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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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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진하면서 지식인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마오쩌뚱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모든 정파의 의견이 개진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거세지자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 때문에 50~70만 명의 "우파"가 체포되고 일부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를 반우파투쟁이라고 한다. 반우파 투쟁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백화제방이 애초에 공산당이 반대파를 색출하기 위해 놓은 덫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공산당은 [[모리스 마이스너]]에 따르면, 이 당신 공산당은 결코 하나의 통일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보단 백화제방은 당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 이때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사회주의 원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나, 마오는 결국 이들이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반우파투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ref>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2004, p.265-269</ref>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진하면서 지식인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마오쩌뚱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모든 정파의 의견이 개진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거세지자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 때문에 50~70만 명의 "우파"가 체포되고 일부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를 반우파투쟁이라고 한다. 반우파 투쟁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백화제방이 애초에 공산당이 반대파를 색출하기 위해 놓은 덫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공산당은 [[모리스 마이스너]]에 따르면, 이 당신 공산당은 결코 하나의 통일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보단 백화제방은 당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 이때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사회주의 원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나, 마오는 결국 이들이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반우파투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ref>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2004, p.265-269</ref>
 
===대약진운동===
 
===대약진운동===
[[대약진운동|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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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br/>중소분쟁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마오쩌뚱은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위기감을 느낀다. 그 결과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되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촌의 공업화로 도농 동시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전국에 7만개의 인민공사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고삐를 바삐 당겼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철 생산량의 양적 팽창에 열을 들였지만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했다.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치 때문에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철은 90%가 사용 불가능했다. 이렇게 인력과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려 농업 생산량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이 상황에서 마오쩌뚱은 참새를 해로운 새라고 말해 결국 병충해의 창궐로 이어졌다. 게다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관료주의에 젖은 지방 관리들의 실적 날조 때문에 대약진운동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중소분쟁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마오쩌뚱은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위기감을 느낀다. 그 결과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되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촌의 공업화로 도농 동시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전국에 7만개의 인민공사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고삐를 바삐 당겼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철 생산량의 양적 팽창에 열을 들였지만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했다.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치 때문에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철은 90%가 사용 불가능했다. 이렇게 인력과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려 농업 생산량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이 상황에서 마오쩌뚱은 참새를 해로운 새라고 말해 결국 병충해의 창궐로 이어졌다. 게다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관료주의에 젖은 지방 관리들의 실적 날조 때문에 대약진운동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2016년 12월 24일 (토) 01:25 판

모택동

출생 1893년 12월 26일
후난성(湖南省) 샹탄현 사오산 구
사망 1976년 9월 9일
생존시기 청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주요 작품 모순론, 신민주주의론 등
관련 활동 정치, 문학,

개요

생애

어린시절

청년시절

공산당 창당

1921년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자 일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진독수는 1919년에 러시아인을 통해 코민테른과 접촉을 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1921년 드디어 상하이에서 공산당은 창당되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 것이 이 당시의 모택동은 창당대회에 참여하기는 했을지언정 결코 당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상하이에 가보면 공산당 창당 기념관이 있는데, 모택동이 회의 당시 일어나서 연설을 하는 듯한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하지만 과연 실제 회의에서 이러한 연설을 했을지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공산당 생활

공산당 창립 이후, 이곳에 속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자신이 농민출신이라서 인지) 농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고 농민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파악하였다. 1922년 당시 모택동은 호남성 지부의 서기로 있었는데 훗날 회고하기를 당시 진독수 휘하의 공산당의 활동은 주로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집중이 되었을 뿐, 농민들에게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었다고 한다.[1] 1927년에는 농민의 혁명 투쟁에 대한 당시 당내외의 비판들에 답변하기 위해 『호남농민운동 시찰보고』라는 글을 써 중앙위원회에 제출하며 [2]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하지만 진독수를 위시한 공산당은 여전히 농민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이 농민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간과하고 시간이 흐른 뒤, 1927년 장개석국민당이 4.12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학살당하였으며 국민당과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여 무한에 있던 공산당 무한정부는 결국 소멸되고 만다.

정강산 시절

1927년 8월 1일 국민당의 학살에 대한 반동으로 하룡엽정이 이끄는 제20군은 주덕과 힘을 합쳐 남창봉기를 일으킨다. (이를 기려 지금도 중국의 8월1일은 군인의 날이다.) 모택동 또한 소규모 군대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며 호남성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정강산에 들어간다. (흔히들 이 정강산을 지리산에 들어간 빨치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강산은 산새가 험하고 둘레 500리, 직경 80리가 되는 거대한 산이다.) 모택동은 1927년 겨울부터 1929년 초까지 정강산에 있었는데 이곳에 있는 동안 힘을 크게 키운다. 당시 정강산에서 산적을 하고 있던 왕좌와 원문재의 군대를 합류시키고 1928년 5월에는 주덕의 군대가 정강산에 도착하였고 ‘모주군毛朱軍’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홍군 제4군이 탄생하였다. 정강산은 지형이 험하고 요새로서의 기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산을 탈환하기 위한 국민당의 군대들을 모두 물리쳤다. 1929년이 1월 이들은 정강산에서 나왔다.

강서 소비에트 성립

정강산에서 나온 이들은 강서성 남부지역에서 혁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여러차례 성공을 거둔다. 차츰 강서성 남부는 거의 홍군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1929년 12월 복건성 서부지역에서 개최된 제 4군 제 9차 당원대표회의에서 이들은 강서성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로 합의한다. 이들의 첫 근거지가 수립된 셈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들이 근거지를 마련한 것을 그냥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는데 이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초공전을 계획한다. 1930년 말. 제 1차 초공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에 이러지는 계속된 초공전에도 홍군의 강서 소비에트는 무너지지 않았는데 이들을 정강산 시절부터 써오던 게릴라 전략으로 국민당의 군대에 맞섰기 때문이다. 게릴라 전략은 다음과 같다.
敌进我退-적이 오면 우리는 도망간다.
敌止我扰-적이 멈추면 우리는 적을 괴롭힌다.
敌避我击-적이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敌退我进-적이 도망치면 우리는 추격한다.
제 4차 초공전까지는 홍군이 승리를 거두지만 제 5차 초공전은 그 양상이 달랐다.

대장정

대정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
독일에서 군사 고문까지 초빙해 홍군의 씨를 말리려고 한 장개석의 5차 초공전으로 인해 1934년 10월 강서 소비에트는 붕괴를 맞이하게 되고 이들을 그 끝을 모르는 후퇴를 하게 된다. 처음 시작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길을 걸어가는 그 누구도 이 걸음이 1년동안 이어진 대장정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8만여명이 출발하였으나 1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산시성 북부에 도착할 때는 6천여명의 병사만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들은 1935년 10월 368일간의 장정의 종언을 선언하고 이곳에서 힘을 키운다.

제2차 국공합작

1936년 12월 장개석의 부하였던 장학량은 서안사건을 일으킨다. 장개석을 구금하고 국민당공산당과 연합을 하도록 한 것. 이 일로 인해 공산당국민당 사이의 싸움은 잠시 정지가 되고 점점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오는 일본에 대해 힘을 합쳐 맞서게 된다. 1937년 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같이 싸운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남은 것은 이 드넓은 중국 대륙을 누가 차지하느냐 였다. 이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국공 내전 재개

항일전쟁 이후 1945년 미국은 국민당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을 먼저 공격하는 판단을 내린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파상공세로 공산당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과오로 인해 공산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이 서서히 열세에 처하게 되었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의 중화민국 국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에 국민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리쭝런이 대표로 재협상을 시도하지만 공산당은 이미 승기를 잡았기 때문에 재협상 시도를 무시한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반우파투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추진하면서 지식인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에 마오쩌뚱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모든 정파의 의견이 개진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거세지자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 때문에 50~70만 명의 "우파"가 체포되고 일부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를 반우파투쟁이라고 한다. 반우파 투쟁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백화제방이 애초에 공산당이 반대파를 색출하기 위해 놓은 덫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공산당은 모리스 마이스너에 따르면, 이 당신 공산당은 결코 하나의 통일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보단 백화제방은 당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마오쩌둥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 이때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사회주의 원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나, 마오는 결국 이들이 사회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반우파투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3]

대약진운동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고
중소분쟁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마오쩌뚱은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위기감을 느낀다. 그 결과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되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촌의 공업화로 도농 동시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전국에 7만개의 인민공사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고삐를 바삐 당겼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철 생산량의 양적 팽창에 열을 들였지만 아무런 기술적,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했다.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치 때문에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철은 90%가 사용 불가능했다. 이렇게 인력과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려 농업 생산량에 큰 차질을 빚었지만 이 상황에서 마오쩌뚱은 참새를 해로운 새라고 말해 결국 병충해의 창궐로 이어졌다. 게다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와 관료주의에 젖은 지방 관리들의 실적 날조 때문에 대약진운동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너무나 처절한 것이어서, 결국 마오쩌뚱은 국가 주석직을 사임한다. 마오쩌뚱이 실권에서 밀려난 동안 류사오치덩샤오핑이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실권을 장악해갔고, 마오쩌둥은 점점 상징적 위치로 밀려났다. 대약진 운동 이후 1960년대 조정정책은 경제 회복을 이끌어냈으나 사회불평등의 격화, 이데올로기적 이상향 약화, 새로운 관료 엘리트층의 공고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마오쩌뚱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실시한다. 4대 자유를 통해 당내 주자파를 타도하고 사구를 타파하는 등 홍위병을 비롯한 대중 운동을 통해 상부구조 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면서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부당하게 고초를 겪었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으며 사회 전반이 마비에 이르렀다. 홍위병의 활약으로 정권을 재탈환한 마오쩌뚱은 자신이 이미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이용해 이들을 진압하고 하방시켰다. 결국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1981년의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혁은 당, 국가,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을 초래한 내란이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덧붙여 마오쩌뚱이 문혁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긴 했지만 전체 일생을 보면 공적이 첫째이고 오류가 두 번째라는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이 과오라고 공식 선언했다.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정부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망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뚱의 편에 서서 문혁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공식적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린뱌오가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 쿠데타를 준비하게 된다. 1971년 린뱌오와 그의 부하들은 마오쩌둥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는 사전에 감지되어 실패하고 린뱌오는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후계자로 지목할 만큼 가까웠던 자신의 부하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마오쩌뚱은 권력에 한 발 떨어져 있는 태도를 보였고, 이후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이 이끈 사인방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사인방은 마오쩌뚱이 죽고 난 후의 국정장악을 노려 미디어 등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확충시키려고 했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복권시켰으나, 사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려고 했다. 마침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이에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이자 사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씌우고 마오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사망했고 중국은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1. 에드가 스노우, 홍수원 외 3명 옮김, 『중국의 붉은 별』, 2004, p.189
  2. 모택동, 김승일 옮김, 『모택동 선집』, 범우사, 2001, p.29
  3.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2004, p.265-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