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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의 세력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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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국가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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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의 북아시아 정세====
 
====기원전 3세기의 북아시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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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의 자리에 오른 묵특에게 흉노의 동방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동호가 시비를 걸어왔다. 동호 왕은 묵특에게 흉노와의 사이에 있던 구탈지의 할양을 요구했고 이에 노한 묵특은 전군에 호령하여 동호를 무찌르고 왕을 살해한 뒤 백성과 가축들을 빼앗았다. 그 후 묵특은 동호를 토멸한 힘에 편승하여 서방의 월지를 패주시키고,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오르도스 지역에 침입하여 그곳에 있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고 나아가 한나라의 영토에 있는 연과 대의 땅을 침입했다. 묵특이 북아시아 전토를 병합할 무렵, 유방 고조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조는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맹장 한왕 신을 대의 땅 지마읍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평소 흉노를 두려워하던 한왕 신은 고조의 흉노 토벌 명령을 어기고 화평의 길을 택했고, 결국 부장 왕황 등과 함께 흉노에 투항했다. 한왕 신의 투항으로, 마읍과 태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묵특은 한왕 신의 군사 지원을 얻어 40만 대군을 일으켰다. 고조의 부대는 묵특의 전략에 걸려 고립되어 백등산에서 7일 동안 굶주림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평성의 치’라고 부른다. 동호를 멸하고 한을 물리친 흉노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토벌함으로써 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묵특에 의한 월지 토벌은 월지족을 남북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묵특의 아들 노상 선우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한 월지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여 토벌하였다. 묵특과 노상의 2대에 걸친 월지 토벌에 의해 흉노는 ‘국가’발전을 위한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아버지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의 자리에 오른 묵특에게 흉노의 동방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동호가 시비를 걸어왔다. 동호 왕은 묵특에게 흉노와의 사이에 있던 구탈지의 할양을 요구했고 이에 노한 묵특은 전군에 호령하여 동호를 무찌르고 왕을 살해한 뒤 백성과 가축들을 빼앗았다. 그 후 묵특은 동호를 토멸한 힘에 편승하여 서방의 월지를 패주시키고,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오르도스 지역에 침입하여 그곳에 있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고 나아가 한나라의 영토에 있는 연과 대의 땅을 침입했다. 묵특이 북아시아 전토를 병합할 무렵, 유방 고조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조는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맹장 한왕 신을 대의 땅 지마읍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평소 흉노를 두려워하던 한왕 신은 고조의 흉노 토벌 명령을 어기고 화평의 길을 택했고, 결국 부장 왕황 등과 함께 흉노에 투항했다. 한왕 신의 투항으로, 마읍과 태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묵특은 한왕 신의 군사 지원을 얻어 40만 대군을 일으켰다. 고조의 부대는 묵특의 전략에 걸려 고립되어 백등산에서 7일 동안 굶주림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평성의 치’라고 부른다. 동호를 멸하고 한을 물리친 흉노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토벌함으로써 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묵특에 의한 월지 토벌은 월지족을 남북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묵특의 아들 노상 선우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한 월지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여 토벌하였다. 묵특과 노상의 2대에 걸친 월지 토벌에 의해 흉노는 ‘국가’발전을 위한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2016년 5월 15일 (일) 22:02 판

흉노의 역사

흉노의 등장

흉노는 몽골고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북아시아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다. 전국시대의 중국인은 흉노를 호(胡)라 총칭하였고 흉노보다 동쪽의 민족을 동호(東胡), 서쪽의 민족을 임호(林胡)라 부르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인은 북방의 이민족을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흉노의 동서에 있던 민족을 각각 동호와 임호라 칭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흉노와 그 외의 북방 이민족들을 서로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18년, 한·위·조·연·제의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을 공격했는데, 이때 흉노는 5개국 측에 호응하여 진과 싸웠다. 이 전쟁은 5개국 측의 참패로 끝났는데 흉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민족이 처음 기록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흉노는 비록 패주하여 북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지나 그 무렵부터 흉노의 이름이 중국 사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흉노의 이름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흉노인에 대한 기록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가에서 발견되었던 켄콜 분묘군은 흉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묘이다. 이 분묘군은 193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구소련의 고고학자 베른스탐에 의해 발굴·조사되었고, 지하식 횡혈묘(橫穴墓)로부터 합장되었던 남녀 2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그 땅에서 기원전 1세기에는 질지(郅支) 선우가 다스렸던 서흉노 일파가 정착하고 있었고, 기원후 1~2세기에는 북흉노의 일파가 정착하고 있었는데 켄콜 분묘군은 그중에서도 북흉노 일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른스탐의 연구와 켄콜 분묘에서 출토된 남자의 인골에 관한 연구에 의해 켄콜인의 가늘고 길게 뻗은 코뼈, 배 모양의 콧구멍, 낮은 코, 높고 둥근 눈구멍 등의 외면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외면적 특징을 근거로 한대의 흉노인의 원류를 몽골로이드계로 보고 있다.

흉노와 진시황

기원전 221년 진 왕정은 6국 중 최후에 남았던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하였다. 그 무렵 북방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는데, 흉노의 초대 선우인 두만(頭曼)이 출현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였다. 그리고 두만은 오르도스 지대에 진출하여 남쪽의 진에 대항하였다. 기원전 215년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병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치게 했다. 그 결과 진은 그때까지 흉노에 의해 점거되어 있던 오르도스 지역을 탈취하고 황하 유역에 4개의 현성을 쌓아서 둔전병을 설치했다. 그리고 진시황제는 북방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래의 연, 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이로 인해 흉노는 내몽골에서 쫓겨나고 외몽골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흉노 유목국가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3세기의 북아시아 정세

흉노의 세력 확장

아버지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의 자리에 오른 묵특에게 흉노의 동방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동호가 시비를 걸어왔다. 동호 왕은 묵특에게 흉노와의 사이에 있던 구탈지의 할양을 요구했고 이에 노한 묵특은 전군에 호령하여 동호를 무찌르고 왕을 살해한 뒤 백성과 가축들을 빼앗았다. 그 후 묵특은 동호를 토멸한 힘에 편승하여 서방의 월지를 패주시키고,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오르도스 지역에 침입하여 그곳에 있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고 나아가 한나라의 영토에 있는 연과 대의 땅을 침입했다. 묵특이 북아시아 전토를 병합할 무렵, 유방 고조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조는 흉노에 대비하기 위해 맹장 한왕 신을 대의 땅 지마읍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평소 흉노를 두려워하던 한왕 신은 고조의 흉노 토벌 명령을 어기고 화평의 길을 택했고, 결국 부장 왕황 등과 함께 흉노에 투항했다. 한왕 신의 투항으로, 마읍과 태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묵특은 한왕 신의 군사 지원을 얻어 40만 대군을 일으켰다. 고조의 부대는 묵특의 전략에 걸려 고립되어 백등산에서 7일 동안 굶주림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평성의 치’라고 부른다. 동호를 멸하고 한을 물리친 흉노는 기원전 176년에 월지를 토벌함으로써 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묵특에 의한 월지 토벌은 월지족을 남북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묵특의 아들 노상 선우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이동한 월지의 주력부대를 추격하여 토벌하였다. 묵특과 노상의 2대에 걸친 월지 토벌에 의해 흉노는 ‘국가’발전을 위한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흉노와 한의 공방

흉노의 문화

참고문헌

사와다 이사오, 『 흉노』, 아이필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