로 보는 관점도 존재하는데, 여성의 몸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전족이 성행위의 상징이 되어 전족에 대한 더 심한 집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전족 특유의 부패하는 냄새가 남성들의 페티시즘을 자극시켰다는 설명도 존재한다.<br> | ||
− | ===< | + | ===<종교와 전족의 연관성>=== |
:종교적 의미로서의 전족 풍습은 중국의 봉건 사상인 [[음양가(陰陽家)]]와 [[유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이론의 핵심적 관념 중 하나는 이원론적 인식이다. 남성과 밝음과 뜨거움, 적극성 등이 양(陽)이라면, 여성과 어두움, 차가움, 소극성은 음(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적이고 소극적인 음에 속하는 여성을 더욱 음에 가깝게 해주는 것이 전족이였던 것이다.<br>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복종적이어야 했는데, 전족은 이러한 제도와 꼭 맞는 의식이었다.<br>전족을 [[금련(金蓮)]]이라고 칭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맨발로 서 있는 관음보살상 등에서 보여지는 연꽃의 이미지를 여성 전족에 대입시켜 전족을 연꽃처럼 고결하고 진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br>전족은 여성들에게 종교적 측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종교는 전족을 미화하고 지속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종교적 의미로서의 전족 풍습은 중국의 봉건 사상인 [[음양가(陰陽家)]]와 [[유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이론의 핵심적 관념 중 하나는 이원론적 인식이다. 남성과 밝음과 뜨거움, 적극성 등이 양(陽)이라면, 여성과 어두움, 차가움, 소극성은 음(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적이고 소극적인 음에 속하는 여성을 더욱 음에 가깝게 해주는 것이 전족이였던 것이다.<br>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복종적이어야 했는데, 전족은 이러한 제도와 꼭 맞는 의식이었다.<br>전족을 [[금련(金蓮)]]이라고 칭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맨발로 서 있는 관음보살상 등에서 보여지는 연꽃의 이미지를 여성 전족에 대입시켜 전족을 연꽃처럼 고결하고 진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br>전족은 여성들에게 종교적 측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종교는 전족을 미화하고 지속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
− | ===< | + | ===<심리적 신분상승과 전족>=== |
− | :전족은 본래 상층신분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족을 하게되면 여성은 그 순간부터 활동력이나 노동력을 거의 상실하여 자기 발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자연히 | + | :전족은 본래 상층신분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족을 하게되면 여성은 그 순간부터 활동력이나 노동력을 거의 상실하여 자기 발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자연히 제한되었고, 먼 거리를 가야할 때는 반드시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족은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는 상류층에서만 가능했다. 하층신분의 여성들은 상류층의 특권이었던 전족을 부러워했고, 이후 전족이 전 계층에 확산되면서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
==전족금지와 여성해방== | ==전족금지와 여성해방== | ||
− | ===<금지과정 | + | ===<전족 금지과정>=== |
*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br> | *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br> | ||
− | * | + | *[[태평천국]]시기: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인들의 정상적인 발 또한 주장하였다. 태평군이 [[남경]]에 진입하자 그는 전족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여 당시 태평군이 진압한 곳에서는 확실히 전족을 엄금했다. 하지만 전족을 철저하게 금할 수는 없었다.<br> |
− | *[[무술개혁운동 | + | *[[무술개혁운동]] 시기: 지도자였던 [[강유위]]와 [[양계초]]가 [[부전족회]](不纏足會:전족 안하기 모임)를 만들고 [[천족운동]]을 제창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와 [[장지동]]을 비롯한 당시의 실력자들도 전족반대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런 운동 결과로, 1902년에는 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족금지령을 공포하였다.<br> |
− | *5.4운동(1919):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br> | + | :::이 시기의 전족에 대한 비판과 천족운동의 전개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
− | *[[중화민국]] 시기: | + | ::#국가의 흥망의 관점: 전족은 민족의 쇠약과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화근으로 간주되었다. 강유위는 "여성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며, 독립은 전족 해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족에서 해방하는 것은 독립의 기점이고 강종의 근원인 것이다. 근력이 남성과 동등하게 되면 독서에 힘써 애국의 정신을 진흥하고, 건강한 자녀를 낳을 수가 있으며, 조국이 처한 망국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 |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전족금지법령]] | + | ::#현대 위생관념과 관련된 관점: 강유위는 1898년 광서제에게 올린 상소문 『청금부녀과족절(請禁婦女裹足折)』에서 "전족은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골절되어 무용지물로 만드는 병을 야기하는 것이고, 병사의 강건함으로 보면 약한 혈통을 잘못 유전시키는 것이며, 미풍양속으로 보면 야만으로 주변국의 조롱거리가 되니 이를 참을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참을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부국강병의 시각에서 건강과 위생의 합리성을 주장한 것이다. |
+ | ::#실용성과 경제성의 관점: 양계초는 중국이 다른 선진국에 뒤쳐져 빈곤하고 가난한 연유 중 하나가 "중국의 여성이 이익을 산출하지 못하고 타인의 봉양을 기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의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족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 *[[5.4운동]](1919): 5.4운동 시기 전통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전족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br> | ||
+ | *[[중화민국]] 시기: 국민당 정부는 1928년 [[전족금지법령]]을 발포하였다. 법령에 따르면, 만 15세 미만의 소녀에 대해서는 이미 전족을 했을 경우 즉시 풀게 하고 전족을 안 했다면 하지 못하게 하며, 만 15세에서 30세의 여성들에게도 전족을 풀 것을 권고하였다. 이러한 규정을 어기고 전족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높은 벌금을 물렸다. 다만 만 30세 이상의 전족 여성에 대해서는 방족(放足)을 권유하되 강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력한 법 집행에도 불구하고 일부 산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족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br> | ||
+ |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전족금지법령]]이 계승되었고, 전족은 중국 전역에서 거의 완벽히 없어지게 되었다.<br> | ||
− | == | + | ===<천족운동의 실질적 장애물>=== |
+ | #혼사에 대한 걱정: 전통 관념을 가진 남성들의 대부분은 배우자가 반드시 전족한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남녀 막론하고 '전족을 하지 않으면 좋은 시집을 찾을 수 없다(不缠足找不到好婆家)'는 생각이 매우 팽배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방족(放足)의 당위성을 실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문제에 직면하여 전족을 포기할 수 없었다. | ||
+ | #전통관습에 대한 거부의 어려움: 전족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혼인의 필수 요건이었으며, 이는 중국이 가진 오래된 관습 중 하나였다. 지배적인 전통관념 아래에서 전족금지운동(放足运动)은 큰 난관이 있었다. 전족금지는 중국 남성과 여성이 공통으로 유지해오던 심미표준(审美标准)을 한번에 바꾸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 ||
+ | |||
+ | ===<전족금지와 공산당 내 여성활동의 연관성>=== | ||
+ | [[파일:신여성선전화.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여성의 확대된 역할을 장려하는 선전이다.]] [[파일:신여성선전화3.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여러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모두 전족을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 ||
+ | *'하층부녀직'에 종사하는 공산당원간부들은 전족을 푼 후 여러 산촌 마을을 다니며 전족금지를 선언하고, 부녀식자반을 조직했으며, 부녀생산전선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적지 않은 부녀들이 전족을 풀기 시작했고, 적극적으로 인민전쟁에 투신하였다. [[해방전쟁]]시기(중국 [[제 3차 혁명전쟁]]), 1946년 [[산동]]의 통계에 따르면, 전족을 푼 여성은 420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해방구 청년, 중년 부녀자의 70%에 다다르는 수치다. | ||
+ | *쯔보시(淄博)의 방족(放足) 운동은 전쟁의 배경 아래에서 더욱 흥기했으며, 전쟁 중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내었다. 이 지역은 오래된 중국 혁명 지역으로, 이 지역의 많은 전족여성들이 신분해방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민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협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은 보초근무를 서거나, 전병을 부치거나, 군복을 만들거나, 구두 밑창을 박거나 하는 등의 일들을 통해 중국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지지했다. | ||
+ | *많은 수의 전족여성이 전선을 지원하던 시기, 방족(放足)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방족(放足)을 함으로써 전족 여성들은 신체의 불편을 극복하고, 자아초월을 실현하였다. 방족(放足)의 여부를 떠나 그들 모두는 중국혁명에 큰 공헌을 하였다. | ||
+ | |||
+ | ===<전족금지와 여성해방의 연관성>=== | ||
+ | *대량의 전족 풀기 실천에 따라, 전족여성과 그의 친적 사상관념의 변화와 사상각성의 제고가 이루어졌다. 많은 전족여성이 스스로의 신체 경험으로부터 전족을 푸는 것에 대한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남녀평등, 공통노동, 부녀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것에 대한 인식들이 생겨났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당시 전족에 대한 여성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br> | ||
+ | ::“一下解放了,老少进步了,我就说还是解放了好!”;“八路军解放了,多么好!咱放脚,放开脚,男女平等,咱都干活!这真是男女平等,女的担担子,推车子,翻天了!女的当家,女的说啥就是啥!” | ||
+ | *많은 수의 전족여성의 남편들 또한 전통적 심미방식을 반성하기 시작했고, 다시 전족의 본질과 위해성을 인식하였다. | ||
+ | |||
+ | ===<전족금지과 관련된 [[신여성]] 담론의 한계>=== | ||
+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국 내에서는 계몽 담론과 관련하여 여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여성의 신체 또한 근대적으로 재배치 되기 시작하였는데, 부전족운동은 그 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신여성]] 담론은 '여자는 국민의 어머니'라는 공통의 명제 아래 2세대 아동의 신체발육을 촉진시켜 건강한 신국민을 육성하고 우수한 민족을 양성하는 것이 곧 여성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방족(放足)을 통해 여성의 신체는 자유로워졌으나, 새로운 여성의 개념은 '가사일을 맡아보는 사람' 혹은 '아이의 주 양육자', '신국민 생산자'로 재생산되면서 여성의 역할에 다시금 한계를 만들어냈었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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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족을 보는 또 다른 시각== | ||
+ | 전족에 대한 일반적인 담론은 '여성은 전족을 통해 핍박받고 억압받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의 전족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중국 여성들의 전족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전족이 여성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가에 다소 치우쳐있다. 이와 같은 담론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History and Women's Studies 전공교수인 高彦颐(Dorothy Ko)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는 "당대의 여성들에게 전족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그들에게 전족은 바깥세상이 정한 신분적 지위나 '바람직함(可欲性)'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존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라고 주장하며 전족이 여성의 자유선택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제기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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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흥미로운 점들== | ||
+ | *남성의 전족: 전족은 여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부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연극이었다. 전근대시기 중국에서는 남녀배우의 합동 공연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여성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자배우가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해야만 했는데, 이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전족이었다. 당시 전족은 여성의 대표적 상징이었기 때문에 극 중 여성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들도 전족의 외양을 갖추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전족으로 위장할 수 있는 소도구를 이용하였지만, 일부 뿌리깊은 연극가문에서는 실제로 남아에게 전족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흔치는 않았으나 미신라든가 동성애 요인으로 인해 남성이 전족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
+ | *중국만의 특수성: 중국의 여러 문화는 오랜시간동안 거의 모든 주변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족만큼은 한국, 일본, 또는 베트남 등 그 어느 나라도 전해지지 않았다. 전족은 그만큼 중국적인 환경과 관념구조를 토대로 한 관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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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 ||
+ | #박은희, 윤미영, "중국 근대의 전족폐지론과 국가주의", 『退溪學論叢 第23輯』: 143-176쪽 | ||
+ | #이근명, "중국여성의 슬픔-전족의 역사", 『국제지역연구』, 1999, 3(3) : 197-216쪽 | ||
+ | #박지훈, "纏足 : 중국역사 속의 畸形문화", 『시민인문학 21호』, 2011 : 172-201쪽 | ||
+ | #정기성, 김민자, "전족과 코르셋에 표현된 몸의 억압에 대한 의미해석", 『한국복식학회지』, 61(156), 2011 : 35-50쪽 | ||
+ | #차은진, 박민여, "纏足의 상징적 의미", 『한국의류학회지』, 2001, 8(25) : 1398-1407쪽 | ||
+ | #소황옥, "중국 전족(纏足)의 미학적 연구",『한복문화』, 2006, 9 : 107-116쪽 | ||
+ | #엄영욱, "중국문학에 나타난 성:전족을 중심으로", 『문예연구』, 2004, 11(43) : 51-68쪽 | ||
+ | #신수용, "中國 纏足에 關한 史的 考察",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 ||
+ | #刘 怡, "她们的身体记得的历史——评高彦颐《缠足:“金莲崇拜”盛极而衰的演变》", 『妇女研究论丛』, 2011, 2(104) | ||
+ | #侯杰, 赵天鹭, "近代中国缠足女性身体解放研究新探——以山东省淄博市部分村落为例", 『妇女研究论丛』, 2013, 5(119) | ||
+ | #오금성 외,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이산, 2007 | ||
+ | #고홍홍 저(도중만, 박영종 공역),『중국의 전족 이야기』, 신아사, 2002 | ||
+ | #우원원, "전족과 코르셋을 통해 본 동서양 복식문화의 심미적 특성 비교", 동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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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부링크== | ||
+ | *[http://baike.baidu.com/link?url=xu4XW6exg7unKpGxvzyCFrbuwyU-6WaUw0K1Gays9es0UxoZqjEe9ALnzWiSm0wrTenkVmdTYBF8ecE9arzPBa 바이두백과_전족] | ||
+ | *[http://baike.baidu.com/link?url=dleRd-xvR46mNaqdl1R7kr3B92Sj5GUWIvEyG6IygiG9yPtcBrzmofM4ZVyaA6c7yHGy7AfG1Rc4u3Ln7xlkla 바이두백과_천족운동] | ||
+ |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15/story_n_5497725.html 중국 마지막 '전족'여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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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사회]][[분류:민간 풍속]] |
2020년 12월 21일 (월) 13:02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전족(缠足,纏足,chánzú)은 중국에서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만들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천 등으로 묶던 풍습을 뜻한다. 오대(五代)부터 민국(民國)시기까지 거의 1000여년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의 사진작가가 찍은 중국 여인들의 전족한 발을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전족의 기원
- 전족은 남북조, 당과 오대시기를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송대에 전족이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오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말의 자료에 따르면 오대십국시기 남당의 후주 이욱의 궁정에서 이습은 충에 능한 그의 빈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금련 즉, 황금으로 만든 연꽃 위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궁중과 상류층의 여성들이 흉내 내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욱은 빈을 보며 "비단으로 발을 감싸 언뜻 곱게 구부리니 갓 나온 달 같구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각 시기마다 전족이 유행하는 묶은 방식이 다 따르다.청대에는 3인치짜리 "황금 연꽃"을 선호했다.청말민초에 전족이 나쁜 관습이라고 봤다.청정부와 민국정부가 이 관습을 패지한다고 주장했다.결국 전족 관습은 민국 30년(1941년)후에야 완전히 패지했다.전족의 가장 잔인한 측면은 한족 농민대중이 상류계급을 모방했다는 점이다.전족은 고된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야 하는 한족 농민여성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전족 전파 과정
<오대(五代) 및 북송대: 제한적 전파>
- 전족은 오대(五代)에 출현하였지만, 궁정의 일부 무녀와 후궁만이 전족을 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전족이 궁정내 일부 특수계층의 고립된 행위에서 벗어나 민간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말기인 12세기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동경(東京) 개봉(開封)의 지배계층 부녀자들이 전족의 유행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풍조가 점차 지방의 도시로, 그리고 여타 사대부층으로 확산되어갔다.
<남송대: 지역적 전파>
- 남송시대에 이르러서 전족은 더 유행하여서, 북방의 상층 부녀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남방으로 전해지고, 더 나아가서는 남송치하의 모든 지역에 파급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만해도 전족은 궁중 여인들이나 기생들에게만 보편적이었을 뿐, 여전히 모든 계층에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원대: 상류층 보편화>
- 다음 시대인 원대에는 전족이 사대부층 전반의 보편적인 풍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철경록』에서는 "사람마다 전족을 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원대에 전족이 지배계층의 일반적 풍속으로 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원나라는 한족이 아닌 몽고인에 의해 건국되었으나, 중원의 정복 이후에도 한족의 풍습인 전족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족은 몽골족과 한족의 여인들을 구분하는 주요 잣대가 되어 더욱 번창하였다. 원나라는 비록 몽고족의 지배체제 였지만 전족의 풍습은 송나라시대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명청대: 전 계층 보편화>
- 명청대에 전족은 지배계층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민중에까지 확산되었다.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명나라시대의 주된 목적은 한족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였다. 한족의 고유문화를 재정비하고 사회 전반의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한족 고유의 문화로 자리 잡은 전족은 더욱 강조되고 찬양되었다. 또한 이전과는 달리 전족의 크기와 모양에 대해서 여러가지 요구를 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삼촌(三寸)은 10.2cm정도의 크기로 명나라시대에 등장한 기준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전족은 성적인 색채를 띠게 되며 수많은 성문화 작품에 반영되었다. 명나라 시대에 전족이 성적 상징물이 되었다면, 청나라 시대에 전족은 여성의 혼인에 있어서 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나라 시기에 전족은 보편화되어 한족은 물론이고 서북, 서남의 소수민족들까지 전족을 채택하였다. 명을 몰아내고 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수차례에 걸쳐 전족을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민간의 압도적인 풍조를 막아내지 못했고, 급기야 만주족들도 전족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족의 방법
- 전족은 보통 아이가 걸을 수 있는 나이인 4~5살 때 시작한다. 그러나 전족하기 전에 아이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발에 꼭 끼는 신발을 신겨서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한다. 전족할 때는 길이가 7~8척, 폭이 3~3.5치되는 무명천(쉽게 느슨해지는 비단과 같은 천은 사용하지 않는다), 바늘과 실, 가위, 더운물, 명반(지혈제) 등이 준비되어야한다.
<전족의 과정>
- 전족할 아이의 발을 더운물로 씻고, 발톱을 깎는다.
-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발을 전족을 해주는 사람의 다리위에 올려 놓는다.
- 발가락 사이마다 명반을 발라 화농이나 염증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한다.
- 일반적으로 오른 발부터 묶기 시작하는데,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을 아래로 눌러 굽혀서 발바닥 밑에 들어가도록 묶는다.
- 발의 바깥쪽 뼈를 묶어 아래로 집어 넣어 발이 가늘고 마르게 만든다.
- 발을 짧고 활처럼 굽도록 묶는다. 이 때 발바닥 중심이 오목하게 들어가고 발등이 솟아오르도록 모양을 낸다.
- 바느질로 기워 천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Xvs5OnlL8w
위의 링크에서 전족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전족 후의 과정>
- 전족을 하고 나서는 사흘에 한 번 씩은 발을 풀어 소독을 하고 발바닥에 난 티눈을 침으로 빼준다. 그리고 전족 띠를 더욱 조여서 발을 묶는다. 천을 교환하는 동작은 빨라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피가 솟구쳐 심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반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발 가운데의 뼈를 발바닥 밑에 오그려 넣어 발등이 위로 올라가고 발이 작아지도록 만든다. 발허리가 꺾어질 즈음이면 하루걸로 한번 씻고 매번 힘주어 꺾는다. 살을 짓무르게 하기 위해 고의로 전족 천안에 돌 부스러기, 기와조각, 도자기 파편을 집어 넣어 상처를 내기도 한다. 잠잘 때는 발 아래 물건을 놓아 피가 거꾸로 흐르도록 해서 발 부위의 혈액순환을 둔화 시킨다. 시간이 지나면 발의 근육이 수축되고 발등이 굳었던 피부가 벗겨지고 썩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면서 작은 발이 된다. 이 과정은 대략 2년 정도 걸린다.
<전족 후 유의점>
- 전족한 발은 냄새제거와 혈액순환, 굳은살을 없애주기 위해 자주 씻어주어야 한다. 발 닦는 물에 향료를 타기도 한다.
- 그리고 전족 후에는 발이 아무리 아파도 걸어야한다. 그래야만 전족이 완성한 후에 걷지 못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전족의 여러 상징
<중국인과 작은 발>
- 중국인들은 예부터 작은 발을 미의 잣대로 삼았고, 작은 발을 가진 여자가 걷는 것을 보면서 우아하고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심미관이 동한 말기의 민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관념은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性)적 상징>
- 중국에서 여성의 발은 남편이 아니면 접촉할 수도 살펴볼 수도 없는 신체부위였다. 특히 맨발을 외간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보다도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족한 발은 신체의 그 어느 부위보다도 가장 은밀한 부분이자 성적 매력의 결집체로 이해되었다.
- 이외에도 전족을 하게 되면 보행시 보폭이 줄게 되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게 되는데, 이 모습이 성적 매력으로 비추어졌다는 설명도 있으며, 이러한 보행 습관으로 인해 엉덩이와 생식기의 근육이 발달하게 되어 성적 쾌감이 높아졌다는 설명도 있다.
- 전족을 페티시즘의 일부로 보는 관점도 존재하는데, 여성의 몸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킨 전족이 성행위의 상징이 되어 전족에 대한 더 심한 집착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전족 특유의 부패하는 냄새가 남성들의 페티시즘을 자극시켰다는 설명도 존재한다.
<종교와 전족의 연관성>
- 종교적 의미로서의 전족 풍습은 중국의 봉건 사상인 음양가(陰陽家)와 유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이론의 핵심적 관념 중 하나는 이원론적 인식이다. 남성과 밝음과 뜨거움, 적극성 등이 양(陽)이라면, 여성과 어두움, 차가움, 소극성은 음(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적이고 소극적인 음에 속하는 여성을 더욱 음에 가깝게 해주는 것이 전족이였던 것이다.
유교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복종적이어야 했는데, 전족은 이러한 제도와 꼭 맞는 의식이었다.
전족을 금련(金蓮)이라고 칭하는 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맨발로 서 있는 관음보살상 등에서 보여지는 연꽃의 이미지를 여성 전족에 대입시켜 전족을 연꽃처럼 고결하고 진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전족은 여성들에게 종교적 측면에서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종교는 전족을 미화하고 지속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심리적 신분상승과 전족>
- 전족은 본래 상층신분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족을 하게되면 여성은 그 순간부터 활동력이나 노동력을 거의 상실하여 자기 발로 갈 수 있는 거리는 자연히 제한되었고, 먼 거리를 가야할 때는 반드시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족은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는 상류층에서만 가능했다. 하층신분의 여성들은 상류층의 특권이었던 전족을 부러워했고, 이후 전족이 전 계층에 확산되면서 '전족을 하지 않는 것'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전족금지와 여성해방
<전족 금지과정>
- 청조: 1638년 홍타이지는 전족을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조령을 반포하였고, 이후 순치 17년(1660)과 강희 3년(1664)에 거듭하여 포고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족 민심의 반대에 부딪혀 청 정부는 전족을 용인하였고, 만주족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전족을 하기도 하였다.
- 태평천국시기: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은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인들의 정상적인 발 또한 주장하였다. 태평군이 남경에 진입하자 그는 전족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위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여 당시 태평군이 진압한 곳에서는 확실히 전족을 엄금했다. 하지만 전족을 철저하게 금할 수는 없었다.
- 무술개혁운동 시기: 지도자였던 강유위와 양계초가 부전족회(不纏足會:전족 안하기 모임)를 만들고 천족운동을 제창하였다. 이후 위안스카이와 장지동을 비롯한 당시의 실력자들도 전족반대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런 운동 결과로, 1902년에는 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족금지령을 공포하였다.
- 이 시기의 전족에 대한 비판과 천족운동의 전개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국가의 흥망의 관점: 전족은 민족의 쇠약과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화근으로 간주되었다. 강유위는 "여성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며, 독립은 전족 해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족에서 해방하는 것은 독립의 기점이고 강종의 근원인 것이다. 근력이 남성과 동등하게 되면 독서에 힘써 애국의 정신을 진흥하고, 건강한 자녀를 낳을 수가 있으며, 조국이 처한 망국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현대 위생관념과 관련된 관점: 강유위는 1898년 광서제에게 올린 상소문 『청금부녀과족절(請禁婦女裹足折)』에서 "전족은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골절되어 무용지물로 만드는 병을 야기하는 것이고, 병사의 강건함으로 보면 약한 혈통을 잘못 유전시키는 것이며, 미풍양속으로 보면 야만으로 주변국의 조롱거리가 되니 이를 참을 수 있다면 그 무엇을 참을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부국강병의 시각에서 건강과 위생의 합리성을 주장한 것이다.
- 실용성과 경제성의 관점: 양계초는 중국이 다른 선진국에 뒤쳐져 빈곤하고 가난한 연유 중 하나가 "중국의 여성이 이익을 산출하지 못하고 타인의 봉양을 기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의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족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5.4운동(1919): 5.4운동 시기 전통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전족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에는 전족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수치로 인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 중화민국 시기: 국민당 정부는 1928년 전족금지법령을 발포하였다. 법령에 따르면, 만 15세 미만의 소녀에 대해서는 이미 전족을 했을 경우 즉시 풀게 하고 전족을 안 했다면 하지 못하게 하며, 만 15세에서 30세의 여성들에게도 전족을 풀 것을 권고하였다. 이러한 규정을 어기고 전족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높은 벌금을 물렸다. 다만 만 30세 이상의 전족 여성에 대해서는 방족(放足)을 권유하되 강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력한 법 집행에도 불구하고 일부 산간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족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시기: 전족금지법령이 계승되었고, 전족은 중국 전역에서 거의 완벽히 없어지게 되었다.
<천족운동의 실질적 장애물>
- 혼사에 대한 걱정: 전통 관념을 가진 남성들의 대부분은 배우자가 반드시 전족한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남녀 막론하고 '전족을 하지 않으면 좋은 시집을 찾을 수 없다(不缠足找不到好婆家)'는 생각이 매우 팽배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방족(放足)의 당위성을 실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문제에 직면하여 전족을 포기할 수 없었다.
- 전통관습에 대한 거부의 어려움: 전족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혼인의 필수 요건이었으며, 이는 중국이 가진 오래된 관습 중 하나였다. 지배적인 전통관념 아래에서 전족금지운동(放足运动)은 큰 난관이 있었다. 전족금지는 중국 남성과 여성이 공통으로 유지해오던 심미표준(审美标准)을 한번에 바꾸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족금지와 공산당 내 여성활동의 연관성>
- '하층부녀직'에 종사하는 공산당원간부들은 전족을 푼 후 여러 산촌 마을을 다니며 전족금지를 선언하고, 부녀식자반을 조직했으며, 부녀생산전선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적지 않은 부녀들이 전족을 풀기 시작했고, 적극적으로 인민전쟁에 투신하였다. 해방전쟁시기(중국 제 3차 혁명전쟁), 1946년 산동의 통계에 따르면, 전족을 푼 여성은 420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해방구 청년, 중년 부녀자의 70%에 다다르는 수치다.
- 쯔보시(淄博)의 방족(放足) 운동은 전쟁의 배경 아래에서 더욱 흥기했으며, 전쟁 중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내었다. 이 지역은 오래된 중국 혁명 지역으로, 이 지역의 많은 전족여성들이 신분해방을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민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협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은 보초근무를 서거나, 전병을 부치거나, 군복을 만들거나, 구두 밑창을 박거나 하는 등의 일들을 통해 중국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지지했다.
- 많은 수의 전족여성이 전선을 지원하던 시기, 방족(放足)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방족(放足)을 함으로써 전족 여성들은 신체의 불편을 극복하고, 자아초월을 실현하였다. 방족(放足)의 여부를 떠나 그들 모두는 중국혁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전족금지와 여성해방의 연관성>
- 대량의 전족 풀기 실천에 따라, 전족여성과 그의 친적 사상관념의 변화와 사상각성의 제고가 이루어졌다. 많은 전족여성이 스스로의 신체 경험으로부터 전족을 푸는 것에 대한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남녀평등, 공통노동, 부녀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것에 대한 인식들이 생겨났다. 다음과 같은 문장은 당시 전족에 대한 여성들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 “一下解放了,老少进步了,我就说还是解放了好!”;“八路军解放了,多么好!咱放脚,放开脚,男女平等,咱都干活!这真是男女平等,女的担担子,推车子,翻天了!女的当家,女的说啥就是啥!”
- 많은 수의 전족여성의 남편들 또한 전통적 심미방식을 반성하기 시작했고, 다시 전족의 본질과 위해성을 인식하였다.
<전족금지과 관련된 신여성 담론의 한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국 내에서는 계몽 담론과 관련하여 여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여성의 신체 또한 근대적으로 재배치 되기 시작하였는데, 부전족운동은 그 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신여성 담론은 '여자는 국민의 어머니'라는 공통의 명제 아래 2세대 아동의 신체발육을 촉진시켜 건강한 신국민을 육성하고 우수한 민족을 양성하는 것이 곧 여성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방족(放足)을 통해 여성의 신체는 자유로워졌으나, 새로운 여성의 개념은 '가사일을 맡아보는 사람' 혹은 '아이의 주 양육자', '신국민 생산자'로 재생산되면서 여성의 역할에 다시금 한계를 만들어냈었던 것이다.
전족을 보는 또 다른 시각
전족에 대한 일반적인 담론은 '여성은 전족을 통해 핍박받고 억압받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서의 전족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중국 여성들의 전족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전족이 여성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가에 다소 치우쳐있다. 이와 같은 담론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History and Women's Studies 전공교수인 高彦颐(Dorothy Ko)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는 "당대의 여성들에게 전족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그들에게 전족은 바깥세상이 정한 신분적 지위나 '바람직함(可欲性)'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존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라고 주장하며 전족이 여성의 자유선택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제기하였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들
- 남성의 전족: 전족은 여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부 남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연극이었다. 전근대시기 중국에서는 남녀배우의 합동 공연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여성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자배우가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해야만 했는데, 이 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전족이었다. 당시 전족은 여성의 대표적 상징이었기 때문에 극 중 여성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들도 전족의 외양을 갖추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전족으로 위장할 수 있는 소도구를 이용하였지만, 일부 뿌리깊은 연극가문에서는 실제로 남아에게 전족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흔치는 않았으나 미신라든가 동성애 요인으로 인해 남성이 전족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중국만의 특수성: 중국의 여러 문화는 오랜시간동안 거의 모든 주변지역으로 전파되었고,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족만큼은 한국, 일본, 또는 베트남 등 그 어느 나라도 전해지지 않았다. 전족은 그만큼 중국적인 환경과 관념구조를 토대로 한 관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박은희, 윤미영, "중국 근대의 전족폐지론과 국가주의", 『退溪學論叢 第23輯』: 143-176쪽
- 이근명, "중국여성의 슬픔-전족의 역사", 『국제지역연구』, 1999, 3(3) : 197-216쪽
- 박지훈, "纏足 : 중국역사 속의 畸形문화", 『시민인문학 21호』, 2011 : 172-201쪽
- 정기성, 김민자, "전족과 코르셋에 표현된 몸의 억압에 대한 의미해석", 『한국복식학회지』, 61(156), 2011 : 35-50쪽
- 차은진, 박민여, "纏足의 상징적 의미", 『한국의류학회지』, 2001, 8(25) : 1398-1407쪽
- 소황옥, "중국 전족(纏足)의 미학적 연구",『한복문화』, 2006, 9 : 107-116쪽
- 엄영욱, "중국문학에 나타난 성:전족을 중심으로", 『문예연구』, 2004, 11(43) : 51-68쪽
- 신수용, "中國 纏足에 關한 史的 考察",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 刘 怡, "她们的身体记得的历史——评高彦颐《缠足:“金莲崇拜”盛极而衰的演变》", 『妇女研究论丛』, 2011, 2(104)
- 侯杰, 赵天鹭, "近代中国缠足女性身体解放研究新探——以山东省淄博市部分村落为例", 『妇女研究论丛』, 2013, 5(119)
- 오금성 외,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이산, 2007
- 고홍홍 저(도중만, 박영종 공역),『중국의 전족 이야기』, 신아사, 2002
- 우원원, "전족과 코르셋을 통해 본 동서양 복식문화의 심미적 특성 비교", 동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