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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은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후부터 전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정부의 양병, 용병의 비용이 크게 늘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지출은 매우 궁핍하게 되어 때로는 백관의 봉록도 정상적으로 지급할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재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정부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몇 가지 고육지책으로 초미의 화급함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염철사·탁지사·청묘사·조용사 등 여러 사직(使職)을 파견하여 백성에 대한 통제와 수탈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종 명목의 번잡한 신세(新稅)를 증설했다. 호등에 따라 징수하던 호세(戶稅)나 토지의 크기에 따라 징수하던 지세 외에도 정액 외의 지세에 가징하던 청묘전, 상업교역에서 일정한 액수를 징수하던 상세, 자산의 크기에 따라 일률적으로 5분의 1을 납부해야 했던 율대와 차상, 가옥의 칸수에 따라 징수하던 간가세(間架稅) 등이 있었다. 게다가 가렴주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백저(白著)는 정부가 세금 외에 강제로 징수하던 세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법은 당 왕조가 번진을 제압하는데 실패하자 백성들의 원성만을 사는 결과를 만들어 백성들이 폭동과 기의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 + | ==개요== |
+ | 당은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후부터 전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정부의 양병, 용병의 비용이 크게 늘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지출은 매우 궁핍하게 되어 때로는 백관의 봉록도 정상적으로 지급할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재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정부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몇 가지 고육지책으로 초미의 화급함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br>우선 염철사·탁지사·청묘사·조용사 등 여러 사직(使職)을 파견하여 백성에 대한 통제와 수탈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종 명목의 번잡한 신세(新稅)를 증설했다. 호등에 따라 징수하던 호세(戶稅)나 토지의 크기에 따라 징수하던 지세 외에도 정액 외의 지세에 가징하던 청묘전, 상업교역에서 일정한 액수를 징수하던 상세, 자산의 크기에 따라 일률적으로 5분의 1을 납부해야 했던 율대와 차상, 가옥의 칸수에 따라 징수하던 간가세(間架稅) 등이 있었다. 게다가 가렴주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백저(白著)는 정부가 세금 외에 강제로 징수하던 세금이었다. <br>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법은 당 왕조가 번진을 제압하는데 실패하자 백성들의 원성만을 사는 결과를 만들어 백성들이 폭동과 기의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 ||
재정 수지를 정비하기 위해서 당 왕조는 대종 때부터 덕종 시기를 전후해 대신 [[유안]]과 양염을 기용하여 재정 확보와 세제 개혁의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대체로 당 왕조의 재정 수입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 재정 수지를 정비하기 위해서 당 왕조는 대종 때부터 덕종 시기를 전후해 대신 [[유안]]과 양염을 기용하여 재정 확보와 세제 개혁의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대체로 당 왕조의 재정 수입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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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법의 의의== | ==양세법의 의의== | ||
− | 양세법의 시행은 역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우선 이것은 [[조용조]]와 각종 가연잡세를 합병하여 일종의 간편한 통일세제를 확립함으로써, 조정은 세정의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관리들은 마음대로 명목을 세워 가렴주구를 행할 수 없게 되어 국가 부세수입의 상대적 안정을 가져왔고 생산의 회복과 발전에도 유리하였다. 다음으로 양세법은 재산과 토지로서 호등을 확정하여 세를 거두었으므로 자산의 다소에 따라 세금도 달랐다. 이처럼 정부 관리와 부상 대가에 상관없이 모두 새로운 세제에 따라 납세하였으므로, 일정한 정도 내에서 부세가 빈궁한 농민에게 집중되어 있던 불합리한 현상을 변화시켜 납세의 대상을 확대했다. 또한 양세법의 주요 항목은 지세와 호세로, 지세는 쌀과 보리를 납부하고 호세는 호등의 고저에 따라 세액을 정하여 조용조제의 “정부(丁夫)로 근본을 삼는” 것이 아니라 “자산으로 주종을 삼게” 되었다. 납세의 다소와 인정의 다소는 이미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졌는데 이는 봉건세제 발전 형태의 새로운 형태이고 국가의 농민에 대한 인식적 지배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인정의 역역(力役)을 위주로 하던 부세제도는 토지 실물을 위주로 하는 부세제도로 변화하였고 이후의 세제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주었다. | + | 양세법의 시행은 역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br> |
+ | 우선 이것은 [[조용조]]와 각종 가연잡세를 합병하여 일종의 간편한 통일세제를 확립함으로써, 조정은 세정의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관리들은 마음대로 명목을 세워 가렴주구를 행할 수 없게 되어 국가 부세수입의 상대적 안정을 가져왔고 생산의 회복과 발전에도 유리하였다. <br> | ||
+ | 다음으로 양세법은 재산과 토지로서 호등을 확정하여 세를 거두었으므로 자산의 다소에 따라 세금도 달랐다. 이처럼 정부 관리와 부상 대가에 상관없이 모두 새로운 세제에 따라 납세하였으므로, 일정한 정도 내에서 부세가 빈궁한 농민에게 집중되어 있던 불합리한 현상을 변화시켜 납세의 대상을 확대했다. <br> | ||
+ | 또한 양세법의 주요 항목은 지세와 호세로, 지세는 쌀과 보리를 납부하고 호세는 호등의 고저에 따라 세액을 정하여 조용조제의 “정부(丁夫)로 근본을 삼는” 것이 아니라 “자산으로 주종을 삼게” 되었다. 납세의 다소와 인정의 다소는 이미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졌는데 이는 봉건세제 발전 형태의 새로운 형태이고 국가의 농민에 대한 인식적 지배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인정의 역역(力役)을 위주로 하던 부세제도는 토지 실물을 위주로 하는 부세제도로 변화하였고 이후의 세제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주었다. | ||
+ | <br> | ||
+ | 따라서 양세법의 시행은 당 후기의 대지주 토지소유제와 상품경제의 발전을 반영하였고, 실행의 목적은 주로 국가의 재정 곤란을 해결하고 세수입의 안정과 재원의 확대에 착안하고 있었다. 이후 당 왕조의 부패에 따라 정세 외의 가세가 이루어지고 점차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일종의 새로운 세제로서 일정한 진보적 의의를 갖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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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
− | * <<중국통사>>, 범문란, | + |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 |
+ | [[분류:당나라| ]] |
2016년 6월 27일 (월) 16:32 기준 최신판
개요
당은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후부터 전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정부의 양병, 용병의 비용이 크게 늘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지출은 매우 궁핍하게 되어 때로는 백관의 봉록도 정상적으로 지급할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재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정부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몇 가지 고육지책으로 초미의 화급함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염철사·탁지사·청묘사·조용사 등 여러 사직(使職)을 파견하여 백성에 대한 통제와 수탈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종 명목의 번잡한 신세(新稅)를 증설했다. 호등에 따라 징수하던 호세(戶稅)나 토지의 크기에 따라 징수하던 지세 외에도 정액 외의 지세에 가징하던 청묘전, 상업교역에서 일정한 액수를 징수하던 상세, 자산의 크기에 따라 일률적으로 5분의 1을 납부해야 했던 율대와 차상, 가옥의 칸수에 따라 징수하던 간가세(間架稅) 등이 있었다. 게다가 가렴주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백저(白著)는 정부가 세금 외에 강제로 징수하던 세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법은 당 왕조가 번진을 제압하는데 실패하자 백성들의 원성만을 사는 결과를 만들어 백성들이 폭동과 기의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재정 수지를 정비하기 위해서 당 왕조는 대종 때부터 덕종 시기를 전후해 대신 유안과 양염을 기용하여 재정 확보와 세제 개혁의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대체로 당 왕조의 재정 수입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시행 배경
당대 전기에는 조용조법이 실행되었다. 그러나 개원 사기 이래로 토지 소유 관계는 큰 변화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토지의 극렬한 겸병에 의하여 전토의 주인이 바뀌거나, 인정이 도망시켜나 사망하여 원래의 호구 장정상의 등기 숫자와 다르거나, 민간에 빈부의 변화가 이루어져 원래의 호등이 신빙성을 잃게 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에 더욱 심해졌다. 장기간의 전란은 농민의 부역 부담을 전례 없이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정부의 백역병작과 명목이 번잡한 가렴 징수로 민호의 소멸과 생산의 황폐라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귀족 관료, 부상 대가, 환관, 학사 및 사찰의 승려, 도사 등은 각종의 특권과 편법을 통하여 부역을 기피하였다. 빈호는 토지를 상실한 반면 부세는 증가하여 생계에 시달린 나머지 대지주의 전호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다. 토지 관계의 극렬한 변화는 호등·인정으로 부세를 징수하던 조용조제를 다시 유지할 수 없게 하였다.
세수입의 내원을 확보하고 각 계층의 백성이 모두 비교적 합리적으로 부세를 부담케 하기 위해서 780년 재상 양염이 재정한 양세법이 드디어 반포되었다.
양세법의 내용
양세법은 호세와 지세를 세수입의 주요 내용으로 하여 여름과 가을 두 번에 나누어 징수하는 신세법이었다. 그 구체적 내용을 보면 몇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양출제입(量出制入): 지출할 경비에 따라 세입을 정함. 정부는 779년 각지에서 보고한 재정수입과 중앙 재정 지출의 실수액을 근거로 총 예산을 세우고, 다시 예산에 근거하여 각 주·현에 배정할 액수를 확정하였다.
- 새로운 징세대상을 확정한다. 전국의 백성을 주호와 객호로 나누지 않고, 원적이 어디든지 모두 현재 거주한 지역에 호적을 등기해야 했다. 인호는 정남 혹은 중남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토지와 재산에 따라서 납세의 등급을 메겼다.
- 고정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행상도 모두 소재한 지역의 주·현에 등재하고 30분의 1의 자산세를 납부한다
- 전무세(田畝稅)는 양세법이 반포되기 1년 전(779년)의 각지 개간전의 숫자를 표준으로 하여 균평하게 징수한다.
- 이전의 조용조와 일체의 가연잡세를 폐지한다. 징세 시기는 여름과 가을 양 시기로 통일하여 징수한다. 하세는 6월을 넘지 않고 추세는 11월을 넘지 않게 일률적으로 납부를 해야 한다.
양세법의 의의
양세법의 시행은 역사상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우선 이것은 조용조와 각종 가연잡세를 합병하여 일종의 간편한 통일세제를 확립함으로써, 조정은 세정의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관리들은 마음대로 명목을 세워 가렴주구를 행할 수 없게 되어 국가 부세수입의 상대적 안정을 가져왔고 생산의 회복과 발전에도 유리하였다.
다음으로 양세법은 재산과 토지로서 호등을 확정하여 세를 거두었으므로 자산의 다소에 따라 세금도 달랐다. 이처럼 정부 관리와 부상 대가에 상관없이 모두 새로운 세제에 따라 납세하였으므로, 일정한 정도 내에서 부세가 빈궁한 농민에게 집중되어 있던 불합리한 현상을 변화시켜 납세의 대상을 확대했다.
또한 양세법의 주요 항목은 지세와 호세로, 지세는 쌀과 보리를 납부하고 호세는 호등의 고저에 따라 세액을 정하여 조용조제의 “정부(丁夫)로 근본을 삼는” 것이 아니라 “자산으로 주종을 삼게” 되었다. 납세의 다소와 인정의 다소는 이미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졌는데 이는 봉건세제 발전 형태의 새로운 형태이고 국가의 농민에 대한 인식적 지배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인정의 역역(力役)을 위주로 하던 부세제도는 토지 실물을 위주로 하는 부세제도로 변화하였고 이후의 세제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양세법의 시행은 당 후기의 대지주 토지소유제와 상품경제의 발전을 반영하였고, 실행의 목적은 주로 국가의 재정 곤란을 해결하고 세수입의 안정과 재원의 확대에 착안하고 있었다. 이후 당 왕조의 부패에 따라 정세 외의 가세가 이루어지고 점차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일종의 새로운 세제로서 일정한 진보적 의의를 갖고 있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중국사>>, 박한제 외 3인, 사계절 출판사
- <<중국통사>>, 범문란, 우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