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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4일 (토) 13:42 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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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px|alt=]] | |
출생 |
1910.10.2 일본 나가노현 미나미사쿠 군 |
사망 |
1977.3.3 |
주요 작품 | 근대적 초극, 루쉰,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등등 |
관련 활동 | 중국학자, 문학평론가 |
“ ” — <근대의 초극>
목차
개요
일본 나가노 현(長野県)에서 태어난 중국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구제(舊制) 오사카 고교(大阪高校)를 졸업해 1931년에 도쿄 제국 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의 지나문학과(支那文学科)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앞둔 1934년 3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고, 1935년부터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간행하며 본격적인 중국문학 연구의 초석을 다진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중국의 베이징(北京)에서 유학한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闘争) 당시 안보 개정안 강행 처리에 항의하여, 당시 몸담고 있던 도쿄 도립대학 인문학부 교수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뒤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고, 만년에는 루쉰(魯迅)의 문학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생애
다케우치 요시미는 1910년 10월 2일 일본 나가노 현 미나미사쿠 군 우스다마치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지나(支那)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2년 8월, 외무성의 지나문화사업부에서 주관한 “조선 만주견학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조선 각지를 거쳐 창춘까지 간 후, 베이징에서 사비로 잠깐 머문 뒤 2개월 후인 10월에 귀국하였다. 34년 3월에 졸업 논문 『위다푸(郁達夫) 연구』를 발표하며 대학 과정을 마친다. 남만주철도에 취직을 기대했던 적이 있지만, 7월 2일 정식으로 거절당했다.
이듬해 3월 1일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오카자키 토시오(岡崎俊夫), 마쓰다 쇼(增田涉), 마쓰에다 시게오(松枝茂夫)등과 함께 중국문학연구회(中國文學硏究會)를 결성하였다. 모임을 이어 오면서 중국문학연구회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4일 도쿄 히비야에서 저우쭤런(周作人)의 환영회를 개최했을 당시부터였다고 전해진다. 35년에는 모임의 기관지로서 『중국문학월보(中國文學月報)』를 창간했다. 그는 『중국문학월보』제 20호 <루쉰 특집 호>를 편집하기 위해 루쉰의 『고함(吶喊)』, 『화개집(華蓋集)』 등의 작품을 읽고 감상으로 「루쉰론」을 썼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루쉰론이기도 하며, 그의 루쉰 이해의 원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문학월보는 후에 『중국문학(中國文學)』으로 개칭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당시 팽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연구회의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자, 1943년 연구회를 해산하고 기관지(당시 192호까지 창간됨)도 폐간했다.
37년 10월, 다케우치 요시미는 외무성 문화 사업부의 보조를 받기로 한 뒤, 2년간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으로 출발한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41년 5월부터 『루쉰』 집필을 시작하였고, 2년 뒤 12월에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후베이성에 파견되었다. 이때 다케우치 요시미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필을 마친 『루쉰』 원고를 다케다 다이쥰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쥰의 발문과 함께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 49년 3월부터 게이오대학의 문학부에 시간강사, 도쿄도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는데, 60년 5월 안보투쟁에 참여해 미일안전보장개정조약에 반대를 표하는 과정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한다. 전후에는 주로 루쉰 작품의 번역, 평론과 일본문화에 관한 평론, 논문 등을 썼다. 일본 공산당을 비판, 국민문학논쟁, 안보조약변경 반대 운동 등에 참가하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식도암에 의해 1977년 3월 3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루쉰
1943년 12월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소집 명령을 받고 일개 병사로서 중국에 종군했다. 이때 유언의 심정으로 쓴 『루쉰』의 원고를 다케다 다이준에게 맡겼다. 원고는 다케다 다이준의 발문을 붙여서 1944년 12월에 『동양사상총서』의 한 권으로 일본평론사에서 간행되었다.『루쉰』의 본문은 루쉰의 죽음과 삶에 관해 사실에 근거한 접근을 시작으로 루쉰의 전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을 되짚고 그의 사상과 작품, 그리고 5장에서는 루쉰이 생각하는 문학과 정치의 관계, 나아가서는 계몽가, 혁명가로서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살펴보면서 루쉰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루쉰』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다케우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근대와는 달리 '근대의 추구'와 '근대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풀고 출발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양은 서구의 근대주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서양 근대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노력 역시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 또는 새로운 근대의 창출을 목표로 했던 다케우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쉰을 그 가능성의 근간으로 삼아서 연구하였다. 그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루쉰』 인 것이다.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경대 졸업 이후 ‘중국 문학 연구회’로 활동할 당시 불거졌던 지나학에 대한 논쟁에 있다. 지나학은 기존의 구(舊)한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학문으로 학술연구의 객관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고전을 실증적 태도로 재해석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는 지나학이 구한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에서의 유리, 삶에 대한 열정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책상머리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상을 낳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논쟁에서 ‘현실의 혼탁함을 직시’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당대 일본의 역사성과 상황성에 개입하라는 요구였다.[1] 이 책의 주 내용은 ‘일본의 근대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동양의 근대화는 서구의 침입에 의해 자신들이 ‘비서양’ 즉, ‘동양’이라는 자각을 함으로써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근대화의 우등생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근대적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초극이란 1942년까지의 논의(좌담회, 문학계에 집필된 『근대적 초극』을 뜻함)을 뜻한다. 즉, 근대적 초극이란 일반적으로 성전의식에 기조가 되는 말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 지배하의 총력전에 협력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근대적 초극’과 같은 전쟁에 관련된 단어 사용을 금기시 했다. 따라서 『근대적 초극』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적 초극’이라는 단어에서 서양에 대립하는 동양의 저항이라는 사상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즉,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러한 부정적 근대적 초극의 의미에서 ‘일본주의, 아시아 주의를 통해서 서양에 대립하자’라는 좋은 사상만을 취하자고 주장했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저항
아시아적 원리로 서구 문명을 부정하여 새로운 문명을 수립하고자 하는 글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당시 서양의 근대화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양의 모순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여기서 장점만을 취해서 현재보다 더 발전한 동양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가 생각하는 롤모델은 중국이었다.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중국은 계속해서 서양에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서양을 따라 가기만 하는 전향적 모습을 보여주기만 한다. 따라서 일본 또한 중국의 모습을 본받아 서양에 저항하고, 서양과 다른 새로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되감기
서양 또한 자신들이 이룩한 근대화의 모순을 느끼고 이를 동양적인 가치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인다.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되감기이다. 이에 다케우치 요시미는 '동양의 힘이 서양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서양을 변혁합니다.' 라고 표현했다.
다케우치 요시미 문학의 특징
挣扎적태도
다케우치 요시미는 挣扎를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 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즉, 해석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고뇌와 마주하게 하는 매체’라고 말하였다. 대립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모순적인 사물의 양극을 주체 속에 두고서 주체의 부정적 개입을 통해 새로운 주체적 정신을 기르는 것. 이 과정에서 부단히 자기를 갱신하고 자기를 창조하는 것. 즉, 상대방에게 저항과 수용을 동시에 함으로써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시로 중국을 일본의 상대로 두고 이 둘을 비교하며 자신에 대해 단점을 고뇌하며 중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일본을 설립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挣扎적태도를 취할때에는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보면 안된다. 즉, 挣扎적태도를 취할 때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관성이 개입이 된다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화중취율의 자세를 견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 파시스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찾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분명 이들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보았을 때 단점이 많다. 하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파시스트의 사상 속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속에서 장점만을 취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가와 비판
전쟁과 관련된 기억은 되도록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린 전후 일본사회의 풍토에서 ‘근대의 초극’은 잊혀져야 할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근대의 초극’ 박멸론이 우세 하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근대적 초극』을 발표하여 ‘근대의 초극’에 대한 재 평가를 요구한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초극론자’라는 수식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적 초극』의 내용을 보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근대의 초극’ 논의를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초극의 재평가가 아닌 근대 일본의 ‘사상’의 형성과 관련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초극’은 일본 근대의 문제가 집중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이고 이것 과 진정하게 부딪혀 보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결국 일본 ‘사상’ 전통 의 수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자세 자체가 바로 일본 근대 의 가장 큰 폐단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근대의 초극’이란 부정적인 유산 속에서 ‘사상’의 계기를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에서 그의 ‘화중취율(火中取栗)’의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언어적 의미에서 ‘초극론자’ 또는 ‘반근대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다케우치가 ‘근대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의 ‘근대’에 대한 인식도 원칙적으로는 ‘근대주의’ 또는 ‘역사주의’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보면 그의 시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이해하고, 서구 근대 발전론의 시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과 후진을 대립시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그는 분명 ‘근대주의자’다. 하지만 동양과 아시아주의를 말하고 있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또 ‘반근대주의자’다. 이와 관련해 사카이 나오키(酒井 直樹)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다케우치요시미는 근대를 긍정적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한 비판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 비판은 그의 이러한 저항관에 유래하고 있다.이 저항관이야말로 근대를 초극하는 가능성을 단순히 믿었던 자와 다케우치를 확실히 구별해주는 것이다. 근대주의에 깊이 침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대한 유효한 비판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케우치가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루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이와 같이 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근대라는 말이 환기하는 불확실한 느낌은 이러한 저항이 점차 산종(散種)해가는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루쉰 속에서 보았던 것에 강하게 이끌려 대면했을 때 ‘유희(戯れ)’라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아시아와 관련된 글 중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침략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침략에는 연대감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전하기까지 하다’ ‘나는 무능한 사회주의자보다 유능한 파시스트를 유산으로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와 같은 구절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는 만들어졌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변모했다.’ 라고 시작되는 대동아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과거도 있다. 이 구절들을 보면 그는 극우주의라고 여겨진다. 이에 당시 일본 사회는 그를 ‘우익적인 아시아주의가 표면에 흘러 넘친다.’고 표현했고, 함동주씨는 이를 ‘아시아주의를 연대 의식 위주로 고찰하여 긍정적인 면을 밝히는 데 집착한 결과 아시아주의에 내재된 침략 이데올로기로서의 면모를 축소 해석했다. ‘고 평가했다. 이에 반하여, 이것은 그의 사유방식에서 오는 오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쑨거는 그의 많은시국판단의 착오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이 정확한가에 대해 질문하고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지식인과 달리 다케우치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역사로 진입하는가의 문제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에서 이를 옹호한 것은 대동아 전쟁을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여 서방에 도전한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동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작품 목록
- 아래 표는 노신의 작품들 중 중문과 수업에서 다루었던 작품들만 따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노신 작품목록은 추가예정
제목 | 특징 | 수업과의 연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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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 1944년 출판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 | 1948년 출판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근대적 초극 | 1959년 출판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 1961년 출판 | 인물로보는근현대중국사회 |
참고자료
1)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저
2) <근대의 초극> 다케우치 요시미 저
3) 타케우치_요시미(竹內好)가_지핀_‘루쉰’(魯迅)이란_불.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