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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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51년-1864년까지 홍수전이 기독교를 기본 이념으로 하여 통치한 국가를 말한다. 태평천국은 백련교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청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국내외적으로 청조의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태평천국이라는 '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태평천국은 반청(反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시키며 청에 저항했다. 하지만 동치중흥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짧게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태평천국은 인구의 감소와 청나라의 유명무실한 정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시대배경

당시 청조는 제1, 2차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상당한 배상금 등에 따른 세금의 증가로 인해 경제적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황제의 무능력과,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관료들의 부적절한 대응, 관료 부패 등의 문제로 인해 황제 권위가 하락했었다. 게다가 1846-48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인구 체증 등 여러가지 사회,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고, 홍수가 가뭄까지 겹치면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내용

초기

홍수전은 과거 시험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으나 계속된 낙방으로 인해 만주족의 통치에 분노를 품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홍수전은 중병에 걸려 환상을 체험하게 되는데 환상에서 그는 어떤 노인에게 “이것으로 악마를 멸하라”는 명령과 함께 검을 받고 왕의 증표까지 받게 된다. 그 환상 속에서 홍수전은 형뻘 되는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으며 악마와 싸웠다. 병에서 회복한 후, 우연히 서가에 있던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읽고 자신의 환상 내용과 일치하는 것에 놀랐고 이를 바탕으로 홍수전은 아버지 상제께서 그에게 인류를 구제하라는 소명을 내렸고 형뻘 되는 중년 남성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 이후 홍소전은 1834년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 같은 지역의 사람인 풍운산과 홍수전의 친족 홍인간이 입문했다.

교단의 형성

홍수전과 풍운산은 광서 성(현 광서 장족 자치구)에 가서 가르침을 전파했고 동족인 다수의 객가 사람들을 신자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교단의 지도권은 여섯 명의 활동가(홍수전, 양수청, 소조귀, 풍운산, 위정휘, 석달개)가 장악했는데 가장 중요한 군사지도자는 양수청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제의 계시를 받아 그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태평천국의 종교는 기도, 찬송 등 모든 절차를 절반은 기독교에서 빌려오고, 절반은 중국식으로 창조해냈다. 또한 진정한 유일신인 상제 밑에서 모든 인류가 형제이고 자매라고 설교했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생일 날 천왕에 즉위하게 되는데, 국호를 태평천국이라고 했다. 청조가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태평천국군에 가담하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 집단은 점점 더 큰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쉽게 승부를 내지 못 했다. 또한 이들은 변발을 하지 않았고 머리를 그냥 그 모양대로 자라게 하여 청조로부터 발역(髮逆, 장발의 반란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태평천국의 통치

태평천국군은 1853년 후베이 성 우창을 점령한 후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후 도시 이름을 톈징(天京)으로 바꾸고 그곳에 나라를 정비한 후 엄격한 방식으로 통치하게 된다. 그 해 “천조천무제도”를 반포하게 되는데 이는 사유 제도를 부정하고, 토지를 모든 인민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등 일종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당시 사회에 실제로 적용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시행하던 청조의 방식 그대로 토지 소유를 인정하고 토지세를 징수하여 이를 재원으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도박, 아편, 담배, 우상숭배, 간통, 매음, 전족 등과 같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반대했고 여자들에게 군대를 후원하거나 때로는 직접 복무하게 했고 궁정을 운영하게 학는 등 특별한 활동 범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태평천국의 역법이나, 홍수전의 저작을 바탕으로 한 과거제도 등과 같은 부분에 대한 것은 개선되지 못하였다.

태평천국 멸망

국내외로부터의 공격으로 인해 청조 정부는 계속해서 하락세를 걷고 있었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청조 정부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남경을 포위하고 있던 청조의 군영 역시 파괴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1년 동치제가 즉위한 후 북경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서태후와 공친왕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대회적으로는 외국 열강을 유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조약체제를 수용하고, 대내적으로는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한인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이중정책을 실시하면서 청조의 중흥을 가져왔다.

한편,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호남 출신의 한인 유학자 증국번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는데 그는 도덕의 재건을 통해 태평천국을 패배시키고자 했다. 그는 지역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독서인이나 친척, 지인 등 연고관계를 통해 간부를 선발하고, 농민들을 모아 병사를 조직하는 방식을 통해 상군(湘軍)을 조직하게 된다. 증국번은 양쯔강 전투를 대비하여 수사(水師)를 훈련시키고 병기창을 건설하는 등 타 지역까지 원정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상군은 매우 고전하면서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태평천국군도 내부 분란이 발생하면서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가 청조를 지지하여 태평천국군을 몰아낸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고 저장에서 태평천국군과 싸우는 상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1864년, 청조군이 톈징을 함락시킬 즈음 이수성이 홍수전에게 도읍을 포기하고 기회를 노리자고 제안하지만 홍수전은 이를 거부하고 얼마 후 결국 병사하게 된다. 그러면서 톈징이 함락되고 나머지 태평천국의 지도자들도 진압되면서 결국 태평천국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실패이유

태평천국의 실패이유를 아래의 몇 가지로 방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농민계급의 국한성

“천조천무제도”를 반포하긴 했으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허황된 생각이었다. 태평천국 운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당시의 청조는 여전히 봉건사회였다. 현실에 적용 가능한 혁명강령을 내놓지 못하자 대다수의 군사들이 혁명에 참여하는 목적이 불분명해지고 대부분이 가난한 경제적 지위에서 벗어나고, 생계를 위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수도를 톈진으로 정한 후, 지도자들은 봉건적 특권 사상에 지배되어 권력을 다투고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혁명의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후기에, 태평천국이 잠시 부흥하기 시작했으나 지도자 그룹이 분열하면서 형세는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중기에 활동의 근거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것은 오히려 지도자 핵심이 분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톈징으로 수도를 정한 이후, 양수청은 대부분의 군사 실정을 장악함으로 인해 동부집단의 최대실세가 되었다. 이런 집단 간의 권력 다툼이 날로 심해지면서 1856년, 태평천국의 지도자 집단에서는 공개적으로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수성자술(李秀成自述)》에 따르면 양수청의 교만과 독단이 날이 감에 따라 점점 더 심각하게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威风张扬,不知自忌(위풍이 날로 드높아지면서 스스로 자제할 줄 모른다).”

전략상의 실수

예를 들어 금전기의이후, 아주 긴 시간 동안 쯔징산(紫荆山) 주위를 배회하며 진취성이 부족했고, 봉기 이후, 지식인 쟁취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 반공과 지식인 쟁취를 통합하지 못했다. 텐진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에는 고군북벌하여 병가의 큰 금기를 어겼다. 북벌과 서부로의 정벌은 형세가 떠돌이 도적과도 같았고 후기의 작전에서는 매번 좋은 기회를 놓쳐 전략에 중대한 실수가 있었다.

청조의 외국 정부와의 연합

청조가 외국 정부와 연합하여 교살하는 것은 중국 역사상 어느 농민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었다. 1861년, 서태후(慈禧太后)가 증국번에게 쑤(蘇)저(浙)완(皖)간(赣)의 4성 군무를 통할하도록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로써 태평천국군에 맞서 싸우는 청군은 모두 증국번의 지휘를 받게되었다.

지도층의 와해

또한 전기 전쟁으로 인해 지도층이 와해되었다. 《중국근대사》 제3장에 따르면 북벌 도중 풍운산이 폭탄에 맞아 사망하게 되었고 소조귀가 같은 해 부상을 입고 사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평천국군은 2명의 중요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은 중국 근대사에서 규모가 거대하고 파장 또한 굉장했던 위대한 반봉건, 반침략적 농민혁명전쟁이다. 하지만 계급과 시대의 국한성으로 인해 농민 계급이 중국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참고자료

바이두백과 태평천국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신중국사』, 김형종, 신성곤 역, 2판; 까치글방, 2005, pp.25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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