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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상학(申商學)과 [유가]사상을 공부하였다. [[문제]] 시기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태자 계(啓,경제)를 가르쳤으며 [[경제]] 즉위 후 좌내사(左內史)로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흉노에 대한 대책으로 병사론(兵事論)과 사민실변책(徙民實邊策)을 제시하였고 제후국에 대해서는 [[가의]]의 중건제후정책(衆建諸侯政策) 보다 더 급진적인 삭지정책(削地政策)을 건의하였다.<br> | 하남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상학(申商學)과 [유가]사상을 공부하였다. [[문제]] 시기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태자 계(啓,경제)를 가르쳤으며 [[경제]] 즉위 후 좌내사(左內史)로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흉노에 대한 대책으로 병사론(兵事論)과 사민실변책(徙民實邊策)을 제시하였고 제후국에 대해서는 [[가의]]의 중건제후정책(衆建諸侯政策) 보다 더 급진적인 삭지정책(削地政策)을 건의하였다.<br> | ||
조조는 교묘하고 간사하며, 정치, 행정, 군사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조는 비록 통일 왕조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다재다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가, 예술가였다. 그의 대표적 공으로는 북방민족 정벌, 친정을 중시하는 정치, 과감한 개혁─구현령─, 문학과 서예 등 예술 방면의 성과를 꼽을 수 있다.<br> | 조조는 교묘하고 간사하며, 정치, 행정, 군사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조는 비록 통일 왕조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다재다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가, 예술가였다. 그의 대표적 공으로는 북방민족 정벌, 친정을 중시하는 정치, 과감한 개혁─구현령─, 문학과 서예 등 예술 방면의 성과를 꼽을 수 있다.<br> |
2017년 6월 8일 (목) 10:08 판
B.C.200-B.C.154
하남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상학(申商學)과 [유가]사상을 공부하였다. 문제 시기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태자 계(啓,경제)를 가르쳤으며 경제 즉위 후 좌내사(左內史)로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흉노에 대한 대책으로 병사론(兵事論)과 사민실변책(徙民實邊策)을 제시하였고 제후국에 대해서는 가의의 중건제후정책(衆建諸侯政策) 보다 더 급진적인 삭지정책(削地政策)을 건의하였다.
조조는 교묘하고 간사하며, 정치, 행정, 군사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조는 비록 통일 왕조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다재다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가, 예술가였다. 그의 대표적 공으로는 북방민족 정벌, 친정을 중시하는 정치, 과감한 개혁─구현령─, 문학과 서예 등 예술 방면의 성과를 꼽을 수 있다.
- 북방민족 정벌
- 제도적 성과
- 또한 조조는 친정을 중시하는 면모가 있어 정치, 사회, 군사 등의 모든 방면의 정책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한 헌제는 이리저리 휘둘리며 실권을 쥐지 못하는, 형식상의 황제였다. 조조는 그의 권력의 상징성을 이용하기 위해 그를 모시고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수도를 이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구현령을 포함하여 둔전제, 호조법 등 과감한 제도를 실시하였다. 특히 둔전제와 호조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려 했다. 당시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은 계속 떠돌아 다니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조조는 새로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민둔을 두어 전후 황폐한 땅의 생산량을 높였다. 이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제도라고 볼 수 있다. 호조법은 세금을 개별 징수하는 것이 아닌 호 단위의 가족마다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다.
- 가장 과감한 개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구현령인데, 이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뽑겠다는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다. 덕행과 무관하게 능력만 보는 인사 방식은 신분과 예법에 구속되지 않고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등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 조조의 최후
- 삭지정책(削地政策)은 제후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봉지 일부를 몰수하는 정책으로 경제는 이를 추진하였다. 삭지정책은 제후국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오초칠국의 난으로 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난을 멈추기 위한 경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조조는 죽임을 당하였다.
- 삭지정책(削地政策)은 제후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봉지 일부를 몰수하는 정책으로 경제는 이를 추진하였다. 삭지정책은 제후국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오초칠국의 난으로 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난을 멈추기 위한 경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조조는 죽임을 당하였다.
- 조조에 대한 평가
-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후대에 의해 비범하지만 잔혹하고 간사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조조는 진수의 <삼국지>에는 시대를 초월한 영웅으로 묘사된 반면, 약 10세기 이후 창작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간웅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조조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 진(晋) 사람이었던 진수는 <삼국지>에서 위를 정통으로 보았으나 진 멸망후 진이 두 개로 갈라지면서 조조의 평가는 부정적으로 변한다. 동진 사람인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촉이 정통이며 진은 위가 아닌 한을 계승하였다. 이러한 평가의 변화는 당나라 시기에도 나타난다. 당대 초기에는 조조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당 태종은 <제위태조문>에서 조조를 찬양하였고, 당 현종은 조조의 아명을 빌려 자신을 ‘아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안녹산, 사사명의 난으로 인해 당이 옛 촉 땅으로 피난을 가면서 조조의 적인 제갈량을 긍정적으로,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으로 변화하였다. 즉, 조조에 대한 평가는 왕조의 근거지의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