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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유학이 漢을 통치하는 유일의 절대적인 사상이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제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으며, 이때 받아들인 유학은 원류의 [[유학]]이라기보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변형된 유학([[공양학]])이라고 할 수 있다. | ||
+ | 이외에도 하늘(天)과의 대화를 위해 통천대(通天臺)를 건축했는데, 이는 [[도가]]의 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또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인해 바닥난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공근(孔僅), [[상홍양]]과 같은 상인출신을 기용했는데, 이것은 [[법가]]와 관련된 것이다. 또 [[문경지치]] 동안에 성장한 [[호족]]에 대해서는, [[혹리]]를 파견하여 혹독한 법에 의거해 그들을 탄압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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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는 통치 만년에 신선사상에 빠져 미신과 사치에 몰두했다. [[무고의 난]]이 발생해 위태자가 황제의 명령으로 자결했고 위황후도 자살하였다. 그 후 이들의 무죄가 밝혀지고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다가 B.C.87년 사망하였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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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5일 (일) 16:13 판
재위기간 B.C.141-B.C.87
무제는 경제 사후 16세의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5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이루었고 유가사상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제국을 통치하는데 이용하였다.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펴 흉노를 사북으로 몰아내고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실크로드의 길을 열었다. 흉노뿐만 아니라 동, 서, 남의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진시황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장악하였다. 무리한 군사 정책으로 문제와 경제의 치세동안 쌓았던 재정이 고갈되어가자 염철전매와 같은 재정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연호의 제정
무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하였다. 이전까지 중국에는 연호가 없고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하였다. 諸侯國도 자신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연대를 계산할 수 있었다.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높일뿐더러 연호가 한의 권력을 인정하는 주변국가에서도 사용됨으로써 한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역법의 개정
왕조가 바뀌면 역법이 바뀌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전통에 따라 역법개정은 한 초의 오랜 숙원이었다. 무제는 공손홍, 사마천 과 민간의 治歷者 20여인, 그리고 일부 방사들을 참여시켜 太初歷을 만들었다. (태초력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친 것이다.) 달력을 만드는 것은 황제의 특권이었고, 황제가 내려준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의 주변국은 황제의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정삭(正朔)이라고 하였다. [1]
제후국에 대한 정책
무제는 경제 때 오초칠국의 난 평정 이후 이루어진 제후국에 대한 견제 및 권력 약화 정책을 추은령으로 제도화하였다. 추은령(推恩令)은 제후왕의 사망 시에 적장자외의 아들들에게도 봉지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列侯로 삼아 중앙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郡에 속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제후국은 점차로 쪼개어져 그 권력이 와해되었다.
추은령 뿐만 아니라 제후국이 종묘에 제사지낼 때 바치는 금이 부족하거나 그 성분이 나쁘면 작위를 취소하는 주금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책들로 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완전히 와해시켰고 이로써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밑바탕을 마련하였다.
관료계급의 형성
선대의 공에 의해 공신으로서 권력과 지위를 누리지만 실질적인 공도 능력도 없으며 황노사상에 빠져 변화를 거부하는 공신집단으로는 漢의 발전은 요원했다. 그래서 무제는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하면서 자신을 보좌할 새로운 관료집단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무제는 선거제도(選擧制度)를 실시하였다. 동중서는 황제에게 孝行, 德行, 廉恥에 기준한 인재 선발을 건의하였고 이에 무제는 郡國에 孝廉 1명씩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선발된 자들은 지방과 중앙의 관료로서 행정을 책임졌고, 백성의 교화에도 힘썼다.
정치제도의 변화
무제는 자신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사를 돌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시종과 수행원을 크게 늘였다. 궁실 경비와 황제의 신변호위를 담당하고 있는 광록훈에 문학적 소양을 갖춘 낭관을 많이 확보하였다. 그리고 관료들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견지법을 실시하였다. (무제 재위기간에 승상(丞相) 7인 가운데 5인, 어사대부(御使大夫) 9인 가운데 4인이 거의 모두가 사소한 죄목으로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러한 대신의 사사(賜死)는 진시황의 혹독했던 법치 이상이었다.[2])
황권을 위한 다양한 사상의 활용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유학이 漢을 통치하는 유일의 절대적인 사상이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제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으며, 이때 받아들인 유학은 원류의 유학이라기보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변형된 유학(공양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하늘(天)과의 대화를 위해 통천대(通天臺)를 건축했는데, 이는 도가의 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또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인해 바닥난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공근(孔僅), 상홍양과 같은 상인출신을 기용했는데, 이것은 법가와 관련된 것이다. 또 문경지치 동안에 성장한 호족에 대해서는, 혹리를 파견하여 혹독한 법에 의거해 그들을 탄압했다.
말년의 정치
무제는 통치 만년에 신선사상에 빠져 미신과 사치에 몰두했다. 무고의 난이 발생해 위태자가 황제의 명령으로 자결했고 위황후도 자살하였다. 그 후 이들의 무죄가 밝혀지고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다가 B.C.87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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