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조
유방(劉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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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247 |
사망 |
B.C. 195 |
목차
개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황제로, 진(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거병하여,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와의 초한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한(漢)나라를 건국한다.
생애
출생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 패현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공(太公),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태공은 노인장, 유온은 유씨 어멈이라는 뜻이므로 부모의 이름도 확실치 않다. 유방이라는 이름도 황제가 된 이후에 비로소 붙여진 것이다. 그의 자(字)는 계(季)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들 중에 막내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방의 집안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민 이상은 못된다. 하루는 유온이 호숫가에서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신선과 교합했다. 당시 천둥 벼락이 요란하게 치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태공이 유온을 찾았을 때는 유온의 몸에 용이 앉아 있었다. 그 후 유온은 임신을 하여 유방을 낳는다.
외모
유방은 코가 높고 앞이마가 돌출하였다. 이른바 용안(龍顏)이었다. 또한 수염이 멋있게 났으며 좌측 허벅지에 72개 점이 있었다.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넓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젊은 시절
사람됨이 관대하고 좋아 남에게 잘 베풀었으며 항상 희희낙락했다. 배포가 커서 농사짓는 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사수(泗水) 정장(亭長)이 되었다. 진제국의 행정제도에 따르면 군(郡) 아래에 현(縣), 현(縣) 아래에 향(鄕)이 있으며, 향 아래는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여 치안과 소송을 담당케 했다. 그 정의 책임자가 정장이다. 유방은 정장이면서도 진중하지 못하여 관리들을 놀려먹기 일쑤였다.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즐겨 마셨는데 취해 잠들면 그 위에 항상 용이 나타났다. 괴이한 현상에 놀란 술집 주모들은 연말이 되면 외상 술값을 탕감해주었다. 유방은 한때 함양에 강제노동으로 불려간 적이 있었다. 마침 진시황의 거창한 행차를 목격한 유방은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을 했다.
-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해먹어야지!”
패현의 현령과 절친한 친구였던 여공이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도망와 정착했다. 현령에게 귀한 친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관리들이 다투어 인사를 왔는데 유방도 그 틈에 끼었다. 당시 명함에 부조 액수를 적어 올리는 관례가 있었다. 현령의 인사팀장 소하가 선포했다. “1천 전(錢) 이하는 마당에 앉으시오.” 유방은 천방지축이었기 때문에 대뜸 “1만 전이오!”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땡전 한 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1만 전이란 소개에 여공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유방을 맞이했다. 여공은 관상을 즐겨 보았는데 유방의 얼굴을 보고는 공손하게 좌석으로 안내했다. 소하가 쏘아붙였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잘 치지 일을 이루는 건 드뭅니다.” 유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당당하게 상석에 앉았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유방에게 눈짓을 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유방에게 따로 말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관상을 즐겨 보았지요. 그간 숱하게 관상을 봤지만 유계만한 사람이 없었다오. 부디 자중자애하시기 바라오. 저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유계에게 시집보내 집안 청소라도 시키고자 하오이다.” 여공의 부인이 다그쳤지만, 여공은 무시하고 유계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 딸은 후에 여태후가 되고, 유방과의 사이에 아들 효혜제(孝惠帝), 딸 노원(魯元) 공주를 낳는다.
거병
진시황릉 공사의 노동력 징발에 따라 유방은 죄수들을 역산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지금의 강소성 풍읍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적잖은 죄수들이 탈주하여 역산까지 가고 말 것도 없었다. 유방은 풍읍 서쪽 호숫가에 이르렀다. 술을 마시며 쉬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죄수들을 풀어주며 일렀다. “다들 알아서 살 길을 찾아가시오. 나도 이제 초야에 숨을 것이외다.” 죄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 십여 명 장정은 유방의 배짱에 반하여 두목으로 모시겠다며 따라왔다. 이때부터 유방은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 부근에 해당하는 망(芒)과 탕(碭) 산록에 은거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한번은 유방이 술에 취한 채 늪지대를 걷다가 앞을 가로막은 큰 뱀을 칼로 토막 낸 적이 있었다. 이를 사람들은 적제(赤帝)의 아들이 백제(白帝)의 아들을 처단한 것으로 소문을 내면서 이곳저곳의 죄수들이 유방에게 몰려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진제국의 이세황제 호해가 즉위하던 기원전 209년 10월, 진승·오광이 진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이후로 폭정에 견디지 못한 각지의 백성들과 전국시대 제후국의 후손들도 앞 다투어 의거에 참여했다. 유방은 수백 명을 이끌고 패현으로 돌아와 소하, 조참, 번쾌 등과 내통하여 현령을 죽이고 패현을 장악했다. 모두들 유방을 리더로 추대했다. 진승은 그 당시 이미 초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초나라 구제도에 따르면 현령을 공(公)이라 불렀으므로 유방은 패공이 되었다. 유방은 패현에서 이미 3,000여 명의 병사를 규합하여 주변 고을을 공략하면서 반진(反秦)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참모 장량을 휘하로 끌어들였으며 지금의 산동성 조장(棗莊)에 해당하는 설현(薛縣)에서 옛 초나라 귀족인 항량 및 항우의 군대와 합류한다.
반진(反秦)전쟁
진승·오광이 거사한 이후로 반군의 세력은 전국으로 퍼졌다. 반군 세력은 전국적으로 10여 개 집단이 있었지만 전투 경험과 리더십 부족으로 진승·오광은 부하나 배신자에게 살해되었고, 반군의 기세는 한풀 꺾인다. 이때 항량은 각지의 반군 수장들을 설현으로 초청하여 향후 전략을 구상한다. 그 결과 옛 초나라 마지막 군주 회왕의 손자 웅심을 정신적인 리더로 옹립하고 투쟁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존칭도 초회왕(楚懷王)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동시에 지금의 안휘성 우이(旴台)에 도읍지를 정하고 군웅을 통솔하여 조직적인 전략으로 진제국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진제국 이세황제 호해 2년 기원전 208년 9월, 계속되는 승전에 교만해지기 시작한 항량은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에서 진제국의 백전노장 장한에게 참패당해 전사한다.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해당하는 진류(陳留)를 포위 공격하던 유방과 항우는 즉시 철군하여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에 해당하는 팽성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아울러 초회왕을 팽성으로 피신시킨다. 장한은 항량을 대파한 후 다시 군대를 이동시켜 옛 조나라 지역으로 진공하여 반군 집단의 하나인 조헐(趙歇)을 포위했다. 고립된 조헐의 세력은 팽성의 반군 총사령부에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초회왕은 송의와 항우에게 북상하여 조헐을 구조하도록 명하고 그와 동시에 유방에게 관중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도록 명했다. 출정에 앞서 초회왕은 장수들에게 약속했다.
- “관중을 먼저 공략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
진 제국의 전투력은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에 반군 장수들은 함양공략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유독 항우만은 숙부 항량이 전사한 탓에 적개심에 불타 유방과 함께 관중을 돌파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초회왕의 측근 노장들이 반대했다.
- “항우는 사람됨이 포악하여 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진제국을 공략하려면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장수가 나서야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환영하고 관리들이 투항할 것입니다. 적임자는 유방입니다.”
- “항우는 사람됨이 포악하여 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진제국을 공략하려면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장수가 나서야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환영하고 관리들이 투항할 것입니다. 적임자는 유방입니다.”
유방은 진승과 항량의 패잔병을 정비하여 의용군의 이름을 내걸고 진제국 치하의 민심을 얻으며 서쪽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지금의 하남성 하읍(夏邑)에 해당하는 율현(栗縣)을 점령하고 팽월의 도움으로 지금의 산동성 금향(金鄕) 서북쪽 창읍(昌邑)을 공략했다. 또한 소문지기 소졸 역이기의 건의로 진류(陳留)를 수중에 넣어 군량미를 확보하고, 장량의 계략으로 지금의 남양(南陽)에 해당하는 완성(宛城)을 포위했다. 그리고 진회(陳恢)의 전략을 채용하여 남양 군수를 투항하게 했다. 남양 군수가 투항하자 유방은 곧바로 그곳을 봉읍지로 책정했다. 투항하면 바로 그곳을 봉읍지로 하사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진제국의 지방관들은 앞 다투어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의 군대는 군기가 삼엄하여 노략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무혈 진공을 계속하던 유방의 군대는 호해황제 3년 기원전 207년 8월 무관을 돌파하여 관중의 동남방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때 항우도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에 올라 진제국의 주력부대를 차례로 격파하고, 40만 대군을 통솔하여 관중으로 치닫고 있었다.
반군 주력부대가 압박해오자 진제국은 내분이 일어났다. 환관 우두머리 조고가 이세황제 호해를 살해하고 유방에게 밀사를 보내 관중을 나눠 갖자고 제의한 것이다. 유방은 음모로 간주하여 거절했다. 조고는 호해의 조카 자영을 황제롤 내세웠다. 자영은 조고의 음모를 눈치채고 기회를 틈타 조고를 살해한다. 진제국이 내홍으로 갈팡질팡할 때 유방은 진제국의 장수를 매수하고 효산을 우회하여 지금의 섬서성 남전(藍田)에서 진제국 방어망의 허를 찔러 대파했다. 그 뒤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 해당하는 패상(覇上)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쪽으로 함양을 눈앞에 두게 된다.
기원전 206년 10월, 진제국의 마지막 황제 자영은 소복 차림으로 황제의 옥새와 군대 통솔권 병부(兵符)를 손수 들고 대신들과 함께 유방에게 투항했다. 진제국이 정식으로 멸망한 이 해를 역사책은 고조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영이 투항하자 장수들은 살해하려고 했다. 유방이 말렸다. “초회왕께서 나를 파견한 뜻은 관대하게 처리하라는 것이었소. 투항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길하오.” 유방은 자영을 간수에게 넘겼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뒤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이며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보고는 욕심이 생겨 궁실에 눌러앉으려 했다. 이때 번쾌와 장량이 극구 말리자 유방은 흔쾌히 받아들여 궁실과 창고를 봉쇄하고 패상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각 현의 장로와 호걸들을 소집한 유방은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포한다.
“그동안 진제국의 가혹한 형벌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판하면 삼족을 멸하고, 수군거리면 공개 처형을 당하셨지요. 이제 저는 제후들과 약속한바 그대로 먼저 관중 땅을 밟았으므로 이곳의 왕이 됩니다. 여러분들께 바라는 것은 법조문 단 석 줄입니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상해를 입히거나 도둑질 하면 그에 상응하는 징벌을 받습니다. 진제국의 기존 엄형준법은 폐지합니다. 관리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살리려고 온 것이지 괴롭히려고 온 것이 아니오니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유방은 위와 같이 민심을 수습하였다. 관중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앞 다투어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유방의 군대에게 바쳤다. 유방은 사양했다. “창고에 곡식이 충분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관리들과 백성들은 더욱 기뻐했다. 모두들 유방을 지지했으며 혹시나 유방이 관중의 왕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다. 이즈음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접근하면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홍문지연(鴻門之宴)
기원전 206년 12월, 항우는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동북방에 위치한 함곡관에 당도했다. 유방의 군대가 관문을 열어주지 않자 항우는 진노하여 경포 등에게 명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나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 동북방 희정(戱亭)에 진을 쳤다. 유방 군대와는 불과 40리를 거리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이때 유방 휘하의 조무상이 항우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보내 고자질을 했다. “패공은 자신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승상으로 삼은 다음 진제국 궁실의 금은보화를 독차지하려는 속셈이 있답니다.” 참모 범증도 경고했다. “유방이 관중 땅을 밟기 전에는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혔는데 지금은 일체 손도 안 대고 있다 하오. 야심이 있는 자가 분명하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절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항우는 전군을 배불리 먹이고 이튿날 새벽 총공세를 펴기로 결정했다. 유방은 10만 병사, 항우는 40만 대군, 중과부적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항우의 작은아버지 항백이 심야를 틈타 장량을 찾아갔다. 예전에 목숨을 구해줬던 은혜를 갚기 위해 장량을 구출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유방에게 사실대로 말해버렸고 유방의 계략에 말려든 항백은 교묘한 사탕발림으로 항우를 설득했다. 이튿날 유방은 홍문으로 달려가 항우에게 비굴한 언사로 사과를 했다. 범증의 살해 기도를 모면한 유방은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호랑이 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홍문지연의 긴장된 분위기는 「항우본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초한대전의 시작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제국의 궁실을 모두 불사르고 지나는 곳마다 도륙을 일삼았다. 진제국의 관리와 백성들은 실망하고 공포에 떨었지만 위세에 눌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사람을 보내 초회왕에게 함양 점령을 보고했다. 초회왕은 “약속대로”하라고 지시했다. 항우는 초회왕을 원망했다. 당초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여 관중 땅을 공략하려 했으나 초회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북상하여 조나라 지역을 구원하라고 명해 항우는 뒤늦게 함양에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선포했다.
“회왕은 우리 항씨 집안이 얼굴마담으로 세워놓았을 뿐이다. 한 것도 없는 사람이 명령을 내릴 작격이나 있겠는가.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들과 본인이다.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들과 본인이다.”
그리고는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추대하면서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항우는 곧 자신을 서초패왕으로 임명하고, 전국시대의 양(梁)나라·초(楚)나라 일대 9개 군을 봉읍지로 거느리며 팽성을 도읍지로 삼았다. 이어서 17명의 장군들을 각각 연고지의 제후왕으로 임명한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유방을 한중왕(漢中王)으로 깎아내리고 파촉 및 한중의 변두리 지역을 봉읍지로 내린다.
유방은 항우가 당초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을 변두리로 내몬 처사에 분개하여 즉시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막료 소하가 말려서 일단 참았다. 유방은 도읍지 남정으로 부임하면서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외나무다리를 불사르며 행군했다. 기타 제후왕들이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도 차단할 겸 동진하지 않을 것임을 항우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남정으로 행군하는 도중 유방의 병사들은 동쪽에 두고 온 고향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너도나도 탈영했다. 한신도 수차례 탈주했는데 그때마다 소하가 뒤쫓아가 달래서 데려왔다. 유방은 소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한신의 전략을 받아들여 장병들이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항우와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소하에게 파촉의 세금을 거둬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명하고, 한신에게 명하여 외나무다리를 복구하는 척하면서 진창(陳倉)을 습격하여 일거에 관중 세력을 제압해버렸다. 이제 유방은 한중왕에 임명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항우와 천하를 놓고 겨루는 초한지쟁(楚漢之爭)에 접어든 것이다.
팽성대전
유방이 관중지역으로 치고 올라올 때 항우는 전국시대 제나라 지역에서 제후왕 임명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전영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방이 관중을 탈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우는 즉시 회군하여 유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장량은 서신을 보내 유방은 단지 처음 약속대로 관중 땅을 차지하면 만족할 것이며 더 이상 동진할 생각이 없다고 알렸다. 이에 항우는 안심하고 계속 전영을 공략하게 된다.
한편 유방은 관중으로 올라온 뒤 진제국의 왕실 전용 수렵장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하는 등 민심을 회유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듬해 유방은 병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낙양을 점령하면서 항우의 세력권에 바짝 다가갔다. 낙양에서 마을 장로 동공(董公)의 건의를 받아들인 유방은 ‘의제를 살해한 항우의 죄악상’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의제를 위해 대성통곡하는 쇼맨십까지 연출했다. 그런 다음 각지의 제후왕들에게 통보하여 ‘의제를 살해한 죄인’을 토벌하자고 선동했다. 항우의 불공정한 제후왕 임명에 불만을 품었던 제후들이 적극 가담하면서 유방의 연합군은 56만 대군으로 성장했고 여세를 몰아 항우의 도읍지 팽성까지 함락했다.
팽성을 공략한 유방은 일시적으로 득의양양하여 초패왕의 금은보화 및 미녀들을 차지하고 연일 음주가무에 빠져들었다. 제나라 지역에 발이 묶여 있던 항우가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유방을 기습했다. 유방은 참패를 당하고 기병 10여 명만 이끌고 팽성을 탈출하지만 부친과 처자식은 항우에게 생포되었다. 항우의 기세에 놀란 제후왕들은 유방과 결별하고 모두 항우 편으로 붙었다. 유방은 후퇴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재기에 성공한다. 유방은 한신 등에게 명하길 북상하여 위표와 조헐을 공략해서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팽월에게 명해 남쪽에서 항우의 세력을 교란시키도록 했다. 또한 수하(隨何)를 파견하여 구강왕 경포를 회유하여 항우를 배반하도록 부추겼다. 유방의 작전이 이처럼 교묘하긴 했지만 여전히 항우의 상대가 안 되었다. 형양에서 포위당한 유방은 군량미마저 끊기자 휴전을 제의했다. 항우는 범증의 지시대로 휴전 제의를 거절하고 유방의 군대를 계속 몰아붙였다. 겹겹 포위망에 갇힌 유방은 자신으로 위장한 장군기신(紀信)의 도움으로 기병 수십 명을 대동하고 탈주에 성공한다.
광무대치
유방은 항우의 예봉을 피해 지금의 하남성 획가현 동쪽 소무산(小武山)에 진을 치고 항우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이때 항우는 단독으로 붙어 결판을 내자고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유방은 항우의 10대 죄악을 열거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극악무도한 못된 항우를 처단하러 왔는데 감히 이 어르신네께 도전하겠다고?” 항우가 분노하여 활을 당겼다. 화살은 유방의 가슴을 정통으로 맞춰버렸다. 유방은 즉각 발가락을 부여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이 내 발가락을 맞췄네.”
유방은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장량은 쓰러진 유방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유방이 여전히 건재함을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해하의 결전
고조 4년 기원전 203년 8월, 항우는 유방의 포위 전략에 빠지면서 군량미가 바닥났다. 어쩔 수 없이 유방에게 휴전을 제의해 천하를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항우가 군대를 해산하고 동쪽으로 귀환할 때 유방 역시 서쪽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피폐해진 항우 군대를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진언했다. 유방은 즉각 마음을 바꾸었다. 한신과 팽월에게 사신을 보내 함께 항우를 제거하자고 제의했다.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과 팽월에게 제후왕을 약속하자 그제서야 한신과 팽월이 움직였다. 유방은 사신을 보내 초나라 대사마 주은(周殷)과 경포를 설득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여 지금의 안휘성 와양(渦陽) 동쪽 성보(城父)를 함락시켰다. 유방은 유방대로 주력 부대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벽(靈壁) 남쪽 해하까지 밀고 나갔다. 한신, 팽월, 경포, 주은 등이 대군을 이끌고 뒤쫓아오자 도합 30만 대군이 항우를 겹겹이 포위해버렸다. 항우의 군대는 지치고 굶주렸는데 한풍이 몰아치는 깊은 밤 사방에서 초나라 고향 노래가 울려퍼졌다. 항우는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깨닫고는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안휘성 화현 동북방 오강진에 이르러 자결하고 만다. 장장 4년에 걸친 초한지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정치
군국제의 실시
한 제국 통일 유방은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데 공이 컸던 신하들과 유씨 일족들을 제후(諸侯)와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제후(諸侯)가 분봉된 곳은 30여 郡 이상이었고 전국의 2/3에 가까운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반해 황제는 수도 장안과 그 근기지역을 군현제로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초한대전 당시 보여주었던 이성제후(異姓諸侯)들의 뛰어난 역량은 통일 후 황제에게 잠재적인 위험요소가 되었다.
이성제후 제거
유방은 제후들에 의해 황제 권력이 위협받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楚王 한신을 제거하였다. 초한대전 때 보여준 한신의 능력은 통일 후 유방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 때문에 유방은 거짓으로 순행을 발표한 뒤 한신을 체포했다. 한신은 회음후(淮陰候)로 강등당하고 후에 여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韓王 신(信)은 흉노에게 포위되자 항복했는데, 이를 계기로 황제는 國을 폐하였다. 趙王 장이(張耳)가 죽은 다음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중앙정부에 죄를 지어 열후列候로 강등당하였다. 梁王 팽월(彭越)은 모반의 혐의로 죽음을 당하였다. 이성제후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淮南王 영포(英布)는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 당하였다. 燕王 노관(盧綰)은 이렇게 이성제후들이 제거되는 것을 보고 흉노에게 항복해버렸다. 長沙王은 후계가 없어 화를 면하였지만 그가 죽은 후 나라는 해체되었다. 이렇게 모든 이성제후를 제거한 유방은 그 자리에 동성제후를 봉하였다.
흉노와의 관계
유방이 중원을 통일했을 때에는 흉노의 모돈단우(冒頓單于)가 몽고 만주 중앙아시아지역을 모두 통일하여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한을 침략하여 진대에 빼앗겼던 하남지역을 회복하였다. 이에 유방은 흉노를 직접 정벌하고자 하였다. 모돈단우의 40만 기마병사와 유방의 32만 보병부대가 지금의 산서성 대동현 부근에서 맞붙었다. 유방은 모돈단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평성에서 포위당하였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백등지위)
이후 유방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는데 종실의 여자를 모돈단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많은 비단과 쌀 등을 넘겨주어야하는 불공정한 조건을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화친조약을 맺은 후에도 흉노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들의 강한 군사력 때문에 뚜렷한 해결방법도 없었다.
유방에 대한 평가
“ 항우가 포악할 때 유방은 덕정을 베풀었다. 파촉 한중에서 분발하여 관중 땅을 수복했다. 항우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천하가 안정되면서 제도와 풍속을 일신했다.
”
함양을 공략할 장수를 선정할 때 반란군의 정신적인 영수였던 초왕 및 초왕의 군신들은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유방을 택했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약법삼장을 선포하여 진제국의 백성 및 관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비해 항우는 함양에 들어서기도 전에 투항한 진제국의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시켜버렸다. 그리고 정작 함양에 입성해서는 항복한 진제국의 황제 자영을 살해하고 궁실을 불사르고 금은보화를 약탈했다. 진제국의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뒤 항우와 유방이 대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유방의 군대가 항우에게 수차례 격파 당했지만 그때마다 소하가 관중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속속 지원해줄 수 있었던 것도 유방이 그 지역의 민심을 이미 얻어놓은 덕분이었다.
항우는 서초패왕에 오른 뒤 반군 장수들을 제후왕으로 임명했다. 그 과정에서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여 파촉 지역으로 좌천시켜버렸다. 한편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은 전영 등 제나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우는 이들을 토벌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이때 유방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가 관중지역을 수복한다. 당초 약속대로라면 관중 땅은 유방의 몫이었기 때문에 수복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유방은 장량·진평 등 측근의 계략 및 역이기·수하 등 유세객의 건의를 채용하고 한신, 팽월, 경포 등과 연합하여 마침내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그 후 유방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국공신들을 제거하면서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세를 경감하고 형벌을 관대하게 하고 재야의 인재를 발탁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소하, 한신, 장창 및 숙손통 등에게 명하여 법령, 군법, 역법 및 의례를 정비토록 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제도와 풍속’을 일신했다는 뜻이다.
“ 애초에 고조는 문학(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닦지 못했지만 품성[成]이 밝고 매사에 통달했으며 계책을 좋아하고 능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아 문지기나 말단 병사라도 옛 친구를 대하듯이 했다.
”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였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유방이 황제가 된 뒤 낙양 남궁에서 잔치를 열면서 신하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막사에 앉아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재주는 내가 장량을 못 따라간다. 후방에서 백성을 안정시키며 군량미를 대고 공급로를 유지하는 재주는 내가 소하만 못 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백전백승 하는 재주는 내가 한신을 따라갈 수 있겠나. 이 세 사람은 인걸들이다. 나는 그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유방은 사람을 대할 때 예의가 없고 막가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일단 타당한 소리를 들으면 즉각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여 바로 고쳤다. 예를 들어, 역이기의 계책을 받아들여 장량에게 소개했을 때 장량은 여덟 가지 이유를 들어 악수(惡手)라고 진단했다. 이때 유방은 먹던 밥을 뱉어내며 욕설을 퍼부었을지언정 즉각 자신의 실착을 인정하고 원래 계획을 당장 취소해버렸다. 처음 함양에 입성했을 때 호화로운 궁전과 금은보화 및 미인을 차지하고 안주하려 했지만 번쾌와 장량의 권고를 듣고 즉각 막사로 돌아온 것도 그런 맥락이다.
참고문헌
사마천 저, 『사기, 역사와 삶의 철학이 만나는 살아 있는 기록』, 고은수 풀어 씀, 풀빛, 2006
사마천 저, 『사기본기,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역사로』, 이인호 새로 씀, ㈜사회평론, 2004
김희보 저,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0