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운동"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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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배경=== | ||
5·4운동의 근원은 1898년 산둥 성의 자오저우 만을 독일이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에서 비롯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은 중립국이었는데,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한 뒤 자오저우 만에서 독일군을 축출해내고 산둥성 지역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일본은 이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21개 조항에 이 내용을 추가했다. 또한 자신들의 점령을 다른 열강들로 인정을 받기 위해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일본은 각 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지위를 지지하고, 각 국들도 산둥 성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조약들이었다. 또한 미국은 “영토가 근접한 국가 간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 역시 사실상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 5·4운동의 근원은 1898년 산둥 성의 자오저우 만을 독일이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에서 비롯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은 중립국이었는데,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한 뒤 자오저우 만에서 독일군을 축출해내고 산둥성 지역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일본은 이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21개 조항에 이 내용을 추가했다. 또한 자신들의 점령을 다른 열강들로 인정을 받기 위해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일본은 각 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지위를 지지하고, 각 국들도 산둥 성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조약들이었다. 또한 미국은 “영토가 근접한 국가 간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 역시 사실상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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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또한 1918년 9월의 베이징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비밀 협정으로, 일본은 중국 군벌정부에게 20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철도 2개를 부설하며 각 요새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 철도 경찰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일본은 산둥을 지켜낸다면, 중국은 사실상 21개 조항과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조약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 |
− | + | 베이징 정부 및 쑨원의 광저우 정부의 인원들로 구성된 중국 대표단은 민주, 자결, 약자를 보호하는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되는 베르사유의 회의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기대를 품고 산둥의 수복을 모색하고 불평등 조약을 철저히 폐지할 것을 목표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화회의는 걀코 이전의 모든 국제간의 분규를 조정하기 위하여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종결 후에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산둥 문제만을 의사일정표에 넣을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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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대표단은 산둥은 1917년 중국의 참전으로 독일과의 모든 조약을 폐지했을 때부터, 일본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국회의 비준을 얻은 적이 없기 때문에 21개 조항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참전 후에 중국의 지위는 매우 크게 변화하여 중립국에서 교전국으로 바뀌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바로 국제법의 정세불변의 원칙을 인용하여 21개 조항을 폐지할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용히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협정을 공개했고, 참전이후에도 중국은 산동문제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하여 결국 산둥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협상국들은 이미 일본과의 비밀협정 때문에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고, 윌슨만이 중국의 유일한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표단은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운 회의의 정세를 바꿀 수 없었고, 결국 1919년 4월, 강회회의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여 산둥 문제를 판정했다. | ||
===전개=== | ===전개=== | ||
− | + | 파리의 소식이 베이징에 전달되었을 때, 윌슨의 이상주의 신조에 대한 신뢰는 산산조각났다. 학생들은 윌슨의 배반행위에 격분하여 피로써 산둥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 해 5월 4일, 해외에서 귀국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베이징에서 모여서 민족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의 결과로 전문을 보내 대표단의 결정에 항의하기로 결정했고, 파리의 중국 대표단에게 수천통의 전보가 전달되었다. 그 전문들은 조약을 거절하고 만약에 그렇지 아니할 경우 그들을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들은 한바탕 시위를 일으켰는데, 베이징의 13개 대학과 전문대학의 학생들이 참가해 그 인원이 금방 5000명이 됐다. 그들은 매국노 차오루린을 처형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해서 그의 집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경찰들은 늑장을 부려 대다수의 시위자들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오직 10명만 체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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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만 이 체포사건은 오히려 도화선이 되었고, 베이징 학생들은 전면적인 수업거부와 베이징 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사임을 주장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런 운동의 움직임이 주요 도시의 학생들에게 확산되는 가운데, 전국의 상점 주인, 공장 노동자와 상업기구의 고용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사람들은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일본의 증기선을 타는 것, 일제 물건을 하역하는 것을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상공업은 황금시기를 맞아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기업과 공업이 발전했고, 그들은 상인계층과 지식인 계층을 육성에 힘썼다. 왜냐하면 구시대의 농민들과 달리, 기업과 공업은 중국이라는 국가적인 시스템이 무너지면 유지될 수 없어서 국가이익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시위가 상인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중국의 당시 맥락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학생 시위의 결과로 학생들은 다시 풀려나게 됐다.이후 2개월 동안 시위는 지속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5·4운동의 모습이다. | ||
===성격=== | ===성격=== | ||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5·4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적인 상황은 대외적으론 제국주의(특히 일본)의 침략이 활발했고, 대내적으로도 베이징 정부가 국가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정도로 무능력한 정부의 부패가 심각했다.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5·4운동은 당연히 반봉건·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5·4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적인 상황은 대외적으론 제국주의(특히 일본)의 침략이 활발했고, 대내적으로도 베이징 정부가 국가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정도로 무능력한 정부의 부패가 심각했다.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5·4운동은 당연히 반봉건·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 ||
− | + | 또한 세계의 피지배 국가들에게 하나의 신조가 되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5·4운동은 중국의 민족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5·4운동은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이 결합되어 나타난 반봉건적·반제국주의적·저항적 민족주의의 형태였다. | |
− | + | 동시에 주도 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학생들로부터 발생한 학생운동이다. 하지만 학생에서 시작한 시위는 노동계와 상공계에까지 확산되어 전국민적, 전국적으로 일어난 자발적 운동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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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화운동의 맥락에서의 5·4 운동== | ||
+ | 5·4운동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논의가 이어져 왔는데, 그 논의들의 주요 특징은 5·4운동을 그 이전 북경대학과 『新靑年』, 『新潮』 등을 중심으로 전개돼 온 변화운동과 연계하여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논의들은 5·4운동이 “신문화 운동”이나 “르네상스” 혹은 “계몽주의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성격의 5·4운동 전후의 변화운동들과 5·4운동을 함께 어울러서 “5·4신문화 운동”이라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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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신문화 운동은 진독수를 중심으로 한 잡지인 『新靑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신청년에서의 문명관이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신구라는 이원적 구조에 기초해 있다. 이 신구 구조는 신해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나왔다. 지식인들은 신해혁명의 실패의 원인이 정치제도와 문화의 괴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이 제대로 된 근대화를 하려면 합당한 정치와 문화를 건설하여 둘 사이의 비조응을 해결하는 것이 5·4신문화 지식인들의 목표였다. 이에 진독수는 정치와 문화의 비조응의 원인은 문화의 후진성에 있다고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문명을 극복대상으로 설정하고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창했다. 김수연, 위의 논문, pp.35-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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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들을 통틀어 극복해야 할 구舊라고 하였고, 과학적 합리주의(賽先生)와 민주주의(德先生)를 바탕으로 한 서양적인 것들을 신新이라고 하여, 구를 타도하고 신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목표는 혁명이나 정치적 투쟁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계몽을 통한 사회변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주로 계몽적·교육적·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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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타도·신추구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후스이다. 후스를 중심으로 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구 타도는 크게 두 가지 형태였는데 하나는 바로 우상 파괴이다. 특히, 그들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여러 전통들을 파괴에 초점을 두어 전통의 굴레에 속박된 개인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에 힘썼다. 후스는 공가점이라는 유가에 대한 모욕적인 어휘를 만들었고, ‘공가점을 타도하라‘를 외치면서 격렬히 유교를 탄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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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타도의 또 한 가지의 중요한 형태는 바로 백화문 사용이었다. 이것은 후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 글쓰기가 중시한 것은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라고 질책했고, 문어문은 생기라고는 전혀 없으며 이론 종류의 죽은 언어는 활력 있는 문학을 탄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어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보수적인 지식인들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백화문을 사용한 글쓰기를 주장하고, 스스로 분명하고 활력이 넘치는 문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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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외에도 5·4신문화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덕선생이라고 부르며,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것과 같은 서양식의 사고를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지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계몽운동을 펼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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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4 신문화 운동 시기의 초중반까지는 이렇게 전반적인 서양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와 5·4운동을 겪으면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토록 신봉하고 믿었던 서양세계가 중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양 제국주의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전향했고, 신청년을 대표로 하는 여러 잡지들도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5·4 신문화 운동은 후반부에 점차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기 시작했는데, 이 여파는 매우 강해서 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
2015년 12월 29일 (화) 10:02 판
5·4운동이란?
배경
5·4운동의 근원은 1898년 산둥 성의 자오저우 만을 독일이 해군기지로 조차한 것에서 비롯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은 중립국이었는데, 일본은 연합국에 가담한 뒤 자오저우 만에서 독일군을 축출해내고 산둥성 지역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일본은 이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해서 21개 조항에 이 내용을 추가했다. 또한 자신들의 점령을 다른 열강들로 인정을 받기 위해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일본은 각 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지위를 지지하고, 각 국들도 산둥 성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조약들이었다. 또한 미국은 “영토가 근접한 국가 간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 역시 사실상 일본의 지위를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1918년 9월의 베이징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비밀 협정으로, 일본은 중국 군벌정부에게 20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철도 2개를 부설하며 각 요새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 철도 경찰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일본은 산둥을 지켜낸다면, 중국은 사실상 21개 조항과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조약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베이징 정부 및 쑨원의 광저우 정부의 인원들로 구성된 중국 대표단은 민주, 자결, 약자를 보호하는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되는 베르사유의 회의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기대를 품고 산둥의 수복을 모색하고 불평등 조약을 철저히 폐지할 것을 목표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화회의는 걀코 이전의 모든 국제간의 분규를 조정하기 위하여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종결 후에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산둥 문제만을 의사일정표에 넣을 수 있었다.
중국 대표단은 산둥은 1917년 중국의 참전으로 독일과의 모든 조약을 폐지했을 때부터, 일본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국회의 비준을 얻은 적이 없기 때문에 21개 조항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참전 후에 중국의 지위는 매우 크게 변화하여 중립국에서 교전국으로 바뀌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바로 국제법의 정세불변의 원칙을 인용하여 21개 조항을 폐지할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용히 베이징 정부와의 비밀협정을 공개했고, 참전이후에도 중국은 산동문제에 대해 “흔쾌히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하여 결국 산둥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협상국들은 이미 일본과의 비밀협정 때문에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고, 윌슨만이 중국의 유일한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대표단은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운 회의의 정세를 바꿀 수 없었고, 결국 1919년 4월, 강회회의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여 산둥 문제를 판정했다.
전개
파리의 소식이 베이징에 전달되었을 때, 윌슨의 이상주의 신조에 대한 신뢰는 산산조각났다. 학생들은 윌슨의 배반행위에 격분하여 피로써 산둥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 해 5월 4일, 해외에서 귀국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베이징에서 모여서 민족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의 결과로 전문을 보내 대표단의 결정에 항의하기로 결정했고, 파리의 중국 대표단에게 수천통의 전보가 전달되었다. 그 전문들은 조약을 거절하고 만약에 그렇지 아니할 경우 그들을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들은 한바탕 시위를 일으켰는데, 베이징의 13개 대학과 전문대학의 학생들이 참가해 그 인원이 금방 5000명이 됐다. 그들은 매국노 차오루린을 처형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해서 그의 집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경찰들은 늑장을 부려 대다수의 시위자들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오직 10명만 체포했다.
하지만 이 체포사건은 오히려 도화선이 되었고, 베이징 학생들은 전면적인 수업거부와 베이징 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사임을 주장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이런 운동의 움직임이 주요 도시의 학생들에게 확산되는 가운데, 전국의 상점 주인, 공장 노동자와 상업기구의 고용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사람들은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일본의 증기선을 타는 것, 일제 물건을 하역하는 것을 거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상공업은 황금시기를 맞아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기업과 공업이 발전했고, 그들은 상인계층과 지식인 계층을 육성에 힘썼다. 왜냐하면 구시대의 농민들과 달리, 기업과 공업은 중국이라는 국가적인 시스템이 무너지면 유지될 수 없어서 국가이익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시위가 상인에게까지 확산된 것은 중국의 당시 맥락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학생 시위의 결과로 학생들은 다시 풀려나게 됐다.이후 2개월 동안 시위는 지속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5·4운동의 모습이다.
성격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5·4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적인 상황은 대외적으론 제국주의(특히 일본)의 침략이 활발했고, 대내적으로도 베이징 정부가 국가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정도로 무능력한 정부의 부패가 심각했다.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5·4운동은 당연히 반봉건·반제국주의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세계의 피지배 국가들에게 하나의 신조가 되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5·4운동은 중국의 민족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5·4운동은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이 결합되어 나타난 반봉건적·반제국주의적·저항적 민족주의의 형태였다. 동시에 주도 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학생들로부터 발생한 학생운동이다. 하지만 학생에서 시작한 시위는 노동계와 상공계에까지 확산되어 전국민적, 전국적으로 일어난 자발적 운동이었다.
신문화운동의 맥락에서의 5·4 운동
5·4운동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논의가 이어져 왔는데, 그 논의들의 주요 특징은 5·4운동을 그 이전 북경대학과 『新靑年』, 『新潮』 등을 중심으로 전개돼 온 변화운동과 연계하여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논의들은 5·4운동이 “신문화 운동”이나 “르네상스” 혹은 “계몽주의적 운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러한 성격의 5·4운동 전후의 변화운동들과 5·4운동을 함께 어울러서 “5·4신문화 운동”이라고 하겠다.
5·4신문화 운동은 진독수를 중심으로 한 잡지인 『新靑年』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신청년에서의 문명관이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신구라는 이원적 구조에 기초해 있다. 이 신구 구조는 신해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나왔다. 지식인들은 신해혁명의 실패의 원인이 정치제도와 문화의 괴리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이 제대로 된 근대화를 하려면 합당한 정치와 문화를 건설하여 둘 사이의 비조응을 해결하는 것이 5·4신문화 지식인들의 목표였다. 이에 진독수는 정치와 문화의 비조응의 원인은 문화의 후진성에 있다고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문명을 극복대상으로 설정하고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창했다. 김수연, 위의 논문, pp.35-37.
즉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들을 통틀어 극복해야 할 구舊라고 하였고, 과학적 합리주의(賽先生)와 민주주의(德先生)를 바탕으로 한 서양적인 것들을 신新이라고 하여, 구를 타도하고 신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목표는 혁명이나 정치적 투쟁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계몽을 통한 사회변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주로 계몽적·교육적·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구타도·신추구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후스이다. 후스를 중심으로 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구 타도는 크게 두 가지 형태였는데 하나는 바로 우상 파괴이다. 특히, 그들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여러 전통들을 파괴에 초점을 두어 전통의 굴레에 속박된 개인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에 힘썼다. 후스는 공가점이라는 유가에 대한 모욕적인 어휘를 만들었고, ‘공가점을 타도하라‘를 외치면서 격렬히 유교를 탄압했다.
구타도의 또 한 가지의 중요한 형태는 바로 백화문 사용이었다. 이것은 후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 글쓰기가 중시한 것은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라고 질책했고, 문어문은 생기라고는 전혀 없으며 이론 종류의 죽은 언어는 활력 있는 문학을 탄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어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보수적인 지식인들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백화문을 사용한 글쓰기를 주장하고, 스스로 분명하고 활력이 넘치는 문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5·4신문화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덕선생이라고 부르며,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것과 같은 서양식의 사고를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지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계몽운동을 펼쳤다.
5·4 신문화 운동 시기의 초중반까지는 이렇게 전반적인 서양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와 5·4운동을 겪으면서 5·4 신문화 지식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토록 신봉하고 믿었던 서양세계가 중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양 제국주의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전향했고, 신청년을 대표로 하는 여러 잡지들도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5·4 신문화 운동은 후반부에 점차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기 시작했는데, 이 여파는 매우 강해서 공산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