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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br> | ||
+ |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8』(일송북, 2005)<br> | ||
+ | 백양 저, 김영수 역,『맨얼굴의 중국사 3』(창해, 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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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수나라| ]] |
2016년 6월 21일 (화) 19:29 판
수 명황제 양광(隋 明皇帝 楊廣, 569년 ~ 618년 3월 11일)은 중국 수나라의 제 2대 황제이다. 수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의 차남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양견과 형 양용을 살해한 후 황제가 되었다. 수 양제의 폭정에 의해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618년 결국 강도에서 친위군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생애
수 양제의 폭정
양제는 제위에 오르자 동도의 건설과 대운하의 개설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운하의 개설과 동도 건설의 토목공사때문에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인공산의 축조와 이궁의 축조 공사, 몇 만 척에 달하는 용선의 건조, 만리장성의 축조 공사 등으로 수십만, 수백만의 인부가 동원되어 요역은 일종의 재난으로 화하였다. 이같은 요역에 이어 3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급기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대업 3년(607년)에는 양제가 갑주(甲胄)를 갖추고 50만의 군대와 말 1만 필을 거느리고 만리장성 이북 지역의 순행에 나서기도 했다. 순행용 궁전인 관풍행전(觀風行殿)과 경비의 임무를 담당할 성인 육합성(六合城)을 만들게 하는 등 순행 행차에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대규모 토목공사
양제는 즉위하던 해인 대업 원년(605년) 장안에서 낙양(동도)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동도 건설이라는 대규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궁전의 건축 공사와 때를 같이하여 운하의 굴착 사업도 시작되었다. 운하의 굴착이라 하지만 전혀 새로운 수로(水路)를 굴착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있었던 자연 하천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운하의 굴착은 물론 수왕조의 지배를 강화하고 황제의 향락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북간 경제 교류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수나라로서 필요했던 역사적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원정
양제는 제위기간동안 총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대업 7년(611년) 2월, 동원령을 내려 무장한 장병을 탁군으로 집결시켜 고구려 원정 준비에 착수하였고 1년 간의 준비를 거쳐 1차 원정에 나섰으나 참패하여 수나라 군사 30만 5천 명 가운데 겨우 2천 7백 명이 목숨을 보전하여 돌아갔다. 양제는 1차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하여 다음해 대업 9년(613년) 재차 고구려 원정을 강행하였다. 수나라의 원정군이 순조롭게 공격을 진행하여 고구려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으나 본국에서 양현감(楊玄感)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2차 고구려 원정도 중단되었다.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양제는 다음해인 대업 10년(614년)에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였고 3차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국력이 소진된 고구려 측에서 사자를 보내어 화해할 것을 칭하고 망명해있던 곡사정을 송환하는 것으로 양제는 고구려의 화해 요청을 받아들이고 군사를 철수했다.
양제의 최후
지속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징병을 기피하여 도망친 장정들이 반란군에 가세하면서, 전국 도처에서 반란의 기운이 거세졌다.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과 그밖의 일들로 국고도 텅 비어버렸다. 양제는 반란세력에 잔혹한 탄압을 가하였으나 대업 13년(617년)에는 수왕조의 지방관리, 장령들도 각 지방에서 할거하여 군웅 할거체제가 되었다. 양제는 혼란스러운 수나라에 대하여 신경쓰기보다는 유흥에 빠져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고, 결국 618년 우문화급에 의해 처형당한다.
주요행적
연도 | 사건 | 주 |
---|---|---|
604년 | 아버지 양견을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오름 낙양 교외에 긴 참호를 파고 초소를 설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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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년 | ①낙양을 확장하고 동도(東都)로 이름을 바꿈 ②낙양 서쪽에 서원(西苑)이란 정원을 만듦 ③배 수만 척을 만듦 ④제거(濟渠, 하남성 형양에서 강소성 회안에 이르는 운하)와 한구(邗溝,회안에서 강소성 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 ⑤낙양 남쪽 교외에 현인궁(顯仁宮)을 지음 ⑥낙양에서 용선(龍船)을 타고 강도(江都)로 유람함(1차 강도 유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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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년 | 강도에서 낙양으로 돌아옴 | |
607년 | ①태행산을 뚫어 낭자관을 설치하고, 산서성 태원에서 화북에 이르는 어도를 개통함 ②어양군에서 유림에 이르는 어도를 개통함 ③낙양에서 탁군(북경)으로 놀러갔다가 다시 유림을 지나 동돌궐의 계민극한의 왕정에 이르렀다가 태원을 거쳐 낙양으로 돌아옴 ④400만 명을 징발하여 유림에서 자하에 이르는 장성을 쌓음 ⑤태원에 진양궁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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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년 | ①영제거(하남성 수무에서 북경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함 ②관잠산(산서성 영무) 북쪽 경계에 분양궁을 세움 ③낙양을 나와 오원에 놀러가 장성을 순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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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년 | 낙양을 나와 장안으로 갔다가 호미천(청해성 문원), 장액(감숙성 장액)을 유람함 | |
610년 | ①낙양에서 용주를 타고 강도를 유람함(2차 강도 유람) ②강남하(강소성 진강에서 절강성 항주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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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년 | ①용주를 타고 강도에서 운하를 따라 북상하여 탁군에 놀러갔다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옴 ②고구려 왕국의 죄를 묻는다고 선포하고는 전국의 군사를 탁군에 집합시키고 전국의 양식을 요서군(요녕성 의현)에 집중시키게 함 |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함 |
612년 | 몸소 113만 3,800명을 거느리고 탁군을 출발하여 고구려 왕국을 공격함 요동성(요녕성 요양)을 포위했으나 대패하여 돌아옴(1차 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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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년 | 다시 전국의 병사들을 탁군에 집결하여 몸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왕국 정벌에 나섬 요동성을 포위했으나 역시 이기지 못함 대창 양현감이 여양(하남성 준현)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자 포위를 풀고 회군하여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함(2차 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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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년 | 다시 용선을 타고 탁군으로 가서 고구려 왕국 공격에 나섬 전국에서 일어난 민란때문에 군사의 수가 적어짐 고구려 역시 기력을 많이 소모하여 화친을 청함(3차 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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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년 | 태원으로 가 분양궁에서 피서한 후 다시 장성을 나가 북쪽을 순시함 돌궐의 시필극한이 군사를 동원하여 안문(산서성 대현)에서 양광을 포위함 의성공주의 힘으로 도망쳐 돌아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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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년 | 낙양에서 용선을 타고 강도를 유람함(3차 강도 유람) | |
617년 | 강도에서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마시고 놀았음 | |
618년 | 쿠데타가 일어나 목 졸려 죽음 |
주요민란
연도 | 이름 | 근거지 | 행적 |
---|---|---|---|
611년 | 왕박(王薄) | 장백산(산동성 장구) | |
611년 | 손조안(孫祖安) | 고계박(하북성 고성 서쪽) | |
611년 | 두건덕(竇建德) | 낙수(하북성 헌현) | 손조안이 전사하자 군중은 두건덕 밑으로 들어가 하북성 대부분을 점령하여 하(夏) 왕국을 세움으로써 민란 지도자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
611년 | 장금칭(張金稱) | 하곡(하북성 청하) | |
613년 | 백유사(白瑜娑) | 영무군(영하 영무) | 도망친 노복들을 결집하여 목장의 말을 약탈하고 북쪽으로 돌궐과 연합했다. 수 정부에서는 노적이라 불렀다. |
613년 | 맹해공(孟海公) | 주교(산동성 정도) | 군중 수만 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사대부를 가장 혐오하여 대화를 할 때 유가의 서적을 인용하는 자를 보면 바로 목을 베었다. |
613년 | 양현감(楊玄感) | 여양(하남성 준현) | 궁정 쿠데타 |
613년 | 주섭(朱燮) | 오군(강소성 소주) | 주섭은 곤산현에서 박사를 지낸 고급 지식분자로 학생 수십 명과 함께 기병하니, 징병과 군량 징발에 시달리던 인민이 대거 합세했다. |
613년 | 두복위(杜伏威) | 역양군(안휘성 화현) | 단양군(강소성 남경)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장강 하류를 모두 장악했다. |
614년 | 이홍지(李弘芝) | 부풍군(섬서성 봉상) | 부장 당필(唐弼)이 이홍지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당왕이라 불렀다. |
615년 | 이자통(李子通) | 여항군(절강성 항주) | 오(吳)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
615년 | 주찬(朱粲) | 관군(하남성 등주) | 초(楚) 제국을 세워 황제로 자청했다. 행동이 잔인하고 난폭하여 민란 수령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
616년 | 이밀(李密) | 낙구창(하남성 공의) | |
616년 | 임사홍(林士弘) | 예장군(강서성 남창) | 강서 및 광동 동부를 통일하고 초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
616년 | 고개도(高開道) | 어양군(천진 계현) | 연(燕) 왕국을 세워 연왕이라 칭했다. |
616년 | 서원랑(徐圓朗) | 임성(산동성 제녕) | 노(魯) 왕국을 세워 노왕이라 칭했다. |
616년 | 양사도(梁師都) | 삭방군(섬서성 정변) | 양사도는 수 정부의 응양낭장(鷹揚郎將)으로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북쪽으로 돌궐과 연합하고 양(梁)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군웅들 중 맨 뒤에 멸망했다. |
616년 | 유무주(劉武周) | 마읍군(산서성 삭주) | 유무주는 수 정부의 응양교위(鷹揚校尉)로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북쪽으로 돌궐과 연계하니 돌궐은 그를 정양극한(定揚可汗)에 봉했다. |
617년 | 곽자화(郭子和) | 유림군(내몽고 탁극탁) | 지방에 큰 기근이 들자 곽자화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지방 관원을 죽이고 왕으로 칭했다. 이에 돌궐이 곽자화를 평양천자에 봉했으나, 곽자화가 고사하여 옥리설(屋利設)로 고쳐 불렀다. |
617년 | 설거(薛擧) | 농서군(감숙성 천수) | 진(秦)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으나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뒤를 이었다. |
617년 | 이연(李淵) | 태원군(산서성 태원) | 쿠데타 |
617년 | 이궤(李軌) | 무위군(감숙성 무위) | 이궤는 수 정부 무위군 응양부의 사마(司馬)였는데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양(凉) 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칭했다. |
617년 | 소선(蕭銑) | 강릉(호북성 강릉) | 소선은 남량 제국 7대 황제 소찰의 증손으로 당시 나현(호남성 멱라)의 현장으로 있다가 기병하여 남량 제국을 회복하고 황제로 칭했다. |
618년 | 우문화급(宇文化及) | 강도군(강소성 양주) | 궁정 쿠데타 |
619년 | 왕세충(王世充) | 낙양 | 궁정 쿠데타. 황제로 칭했다. |
619년 | 유계진(劉季眞) | 이석군(산서성 이석) | 돌리극한(突利可汗)이라 칭했다. |
619년 | 송금강(宋金剛) | 역주(하북성 역현) | 정양극한 유무주를 항복시키고 송왕에 봉했다. |
620년 | 양정도(楊政道) | 정양군(내몽고 화림격이) | 양정도는 양광의 손자로 돌궐이 수왕으로 세우니 돌궐에 있던 한인 만여 명이 그에게로 귀순했다. |
621년 | 유흑달(劉黑闥) | 장남현(하북성 고성 동쪽) | 당 정부 관리가 가렴주구를 일삼자 두건덕의 옛 부장이었던 유흑달이 기병했다. |
인구변화
연대 | 전국 호수 | 전국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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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년 | 890만 호 | 4,600만 명 |
626년 | 290만 호 | 1,600만 명 |
18년에 걸친 대혼전에서 마지막 승리는 이연(李淵)이 차지했다. 그가 세운 당 왕조가 수 왕조를 대신하여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종전의 20년 또는 30년에 걸친 왕조교체의 혼란기에 비해 18년은 가장 짧은 고통이었지만 이 짧은 기간동안 전국 인민의 3분의 2가 비명에 죽었다.
수 양제의 계보
부왕: 문제(고조, 견) 文帝(高祖, 堅)
모후: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 왕비: 양민황후 소씨(煬愍皇后 蕭氏)
- 후궁 : 선화부인 진씨(칭호 : 진귀비)
- 후궁 : 소장빈(蕭將嬪)
- 후궁 : 오귀비(吳貴妃)
- 후궁 : 우문숙비(宇文淑妃)-우문개의 딸
- 후궁 : 유정(劉定)
참고문헌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8』(일송북, 2005)
백양 저, 김영수 역,『맨얼굴의 중국사 3』(창해,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