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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0일 (월) 07:18 판
목차
양판희(样板戏)의 개념
양판희(样板戏)는 문화대혁명시기에 ‘혁명양판희’로 정립된 이십 여가지의 희극 무대 예술 작품의 속칭으로 문화대혁명 시기를 대표하는 문예이다. 한국어로는 모범극, 모범예술로 번역할 수 있다.
양판
양판(样板)이란 1964년부터 장칭(江青) 등 공산당 내 급진파에 의해 시도된 경극혁명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가리킨다. ‘양판’이라는 용어는 1965년 현대경극 <홍등기(红灯记)>를 찬양하는 <해방일보(解放日报)>의 사설 <인진지향경극홍등기학습(认真地向京剧红灯记学习)>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소설 <홍암(红岩)>을 희극으로 각색할 것을 지시한 장칭이 이 작품을 양판이라 지정하면서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1966년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部队文艺工作座谈会纪要)>에서 양판에 해당하는 작품의 예가 간접적으로 제시되었고, 이후 1967년에 8편의 대표적 양판희 작품이 공연되면서 양판은 무산계급 혁명문예의 발전을 위해 수립된 전범으로 정확히 정의되었으며 해당하는 작품들이 분명히 확정되었다. 1969년 4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양판을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양판은 단순히 본받을 만한 작품을 넘어서 절대로 수정해서는 안되는 완벽한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문예형식의 차원을 넘어서 작품을 통해 제시된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모델이라는 의미를 함께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양판으로 선정된 작품을 양판희라고 칭하는 것은 중심 형식이 경극이나 발레극 등의 공연 예술이기 때문이다.
양판희의 형성과정
1942년 모택동의 발표 연안문예강화는 49년 이후 사회주의 중국의 유일한 문예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연안문예강화는 당시의 역사적 특수성에 제한된 것이므로 보편적인 규범으로 적용되기에는 해석에 관련한 문제가 있었으며, 이후 문예계 비판을 거쳐1666년, 고정되고 보편적 적용이 가능한 문예규범인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部队文艺工作座谈会纪要)>가 발표되었다.
<기요(纪要)>를 통해 선포된 문화대혁명의 문예규범
‘위대한 국가, 위대한 당, 위대한 인민, 위대한 군대에 부끄럽지 않은 사회주의 혁명 신문예,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여는 가장 찬란한 신문예의 모델’을 양판을 통해 제시하면서 문화대혁명의 규범을 형상화했다. 이러한<기요(纪要)>의 문예규범은 다음과 같은 실천적 이론을 가진다. 1. 근본임무론: 사회주의 문예의 근본임무는 공농병 영웅인물을 빚어내는 것이다. 2. 삼돌출론: 모든 인물 중 긍정적 인물을 부각시키고 긍정적 인물 중에서도 영웅적 인물을 부각시키고 영웅적 인물 중에서도 가장 영웅적 인물을 부각시켜야 한다. 3.주제선행론: 창작 시 주제사상을 먼저 정한 뒤 인물과 이야기를 선택하여 주제사상을 표현해야 한다.
양판의 현실모델
문화대혁명 주도 세력들은 양판을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제시하려했다. 그들은 기존의 지식인과 문예계가 그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문예규범에 적합한 대중을 찾아 기존 문예계를 대체하고 한편으로는 양판의 모델이 되는 인간형으로 삼으려 했다. 그 첫번째는 바로 홍위병이다. 초기 홍위병들은 구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를 낙관함으로 사회주의 모델에 부합했으나 1968년부터 쇠퇴하며 집단 이기주의적 성격을 띄는 등 변질됨으로써 부적합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농병이 그 뒤를 이어가게 되었지만 문화대혁명을 주도할 현실적인 능력이 부족했으므로 모택동과 문화대혁명 주도세력이 직접 문예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양판의 집체창작
공농병 대중은 창작능력이 부족하였으므로 문예창작을 공업생산과 같이 조직적인 집체창작을 통해 이루어나갔다. 당의 간부와 공농병 대중, 직업적 문예가가 조를 이루어 협의를 통해 양판을 창조하였고 이러한 방식을 삼결합이라 칭한다.
8대 양판희
1967년 5월 23일 모택동 <연안문예강화(延安文艺讲话)>발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선보인 8대 양판희로서 경극 <홍등기(红灯记)>,<사가병(沙家浜)>,<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기습백호단(奇袭白虎团)>,<해강(海港)>과 발레극<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백모녀(白毛女)> 그리고 교향악<사가병(沙家浜)> 을 가리킨다. 이 8편의 양판희는 장칭(江青)의 지시에 따라 더 수정되어 1970년부터 1972년 사이에 최종 완결본으로 정리되었고 영화로 제작되어 보급되었다. 이후에도 양판희가 추가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작품의 수준 측면이나 대중의 호응 측면에서 이 8편에 미치지 못했다.
경극<홍등기(红灯记)>
혁명 현대경극 중 하나로 양판희 가운데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동북 항일 연합군 시기의 동북 인민 항일 투쟁을 반영하여 1962년에 만들어진 영화 <자유후래인(自有后来人)>에서 소재를 취하여 개작한 것으로 중일 전쟁 기간에 일본군에 맞서서 지하투쟁을 벌이다 희생되는 한 철도 역무원과 그 모친, 딸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상영된 뒤 1963년, 상해 호극단에 의해 호극으로 수정되었고 이를 본 장칭이 경극으로 제작하도록 함으로써 1964년 현대경극 <홍등기>가 완성되었다.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모택동(毛泽东)과 장칭의 승인을 얻은 뒤 전국 각지에서 공연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양판희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경극<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1958년에 상해경극원이 장편소설<임해설원(林海雪原)>을 경극으로 각색한 것으로 국공간의 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겨울, 36명의 중국공산당 병사들이 중국 남부에 있는 한 국민당 군대의 요새로 침투하여 마침내 그것을 장악한다는 내용이다. 1963년 장칭의 주목을 받고 장칭의 지시에 따라 원작 소설의 필자인 곡파(曲波)가 참여하여 수정작업을 했고 장칭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1967년 8대 양판희의 북경 공연에서 모택동이 직접 내린 수정 지시를 받음으로써 다시 양판희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경극<해강(海港)>
1964년 장칭이 노동자 문제를 다룬 극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이효민이 창작한 회극 <해강적조신(海港的早晨)>을 경극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원작인 <해강적조신(海港的早晨)>은 부두 노동자들의 생활을 소재로 삼아 만든 극이었는데 양판희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건국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두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따라 반동적인 음모를 전멸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이 이루어지다가 심지어는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966년 장칭에게 승인을 얻고 1967년 북경공연에서 모택동에게 승인받았다.
경극<기습백호단(奇袭白虎团)>
한국전쟁에 종군한 중국인민지원군 경극단이 귀국을 준비할 때 주은래(周恩来)가 참전경험을 경극으로 만들 것을 권유함으로써 구상된 작품이다. 한국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 정찰병 부대장 양육재(杨育才)가 금성전투에서 백호부대 기습작전을 벌여 백호기를 뺏어온 영웅기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다. 귀국 후 지원군 경극단이 산동성 경극단으로 편입되며 작품을 재구성하여 기습백호단이라는 제목으로 완성했으며, 이후 1964년 모택동의 인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불만을 품은 장칭으로부터 계속적인 수정 지시를 받았다.
경극<사가병(沙家浜)>
최좌부(崔左夫)의 혁명회고록 <혈염착적성명:삼십육개상병원적투쟁기실(血染着的姓名:三十六个伤病员的斗争纪实)>을 원작으로한 현대경극이며 일본군 처하에서 비밀 투쟁을 벌이던 중국공산당 지하 첩보원이 부상당한 공산당 병사를 구출하여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내용이다. 이후 1950년대 말에 상해인민호극단이 호극 <로탕화종(芦荡火种)>으로 개작했고 이를 장칭이 북경경극단에 추천하여 <지하연락원(地下连络员)>이라는 경극으로 만들어져 초연되었지만 반응이 좋지 못해 수정작업을 거쳤고 1967년 다시 <로탕화종(芦荡火种)>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오가 관람한 뒤 제목을 <사가병(沙家浜)>으로 바꿀 것을 지시해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발레극<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주은래 총리의 발레의 “혁명화, 민족화, 대중화”라는 직접적인 관심 하에 창작된 것으로 원래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을 1963년에 발레극으로 개작한 것이다. 1964년 9월 당 간부들에게 극찬을 받고 10월에는 마오에게 “혁명은 성공적이며 방향도 적절하고 예술적으로도 좋다”며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장칭이 개입하여 대대적으로 수정되어갔으나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뒤 67년 양판희로 정립되었다.
발레극<백모녀(白毛女)>
1945년의 가극 <백모녀(白毛女)>가 원본이며 역시 주은래의 건의에 따라 1964년 상해 무용학교에서 발레극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소형발레극으로 상연되었지만 점차 대형 발레극으로 발전하였다. 1967년 4월에는 마오와 장칭이 관람하고 수정지시를 했지만 실제로 수정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장칭에 지시에 따라 수정에 들어갔으나 실패해 문혁이 끝날때까지 작품의 공연에 제한을 받았다.
교향악<사가병(沙家浜)>
1964년 장칭의 지시에 따라 중앙악단이 음악에서의 중서결합을 모색하던 중 경극 <사가병>의 한 대목을 관현악 반주의 합창곡으로 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중앙악단은 이를 전곡으로 확대하여 작품을 완성했고 새롭게 만들어진 형식의 명칭을 정함에 있어서는 장칭이 “교향음악”을 주장해 “교향합창”으로 타협되었다. 그러나 66년 발표된 문예규범 <기요(纪要)>에서 장칭은 자신이 주장한 “교향음악”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고 이후 교향음악이라는 명칭이 최종적 공인을 받았다.
평가
양판희에 대한 평가를 긍정과 부정으로 가를 시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할 수 있다.
문혁 시기 극좌 노선의 충실한 반영물에 불과하며 관중들의 타 희곡에 대한 감상 선택권이 없었기때문에 대중의 호응은 강제적이거나 문화대혁명의 왜곡된 대중운동의 기억에 의한 것이므로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라 여기는 부정적 견해들이 있다. 또한 화극의 체제에 창을 접목시켰을 뿐 경극이라 인정할 수 없으며 권력의 감독하에 기획되고 창작되면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모택동의 어록이나 표어가 지나치게 많이 인용되어있어 정치 선정성이 강할 뿐 문학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적 평가들이 있다.
이에반해 긍정적 평가로는 양판희는 정치, 사회적 환경 아래 보편적으로 형성된 관중의 이원대립적 사유모식과 전통적으로 추구되어온 영웅 숭배와 대단원 추구라는 심미모식을 잘 파악하고 적용한 것이므로 관중의 확대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주장하며, 화극의 수법을 도입하였으나 공농병의 현대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제한된 것이고 唱,念,做,打의 연기수단이나 음악 방면은 전통의 기초인 程式을 계승하고 개조하여 신 정식으로 현대화시킨것이므로 경극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또한 양판희는 이전시기의 유연했던 경극의 극본체계를 고정시키고 전통적 영웅전기를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대사들 또한 서정적이고 대구나 비유 등 형식미를 갖춤으로써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는 문학적 긍정적 평가가 있다.
그런가하면 양판희는 기존 문예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문혁 문예의 성과라는 문혁주도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며 양판희 작품 가운데 대다수는 문혁 이전에 이미 여러가지 형식으로 존재하던 것을 개작한 것이므로 개작되기 전 문예의 가치만 인정하는 시각과, 양판희는 경극 현대화 과정을 통해 이미 만들어졌으며 강청이 그것을 절취한 것일 뿐이라며 양판희의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주장도 있다.
참고문헌
문화대혁명시기 양판의 형성과정, 김진공
양판희에 관한 몇가지 오해에 대한 변, 김형란
바이두백과 样板戏 8大样板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